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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진실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조롱당하고,
다음에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지만,
결국에는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955년 12월 1일, 미국에서 한 여성이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에는 우리나라처럼 자리를 양보하는 문화가 없다. 그런데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체포까지 당하다니, 왜 그랬을까?

로자 파크스라는 이 흑인 여성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분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흑인들은 이 사건에 항의하여 버스탑승 거부운동을 벌였다. '몽고메리 보이콧'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흑인 민권운동을 이끈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전국적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당연하다고 간주되는 가치 중에는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꿈으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많다. 인종차별이 공공연하던 시절, 미국에서는 버스좌석은 물론 공공장소의 수도꼭지마저도 백인용·유색인용이 구분되어 있었다. 여성차별이나 신분제 역시 과거에는 당연한 관행이었다. 

니겔 로스펠스의 <동물원의 탄생>(이한중 역, 지호)이라는 책에는 '인간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몇 백 년 전 유럽의 학자들은 유색인이 인간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어디쯤 세워야 할지 고민했던 그들은 피부색에 따라 계급을 만들었다. 인간 동물원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탄생했다.

유색인을 '가장 우수한 유인원' 정도로 여겼던 유럽인은 세계 각지의 유색인을 유럽으로 끌고 와서 동물과 함께 전시했다. 유럽에 끌려온 유색인들은 전시용으로 조성된 촌락에 살면서 관람객의 오락을 위해 쇼를 강요받곤 했다. 나체의 사람들도 전시되었던 이 인종 전시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학문의 장'으로 간주되었던 인간 동물원은 관음증의 합법적인 해소 공간으로도 기능했다.   

유럽불곰이 본래의 생태와 전혀 거리가 먼 환경에 감금되어 있다. 한때는 인간도 전시 대상이었고, 이러한 전시는 '학문' '인종 연구'의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인간 전시는 사라졌지만, 그것의 기반이 된 이데올로기는 창살 너머에 건재하고 있다.
▲ 동물원의 유럽불곰 유럽불곰이 본래의 생태와 전혀 거리가 먼 환경에 감금되어 있다. 한때는 인간도 전시 대상이었고, 이러한 전시는 '학문' '인종 연구'의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인간 전시는 사라졌지만, 그것의 기반이 된 이데올로기는 창살 너머에 건재하고 있다.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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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간 동물원은 유럽의 부끄러운 광기와 야만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동물은 지금도 창살 너머에서 눈요기 대상이 되고 쇼를 강요받는다.  

동물이라고 다 같은 동물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에 대한 차별은 부당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차별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사람의 동물에 대한 차별은 물론이고, 동물 간의 차별이 당연시된다.

"반려견과 식용견은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자신의 반려견은 무척 사랑하면서도 개고기를 즐겨 먹던 직장 동료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물권에 관심이 없었지만, 반려견과 식용개는 다르다는 동료의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똑같이 개의 속성을 지닌 동물을 식용견과 반려견으로 나누는 발상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작년 8월에는 '양파망 고양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인터넷을 달궜다. 문제의 사진은 양파망에 담긴 채 판매되는 고양이를 찍은 것인데, 고양이가 관절에 좋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애묘인들의 공분을 샀고, 해당 관청 게시판에는 고양이를 식용으로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민원이 빗발쳤다.

많은 애견·애묘인들이 개·고양이 식용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도 소·돼지·닭을 비롯한 여타의 동물을 먹는 데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애견·애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치킨, 족발 사진이 일상적으로 올라온다. 보신탕은 혐오의 대상이지만, 복날 삼계탕에 대한 반대는 찾아볼 수 없다. 

철학자 피터 싱어가 쓴 헨리 스피라 평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김상우 역, 오월의봄) 본문 122쪽을 촬영한 사진.
▲ "당신은 어떤 동물을 쓰다듬고 어떤 동물을 먹나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철학자 피터 싱어가 쓴 헨리 스피라 평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김상우 역, 오월의봄) 본문 122쪽을 촬영한 사진.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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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식용견과 반려견으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개·고양이는 반려동물로, 소·돼지·닭은 식용동물로 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미국의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의 말처럼 "고양이는 쓰다듬고 돼지는 칼과 포크로 찌르는" 것이 당연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모두 두려움과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피부색이 인간을 차별하는 기준이 되었듯이, 동물과 인간의 친밀도는 동물을 차별하는 기준이 된다. 똑같이 개의 속성을 지닌 동물을 반려견과 식용견으로 나누는 건 "사람의 가족인 개와 그렇지 않은 개는 다르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와 친하지 않은 동물은 (또는 사람은) 생명의 가치가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동물을 식용·비식용으로 나누는 것은 흑인과 백인 중 어느 한 쪽의 생명이 더 무겁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모두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기준일 뿐이다.

나는 오늘날의 육식이 전 지구적으로 야기하는 환경문제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리고 고통을 늘리기보다 줄이는 것이 옳다는 취지에서 "개라도 먹지 말자"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식용으로 희생되는 다른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는 "개라도 먹지 말자"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 없다.

소·돼지·닭을 비롯한 식용동물의 고통은 개식용 산업이 야기하는 고통과 규모면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개·고양이를 대상으로 했다면 '학대'로 간주되었을 행위가 소·돼지·닭에게는 '표준 관행'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외면한 채 개식용만 반대하는 것은 "내가 개를 예뻐하니까 당신도 먹지 말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고통은 누구의 것이든 옳지 않다. 개 식용 반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부터' 시작하여 다른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면 훨씬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부 개식용 옹호론자들처럼 개의 고통을 물타기하고 본질을 흐릴 목적으로 소·돼지·닭의 고통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소·돼지·닭의 고통에 진정 공감한다면 고통을 하나라도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들은 개의 고통까지 늘리자는 궤변을 주장한다. 이것은 채식주의에 맞서 식물의 고통을 거론하며 본질을 흐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가장 거대한 학대에는 침묵한 채 개·고양이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까? 학대의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와 실천 없이 개식용 반대만 부르짖는 것은 동물간의 차별을 강화시키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산란계 한 마리에게 평생 주어지는 생활공간은 A4 용지 한 장보다도 작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엘리베이터 크기의 공간에 7-8명이 평생 갇혀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동물의 복지를 무시하는 공장식 축산이 구제역·AI를 비롯한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전염병 해결의 근본대책은 법을 개정해서라도 사육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란계 한 마리에게 평생 주어지는 생활공간은 A4 용지 한 장보다도 작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엘리베이터 크기의 공간에 7-8명이 평생 갇혀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동물의 복지를 무시하는 공장식 축산이 구제역·AI를 비롯한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전염병 해결의 근본대책은 법을 개정해서라도 사육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JTBC & Jcube Intera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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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신은 개를 먹지 않지만, 개식용을 둘러싼 잔인한 사육·도축과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식용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개식용이 합법화되어도 기존의 문제는 개선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소·돼지·닭이 처해 있는 환경으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생명'이 아닌 '고기 기계'로 전락하여 평생 고통 받고, 전염병이라도 돌면 몰살을 면치 못하는 '고기 공장'에서의 처지가 지금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이 있을까? 구제역·AI를 통해 근본적인 한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현행 축산 방식에 개까지 끌어안을 여력이 있다는 건가?

고기, 불편하지만 끊을 수 있을까? 

반려고양이가 삶의 중요한 존재가 되면서 나는 고기를 먹기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고기를 먹는다는 건 모순이었다. 고양이 덕분에 동물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먹는 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저런 합리화에 기대려고 했다. 자연의 약육강식, 육식은 건강에 필수라는 믿음, 육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자연스러운 문화라는 믿음이 나를 유혹했다. 그러나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런 믿음은 습관을 바꾸기 싫은 내 마음이 지어낸 변명거리에 불과했다.

자연의 약육강식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육식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고기를 먹기 위해 수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살처분하는 동물이 지구상에 인간 말고 또 있을까? 육식동물도 육식을 하는데 인간의 육식이 무슨 문제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육식동물은 태생적으로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육식동물의 육식은 인간의 육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평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육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굳이 동물의 습성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육식이 건강에 필수라고 외치기에는 건강한 채식주의자가 너무나 많다. 인도에는 채식주의자가 얼마나 흔한가? 세계적인 장수촌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마 린다는 채식주의자들의 공동체로 유명하다. 그리고 육식이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니 유지되어야 한다면, 인종차별, 성차별, 신분제 역시 오랜 역사를 지녔으니 유지되어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채식주의를 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양극단만을 고민하던 나는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채식주의만이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날마다 채식을 하기 어렵다면 '고기 없는 월요일' 캠페인과 같이 일주일 중 하루만 채식을 할 수도 있다. 또는 고기 소비를 최대한 줄여 채식지향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 내가 소비를 줄이는 만큼 동물의 고통도 줄어든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불편함을 잊고 고기를 마음껏 먹을 구실을 찾고 있었다.

생각과 행동의 간극을 좁히기가 더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자칭 '고기 킬러'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개그맨 강호동이 아침에 삼겹살을 먹는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대부분 경악했지만 나는 공감했다. 그 맛있는 삼겹살을 아침이라고 못 먹을 이유가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고기 킬러가 고기 없이 살 수 있을까? 고기 없는 삶은 생각만 해도 공허했다. 30년 넘게 길들여진 입맛을 과연 바꿀 수 있을까?

*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태그:#인간 동물원, #동물원의 탄생, #헨리 스피라, #개식용, #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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