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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이 감사를 벌인 서울의 A초등학교.
 서울시교육청이 감사를 벌인 서울의 A초등학교.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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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로 의심받고 있는 한 학생(아래 채군)의 나이스(NEIS, 학생부 전자관리시스템) 혈액형을 하루 동안 17차례 조회한 사실이 드러났다. 서초구청의 채군 개인정보 확인이 청와대 행정관과 안전행정부 공무원의 의뢰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니 더욱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4일 서울교육청의 감사보고서를 토대로 단독 보도(기사: '채동욱 아들 의심학교', 하루 17번 혈액형 들여다봤다)한 이후,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검찰의 수사를 촉구했다. 전교조도 보도자료를 통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교직 15년차인데 혈액형 확인 1번도 안 했는데...

서울교육청 감사 자료에는 하루에 17번의 혈액형을 조회한 것에 대해서 "학년 마감 등 학적관리를 위한 일상업무 수행의 과정이었다"고 해명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고등학교에서 담임 교사를 맡고 있는, 교직 15년차 교사인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학생의 혈액형을 확인한 적이 없다. 지금도 우리반 학생 35명 중에 혈액형을 알고 있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으며, 그들의 혈액형이 궁금한 적도 없었다.

나만 그런가? 아니다. 옆자리에 앉은 20년이 넘는 중견교사 역시 "혈액형이 나이스에 있어요? 그걸 교사가 왜 열어 봐요?"하고 반문한다.

가끔 학생들이 봉사활동 4시간을 부여 받기 위해서 헌혈증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이 때에도 생활기록부에 헌혈한 날짜만 기록하고 봉사활동 4시간만 입력하도록 되어 있지 혈액형 등 다른 어떤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혈액형은 몸무게나 키 등과 달리 선천적으로 정해지면 고정불변하는 것이어서 초등학교 때 한 번 입력하면 다시 고칠 이유도 없다. B형 남자는 소심하고, AB형은 독선적이네 어쩌네 하는 혈액형별 성격 분석이 과학적 근거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상담 자료로 참고하는 교사도 없다.

담임이나 담당 교사, 교장 등 나이스의 학생정보를 열어볼 권한이 있는 사람이라도 혈액형은 관심 밖의 정보이다. 대개의 경우, 혈액형이 나이스의 건강기록부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

즉, 혈액형은 상담 또는 진학을 위해서든, 학적 관리 또는 성적 처리를 위해서든 어떤 목적으로도 학교에서 특별히 열어 보거나 확인할 이유가 없는 정보다. 그래서 서울교육청 감사보고서에 나오는 "학년 마감 등 학적 관리를 위해 학생 혈액형을 들여다보았다"는 해명을 믿기 힘들다. 그것도 하루에 17번이나 열어 보았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누가 거짓말 하나

누가, 무슨 목적으로 채군의 혈액형을 확인했을까? 이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학교 밖으로 유출돼 대한민국 '1등 신문'에 보도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가 채군의 나이스 기록을 열어보았고 혈액형을 확인했다. 청와대도 알고 있었고, 특히 <조선일보>는 채군과 어머니, 그리고 채동욱 총장의 혈액형을 혼외 친자 관계의 유력한 증거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며칠 전 복도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든 학생이 "선생님, 교무실에 있는 종이 파쇄기를 좀 쓸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을 한다. "뭣 때문에 그러는데?"라고 물으니 "생활기록부를 인쇄했는데 필요가 없어졌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지 않니?"라고 다시 물었더니, "그래도 찜찜하잖아요. 파쇄기로 산산조각 내는 것이 개운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 학생이 교무실에 들어와서 종이 파쇄기를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학생이 정보인권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나 개념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냥 일반의 학생이 보기에도, 생활기록부는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망설여지는 정도의, 그래서 반드시 파쇄기로 분쇄해야 하는 문서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 관련 개인정보의 불법유출 의혹을 받는 조이제 서울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이 지난 3일 구청에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 관련 개인정보의 불법유출 의혹을 받는 조이제 서울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이 지난 3일 구청에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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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새누리당의 원내수석부대표인 윤상현 의원은 지난 9월 말경 "여권에도 혈액형이 있다. 당당하게 구했다"는 식으로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강변했다. 정보 인권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곧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 다른 사람의 여권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여권에는 혈액형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여권에 혈액형 있다"...윤상현 '거짓말' 논란 확산)

학생들의 개인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나이스를 합법적으로 열어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담임교사, 나이스 담당자, 교장 등으로 극히 한정돼 있다. 학교 밖에는 교육청의 나이스 관리자도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하나 또는 복수가 채군의 나이스 기록을 열람했고 이를 <조선일보>나 청와대 등 학교 담장 밖으로 유출한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초반 '나이스 파동'을 겪으면서 정리한 학생 정보인권이라는 개념의 대원칙 중 하나가 "학생 정보는 학교 담장 안에, 꼭 필요한 최소한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를 학교 담장 밖으로, 합법적인 목적 외로 가져갔다면 분명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학생의 나이스 기록, 즉 생활기록부나 건강기록부에 부모의 혈액형은 나오지는 않는다. <조선일보>가 보도하기 전에는 채 총장과 채군 어머니의 혈액형이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외부의 의뢰와 같은 다른 목적이 아니면 채군의 혈액형을 열어볼 교사는 없다. 더구나, 특별한 이유 없이 학생 혈액형을 나이스에서 확인해 언론에 제보해줄 교사는 더더욱 없다.

교사, 학교, 교육청, 청와대, 안행부 공무원 등 누군가 또는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더 큰 거짓말을 낳는다. 일시적으로 국민을 속일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당사자들은 진실은 걸음이 느리지만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적 일탈'로 변명하는 권력의 잔인한 무책임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끔찍하다는 생각을 한다. <조선일보>의 혈액형 보도도 그랬지만, <동아일보>의 '아버님 전상서'라는 가상의 칼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알려진 것처럼 채군은 현재 우리나라에 없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태어난 고국을 떠났다.

만약, 채군이 가난하여 외국으로 갈 수 없었다면 그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을까? 학교는커녕 얼굴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10살을 갓 넘은 초등학생에게 너무나도 큰 시련이다. 그가 자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사회가 그에게 강요하고 있는 잔인한 현실이다.

또 하나 끔찍하게 느낀 것이 '개인적 일탈'이라는 변명이다. 청와대 행정관, 안전행정부와 서초구청 고위 공무원 등이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 돌아서, 아무 연관 없는 초등학생의 신상을 개인적으로 캐고 다닌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수행 중 있었던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은 개인적 일탈이라 할 수도 있다. 임명의 잘못이나 감독의 잘못,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성추행을 대통령이 예견하거나 지시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3일 오후 전격 사의를 표명한 채동욱 검찰총장이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를 나서고 있다.
 지난 9월 13일 오후 전격 사의를 표명한 채동욱 검찰총장이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를 나서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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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천만 건에 이르는 국정원의 트위터나 댓글, 국방부 사이버 사령부 군인들의 대선 개입을 개인적 일탈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 청와대, 안행부와 구청의 고위공무원이 아무 관련 없는 초등학생 정보를 캐고 다닌 것을 개인적 일탈로 변명하기에는 너무 민망하다. '잘 되면 대통령 덕, 못 되면 개인적 일탈'이라는 비아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들의 변명처럼, 상명하복의 집단인 군인, 정보기관, 청와대와 공무원 사회가 이렇게 개인적 일탈을 집단적으로 저지르고 있다면 당나라 군대도 이런 당나라 군대가 없다. 이런 집단이 공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이고, 이런 집단적인 '개인적 일탈'을 관리하지 못하는 정권 역시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교사 또는 학교가 평소 한 번도 볼 일이 없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학생 혈액형을 하루에 17번이나 열어본 것도 개인적 일탈로 설명하기에는 우습다. 다른 경로, 다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진실은 밝혀질 수밖에 없다.

당사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들은 채군과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검찰 수사나 감찰을 통해 밝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채동욱 총장이 물러났고 청와대가 개인적 일탈이라고 선을 그은 상황에서 얼마나 진실을 밝혀낼지 의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다.

청와대든 교사든, 아니면 교육청이든 언론이든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학생의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감각하고, 또 권력과 언론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더불어 학생 신상과 관련된, 그렇게 많은 정보가 나이스라는 사이버 공간에 지금처럼 집적되어야 하는지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태그:#채동욱, #네이스, #박근혜, #개인적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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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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