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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예정이었던 8번에서 혈장 림프 필터를 위해 7번을 더 추가해서 모두 15회나 하게 되었다. 피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 혈장교환을 위해 가슴 위쪽 정맥에 관을 시술한 아내 원래 예정이었던 8번에서 혈장 림프 필터를 위해 7번을 더 추가해서 모두 15회나 하게 되었다. 피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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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숙씨! 채혈 좀 하겠어요."
"예? 아까 해갔는데 또 해요?"

그렇게 잠에 빠질 만하면 깨워서 채혈, 다시 잘만 하면 또 깨워서 채혈, 새벽부터 채혈공세가 심하다. 간밤부터 금식해서 배고픈 집사람을 세 번씩이나 채혈해 갔다.

창밖에는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두드리며 흐르는 빗방울들이 내 마음을 동시에 두드리고 있다. 매는 고사하고 한 번도 모진 소리 한 적 없이 사랑으로 키운 딸아이도 긴 헤어짐에 결국은 무게를 못 견디고 울어서 나를 힘들게 했다. 오랜 세월을 나와 숨 쉬는 것까지 조화를 맞추어 온 아내도 자기 하나 버티는 걸 숨기지 못해 괴로워한다. 하물며 어린 딸이 왜 안 그럴까, 아비라는 나도 나를 감당 못 하는데...

말 없는 새벽비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말이 없다 / 참아라! 하지도 않고 / 못난 사람! 하지도 않고 / 그저 내려와 파편이 될 뿐 / 나도 대꾸도 하소연도 없이 바라만 본다.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슬쩍 창밖을 힐끔거리며 / 아내를 밥도 먹이고 세수도 시키고 / 무심한 척 무표정으로,

병원 뒤 산책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 몸속에 갇혀있던 눈물을 / 비처럼 음악처럼 조금씩 몸 밖으로 내보낸다. / 쇼생크탈출 영화에서 / 흙무더기를 바지 단에 넣어서 / 운동장에 조금씩 버리던 죄수들처럼,

빗물과 눈물은 섞이고, / 아무도 모른다 / 아직까지는...

아침밥 먹자마자 곧 이어 침대로 9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서 CT, MRI, 초음파 등 세 번을 사진촬영하고 돌아오니 벌써 한 낮, 간신히 점심밥을 먹었다. 이어 혈장교체시술을 위해 정맥에 관 시술하러 또 내려갔다. 목 아래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관을 삽입하고 올라온 아내는 좀 무서워했다. 왜 안 그럴까, 나 같으면 다리가 후들 거리고 아마 쫄아서 새 가슴이 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피를 유난히 무서워한다. 큰 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학교 과제물로 무엇을 만들다가 커터 칼이 힘을 잔뜩 준 채로 엄지손가락을 타고 넘어 갔다. 안에 뼈가 보였던가? 하여간 피가 많이 나오고 나는 가슴이 쿵쿵거려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아내가 나대신 급하게 지혈을 하고 직접 운전해서 아이를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그럴 때는 아내가 용감했다. 그런 내게 날마다 수시로 응급실에서 밤을 새고, 아픈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사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지독히 모르는 운명...

모처럼 병실에 가족이 모이다

꼭 한 달 만에 막내 딸아이와 둘째 아들이 왔다. 충주에서 일산까지 5시간, 차를 4번씩 갈아타고, 참 멀다. 아이들과 같이 뉴코아할인매장을 들러 곧 다가올 겨울에 혼자 지내야 할 딸아이 옷을 하나 샀다. 병원에 돌아와 보쌈에 족발로 배를 채웠다. 오랜만에, 정말 한참 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서 온갖 이야기꽃들을 피우고 웃었다. 밤이 늦어 잠자기 위해 각자 뿔뿔이 처소로 흩어졌다. (병실에는 보호자 한사람 자리만 있어서 둘째 아들과 나는 1층 대기실로 내려가서 의자에서 자야 했다.)

아내가 아프기 전, 우리는 저녁마다 웃으며 밥 먹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 나누고 그렇게 살았었다. 그때는 왜 그 순간들이 그렇게 귀한 줄 몰랐을까? 어느 날 사라지고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밥을 꼭꼭 씹어 먹듯 행복을 자근자근 누릴 걸...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만 그렇게 무심히 보낸 게 아니었더라. 많은 사람들이 그 단순하면서도 정작 빼앗기면 간절히 꿈꾸는 일상생활, 소소한 대화들을 얼마나 가볍게 흘려보내는지를 보면 말이다. 심지어 무료하고 따분하다고 불평의 대상처럼 말하기도 한다. 병상에 누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 재산을 다 털어주고도 바꾸고 싶은 행복이고, 그래도 못 이루는 꿈인데 말이다.

아내는 두어 번 방송 촬영 때마다, 몸이 나아지면 뭘 하고 싶은지 소원을 묻는 피디님께 이렇게 말했다.

"아무 것도 소원 없어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다시 따뜻한 밥 한끼 차려주고 싶어요!"

가장 흔하게 하던 일상이 가장 크게 잃어버린 대상이 되었다. 가족들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다고 아내는 방송 촬영 때마다 회복하면 하고 싶은 1순위로 말했다. 그런 소원을 날마다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지 고마운지도 모르고 사는데... (kbs ‘생로병사의비밀’ 방송 자료화면)
▲ 작은 소원 하나 가장 흔하게 하던 일상이 가장 크게 잃어버린 대상이 되었다. 가족들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다고 아내는 방송 촬영 때마다 회복하면 하고 싶은 1순위로 말했다. 그런 소원을 날마다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지 고마운지도 모르고 사는데... (kbs ‘생로병사의비밀’ 방송 자료화면)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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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비록 몸이 불편하더라도 집에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생활을 할 정도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이게 무슨 세상 뒤집어 달라는 큰일 날 소원도 아닌데 안 들어주는지 하늘이 원망스럽다.

'쉽지 않은 죽고 사는 문제'

'호사다마'일까? 순탄한 듯 진행되던 치료가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면역 글로브린주사 리브감마 5일중 3일째 맞으면서 두통과 열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결국은 하루 쉬고 다시 하루를 억지로 맞아보았지만 더 심해지기만 하고, 이틀을 지켜본 결론은 8번째 재발, 다시 스테로이드 주사부터 돌아갔다. 이런 경우는 오래 동안 약 300명의 환자들을 치료한 교수님도 처음 보았다며 어두운 얼굴로 말을 했다.

"안정숙씨 혈액 속의 염증이 아주 심한 악성으로 보이네요..."

다시 찍은 MRI 사진에 넓게 퍼져버린 염증들, 다른 때보다 긴 일주일의 스테로이드 주사와 좀 오래 먹어야겠다는, 12알부터 2알씩 줄여가는 스테로이드 알약,

"어쩔 수 없지요, 기운 빠지게 해드려서 괜히 죄송하네요."

나는 선생님을 위로해드렸다. 그리고 뒤이어 밀려드는 난감하고 지친 마음에 나도 말을 잃었다. 침묵이 흘렀다. 다시 축 늘어져버린 팔다리와 강제로 꼬부라드는 팔꿈치를 수시로 곧게 펴면서 아내도 나도 산다는 것의 새로운 각오가 필요했다.

"하나님! 안 지치세요? 참 길고 지루하시지요? 저도 지치는데..."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가지기도하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은 자신을 떠올리며 다행으로 안도하기도 한다. 물론 내색 않고 속으로 하지만, 참 잔인하고 미안하지만 본성이 그런 걸 어쩌나.

병원1층 로비에서 합창과 성가를 들으며 우아하게 자축하였다.  아내와 나만 알고, 아무도 모르게! 고단한 날 중에 맛보는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누리는 문화생활.
▲ 우연히도 내 생일날 저녁에 열린 공연 병원1층 로비에서 합창과 성가를 들으며 우아하게 자축하였다. 아내와 나만 알고, 아무도 모르게! 고단한 날 중에 맛보는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누리는 문화생활.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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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침대에 새로 아내 비슷한 또래의 환자가 왔다. 폐암 말기라고 한다. 2년 전에 수술하고 제주도로, 또 장성 편백나무 숲으로, 강원도로, 좋다는 곳은 다가서 요양을 했는데도 다시 재발해서 머리까지 퍼지고 말았단다.

그 분은 식사 때마다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남편과 다투기 일쑤였다. 항암치료 때문에 오는 메스꺼움과 울렁거림으로, 그 분은 스테로이드 효과로 밥을 연달아 퍼넣다시피 하며 먹는 아내를 부러워했다. 원래 이런 과한 식욕은 아내의 스타일이 아니고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생긴 거다.

아내는 반대로 자기 발로 화장실이랑 병원 공원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그 사람을 부러워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힘들어하는 그 분을, 세상은 그렇게 서로 부러워하는 것으로 가득 찼나 보다. 그럼 다 행복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게 마음 아프다.

그 분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암이 퍼진 진단을 받으면서 집의 그릇과 옷들을 다 정리하셨다고, 남편에게는 꼭 재혼을 하라고 했는데 단 10년은 지나서 해달라고 했단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 10년을 연애하다가 결혼해서 많은 추억이 있다면서 남편이 밉다고 했다. 안 아픈 사람은 자기 심정을 모른다고.

하긴 나도 아내의 고통과 두려움을 다 모른다. 아내도 나를 많이 미워할까? 하긴 안 아픈 나도 아내가 때로는 미운데 왜 안 그럴까.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폐암 4기이신 그 분이 말했다. 자기가 극복해야할 문제는 지독한 통증과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두려움이라고, 나도 속으로 동의했다. '나도 그러고 살아요'라고, 하물며 구체적 통증을 가진 환자들이야 오죽할까.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쉽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저런 질병과 고통을 각각 가슴에 끌어안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9년 10월부터 2009년 11월 사이, 힘든 치료를 강행군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태그:#희귀난치병, #투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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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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