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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수요일

Riggins, ID - Council, ID
60.5 mile = 97.4 km

새빨간 두 눈을 번득이는 그 짐승은 생쥐였다. 그것도 징그러울 만큼 커다란. 풀밭 어디엔가 구멍을 파고 잠복해 있었는지 밤이 이슥해지자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킁킁거리다가 나무 옆에 기대놓은 자전거로 몸을 움직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고개가 위로 향한다. 자전거 핸들바 양쪽에 매달아 놓은 비닐봉지에 시선이 닿는다. 나무를 타는가 싶더니 어느덧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목표물이 눈앞에 있다. 사각사각. 날카로운 앞니에 얇은 비닐봉지가 무참히 찢겨 나간다.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밑으로 쏟아졌다.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절정에 닿을 무렵 난 사지를 버둥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개꿈이다. 며칠 전 음식을 털리더니 꿈에서까지 이런 젠장맞을 광경을 보게 되다니. 급히 텐트 지퍼를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휴우, 음식은 무사하다. 부처님과 하느님, 천지신명님이 지켜주신 음식 덕에 무사히 아침식사를 마쳤다. 지도를 펴들고 라이딩 전략을 짠다. 오늘 코스에는 폴락(Pollock)에서부터 뉴메도우(new meadows)에 이르기까지 2000피트를 올라가야 한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힘든 코스는 초반에 겪는 게 신상에 편하다. 속도계상 시속 9, 10마일을 꾸준히 유지하는 가운데 도통 오르막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표지판은 뉴메도우(New Meadow)까지 10마일 남았음을 알려준다. 예전에는 하나였을 두 개의 언덕이 길 양 옆으로 길게 뻗어있다. 도로를 뚫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한 가운데를 폭파했단다. 미국 도로 개척의 역사는 그야말로 무에서 유의 창조다. 험준한 고봉준령 사이사이에 도로를 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자와 인력이 동원되었을지 예측할 수조차 없다.

폴락에서부터 뉴메도우까지 2000피트 올라가야 

어거지로 뚫어놓은 듯한 도로. 원래는 이어져 있었을 언덕이 가운데가 사라진 채 양 옆으로 쭉 뻗어 있다.
▲ 뉴메도우(New meadow) 가는 길 어거지로 뚫어놓은 듯한 도로. 원래는 이어져 있었을 언덕이 가운데가 사라진 채 양 옆으로 쭉 뻗어 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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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예상보다 큰 어려움 없이 뉴메도우에 도착했다. 미줄라(Missoula)에서 롤로 패스(Lolo pass)를 오르던 때처럼 아주 완만한 경사였던 것이다.

신선한 음식과 물이 간절하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허겁지겁 음식을 쑤셔 넣었다. 안장에 다시 올라타려는데 예상치 못한 이질감에 놀란다. 휴식과 음식의 영향으로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라이딩 도중에는 점심을 가볍게 먹어야 하거늘 욕심은 늘 절제하기가 쉽지 않다. 내리막길조차 힘이 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타마락(tamarack) 도착. 페더럴 루트(Federal Route) 95번 옆으로 와이저 강변길(weiser river trail)이 나란히 지나간다. 자동차를 피해 숲 속을 달릴 수 있다. 경치는 예쁘지만 길 위로 자갈과 돌이 깔려 있어 울퉁불퉁하다. 맥다니엘 부부와 함께 달렸던 기븐스 패스가 생각난다. 그날 뒷바퀴 타이어 코드가 부서져 큰 낭패를 봤었는데. 또한번 난처한 상황을 겪을까 두려워 비포장도로로는 들어설 수가 없다.

어느덧 카운슬(council)이다. 애초 목적했던 캠브리지(cambridge)까지는 22마일. 또다시 고와 스톱의 난제가 내 앞에 놓여 있다. 근처 편의점의 온도계를 보니 100도에 육박한다. 좋은 핑곗거리가 생기니 몸과 마음이 거기에 쏠리면서 멈추기로 결정이 나버렸다. 마침 '자전거의 벗(bike friendly)'이란 문구를 간판 아래 휘갈겨 놓은 바(bar)가 보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주인 아주머니는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우호적이다.

그녀는 무료로 텐트를 칠 수 있는 뒤뜰을 보여주었다. 25달러를 내면 2층의 객실도 이용할 수 있다. 푹신한 침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마음이 한없이 유약해진 터라 돈을 내고 객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의 모텔 투숙이라 황송하기 그지없다. '돈이 아깝지 않게 최대한 즐겨주겠어.' 스스로 다짐하며 1분을 1시간처럼 찬찬히 음미했다. 여전히 햇살이 비치는 창가를 바라보며 몸과 마음은 고단한 잠으로 빠져든다.

7월 26일 목요일

Council, ID - Halfway, OR
81 mile = 130 km

귓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온 진동이 고막을 흔든다. 시간은 새벽 1시. 박진감 넘치는 비트가 설핏 잠든 나그네를 깨웠다. 1층 바에서 튼 음악 소리가 2층 객실까지 넘어온 것이다. 애써 잠을 청해보니 의식은 다시금 고요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눈을 뜨니 잔잔한 햇살이 창문 너머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헬스 캐년(Hell's canyon). 이름하여 지옥의 협곡을 지나가야 한다. 상당히 뜨거운 한낮을 피하려면 새벽 일찍 출발하라던 커트의 조언이 떠올랐다. 이런, 난 이미 틀려먹었다. 여기서 22마일 떨어진 캠브리지에서 발원하는 협곡에 들어설 무렵이면 중천에 떠오른 태양은 잔인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득달같이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아침 8시까지 잤으니 더욱 큰일이다. 게으른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조금씩 달구어지는 대기를 느끼며 캠브리지에 도착. 중간점검을 하기위해 자전거 가게에 들러 타이어 공기압을 채우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근처에 어른거렸다. 바로 옆에 위치한 총포상 앞에 두 마리의 동물 가죽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머리 부분에 사람의 형상을 한 가면 두 개가 씌워져 있는데 한 명은 미국의 현직 대통령 오바마였고 다른 사람은 부인 미셸이었다. 얼굴은 사람이로되 몸은 동물이니 미노켄타우로스 저리 가라할 만큼 상당히 혐오스런 정치 풍자물이었다.

얼굴은 사람이로되 몸은 동물인 혐오스런 정치 풍자물 

외국인의 눈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의 조롱과 비난이었다.
▲ 캠브리지의 정치 풍자 외국인의 눈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의 조롱과 비난이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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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유리창에는 오바마의 언행을 비꼬는 포스터들이 난무했다. 남의 나라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야 없지만,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 미국은 이래도 안 잡아가나 보지?

뜨거운 정치적 공방을 뒤로 한 채 지옥의 협곡으로 들어섰다. 기분 탓인지 캠브리지를 벗어나자마자 급상승하는 온도가 느껴진다. 1400피트를 올라 고도 4131피트까지 올랐다. 그다음 7마일 동안의 신나는 내리막. 맞은편에서 커플 라이더가 힘겹게 올라온다. 온몸의 근육을 상당히 쥐어짜는 듯 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하다. 내리막을 타는 라이더 입장에서 반갑게 인사하기가 주저된다. 혹시나 염장질로 느끼지 않을까 염려하는 바이다.

그들에게 힘내라는 격려를 던지고 내리막을 마저 밟으니 저수지 하나가 눈앞에 들어왔다. 브라운리(brownlee) 저수지. 산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이다.

두 눈을 압도하는 엄청난 크기의 지형과 온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가 가득했다.
▲ 브라운리(brownlee) 저수지 두 눈을 압도하는 엄청난 크기의 지형과 온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가 가득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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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둘레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브라운리(Brownlee) 댐이 나오고 그 아래로 다리가 하나 걸쳐 있다. 사뿐히 넘어가 준다. 동시에 표지판에 쓰인 반가운 문구 하나가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Welcome to Oregon."

오오. 드디어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의 마지막 주에 들어서게 되었구나. 버지니아 주를 시작으로 9개의 주를 거쳐 드디어 10번째 주가 눈앞에 있다. 브라운리 댐에서 옥스보우 댐까지는 스네이크 리버를 따라 옥스보우-브라운리 하이웨이가 이어져 있다.

강변에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찬물에 발을 담그고 낚시를 하거나 보트를 타고 수상 스키를 즐긴다. 한편 협곡의 온도는 서서히 달구어진다. 노련한 헬리오스 대신 어설픈 파에톤이 태양 마차를 끌고 내려왔는지 골짜기는 그야말로 찜통. 자전거를 탄 채로 물에 뛰어들고 싶은 욕구가 불끈불끈 솟는다.

옥스보우에 도착해서 온도계를 보니 97도(섭씨 36.1). 오후 5시경에는 온도가 101도(섭씨 38.3)에 이를거라던 뉴스 보도가 생각나 지체할 수가 없다. 남은 18킬로미터를 허겁지겁 달린다. 3마일 남겨두고 산들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서풍의 신 '제퓌로스'가 지친 나그네를 위로하나 보다.

해프웨이(Halfway)에 도착. 지나던 주민 한 명이 공원에서 캠핑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경험이 쌓이면서 짠돌이 근성이 절정으로 치달은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정보. 평평한 풀밭 위에서 적당한 잠자리를 물색했다. 탐색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는 찰나 아저씨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여기다 텐트 치려고?"
"마을 분들께 여쭤봤는데 괜찮대요. 무슨 문제 있나요?"

웨스트 옐로스톤에서 우체국에서 자다가 경찰관에게 봉변 당한 일이 생각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아닌데. 사실 스프링클러가 바닥 여기저기 깔려있단 말이지. 새벽 2시에 작동을 해. 한참 자다가 물에 젖으면 기분도 좋겠다! 그게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야."

순간적으로 여러 번 효과가 입증된 비기(秘技)를 시전했다.

"그거 진짜 문제겠네요. 혹시 앞뜰이나 뒤뜰이 있으면 텐트 쳐도 될까요?"

흔쾌히 응하는 아저씨. 오히려 부탁한 내가 놀랄 정도의 신속한 승낙이었다. 오리건 주에 입성하자마자 첫 인연이 맺어졌다. 그의 이름은 빌 윌슨(Bill wilson). 아저씨는 주방설비를 만들어 판다. 아내인 미셸(Mitchell)은 근처 레저시설에서 투숙객들을 위해 요리를 만든다. 총 5명의 자녀 중 위로 넷은 독립했고 막내딸만이 부부 곁을 지키고 있다.

놀랍게도 5명 중 4명은 입양아다. 입양이라 하면 으레 미국인 부모에 동양인 자녀를 떠올렸던 나로서는 미국 현지 아이들을 입양하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저씨 말에 의하면 미국 내에도 따뜻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고아의 수가 상당하다. 제 나라 아이들도 못 챙기면서 다른 나라, 다른 인종을 챙길 수 있냐는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해는 어느덧 서녘 하늘로 지고 있었다. 야외에 놓인 나무 의자에 빌 아저씨와 미셸 아주머니, 그리고 내가 나란히 앉았다. 이윽고 와인 잔이 돌려지고 붉은 포도주가 잔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미셸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수제 쿠키. 단 맛이 허기진 배를 촉촉히 적셔주었다.
▲ 쿠키는 사랑을 싣고 미셸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수제 쿠키. 단 맛이 허기진 배를 촉촉히 적셔주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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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끝에 감도는 감미로운 향기가 굳었던 몸을 부드럽게 적셔주고 마음은 고요한 정화수마냥 차분해졌다. 1998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플레전트빌(pleasantville)이 생각났다. 데이빗과 제니퍼는 우연히 TV속 흑백시트콤 <플레전트빌>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바보 같을 정도로 아무 감정이 없던 마을 사람들에게 제니퍼는 사랑의 감정을 퍼트리게 되고 흑백이었던 사람들은 칼라로 변해간다. 해프웨이에 도착하기 전까지 흑과 백으로 명멸하던 세상이 지금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여행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은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태그:#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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