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선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지난 6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만나 '전폭적 지지'를 선언한 안철수 전 대선 예비후보가 한 말이다. '타이밍 정치'에 능한 그가 스스로 '분수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과연 '안철수 지원 효과'는 있을까? 그래서 대선 막판 문 후보에게 결정적인 반격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을까? 안 전 후보가 본격적으로 문 후보를 돕기 시작한 7일부터 그의 행보를 쫓았다.
대세론은 늘 바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산에서 시작된 바람은 서울을 거쳐 경기도 서남부권에 상륙하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바람의 세기는 희망의 강도와 정비례한다. 안 전 후보가 지나간 현장 곳곳에서 '흔들리는 표심'이 확인됐다. '이대로 지는가'에서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감지됐다.
안 전 후보는 그 여세를 몰아 10일 호남을 방문, 표심 굳히기에 나섰고, 11일에는 서울에서 숨을 고른 뒤, 12일 강원도로 향했다. '인간 마이크'로 무장한 안철수식 유세로 전국을 훑겠다는 것이다. 바람이 희망과 만나면 투표율 상승효과를 낳는다. 안 전 후보가 문 후보에게 줄 수 있는 올해 최고의 '선물'이다.
"화가 나고 울화통이 터졌지만... 이젠 마음이 좀 풀렸다"
바람의 근원지는 '혼란'이다. 안철수 전 후보를 지지했다가 그의 후보직 사퇴로 패닉 상태에 빠졌고, 그래서 갈 곳 몰라 헤매는 지지층이 1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을 '문재인도 지지한다'로 돌아서게 만드는 게 '안철수 효과'의 핵심이다. 그래서 안 전 후보는 시민들을 만나면 입에 두 손을 모으고 이렇게 외쳤다.
"혹시 주위에서 안철수가 사퇴해서 투표 안 하겠다는 분, 친구나 이웃 계시면 꼭 투표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안철수의 호소'가 통한 것일까? 이영자(68)씨는 안철수 전 후보의 열열 지지자다. 문재인 후보와의 첫 공동유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 광장에 와서 전망 좋은 자리를 맡았다. 이씨는 안 전 후보가 사퇴하면서 단일후보로 문 후보를 지명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문재인이 안철수에 대한 나의 기대와 너무 안 맞았다. 기존 정치권이 싫어서 안철수를 지지했는데, 후보 사퇴한다고 하니, 남은 문재인이나 박근혜나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왕이면 여성이니까 박근혜로 갈까, 아니면 문재인이 좀 더 나을까, 그러면서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함께 안철수를 지지했다가 곧바로 문 후보를 지지한 딸 황소영(42)씨의 설득도 소용없었다. 안 전 후보의 사퇴 이후 "어떻게 해야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 전 후보가 문 후보에 대한 '전폭 지지'를 선언하고 나서야 이씨는 "문재인으로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 옆 PIFF 광장에서 만난 이영숙(47)씨에게도 '안철수 효과'가 통했다. 그는 안 전 후보를 보기 위해 수능시험을 마친 고3 딸의 손을 붙잡고 달려왔다.
"(안 전 후보가 사퇴했을 때) 허무했다. 속상하고, '정말 이게 아닌데' 싶더라. 안철수가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 꼭 필요할 것 같았는데. 그래서 문재인을 지지하지 못하고 그냥 있었다. (문 후보를 전폭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안철수가 지지하는 분은 그 만한 재목이 되니까, 지지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야지."그는 "'안철수 효과'가 있는 것 같으냐"는 질문에 "당연하다. 저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봐도 분명히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인성(24·대학생)씨는 부산역 광장 계단 위에서 굳은 표정으로 안 전 후보의 지원 유세를 지켜봤다. 그는 "지금도 안철수가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사퇴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고 울화통이 터져서 문재인을 지지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좀 풀렸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안 전 후보가 사퇴하면서 단일화가 이뤄졌지만 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여론조사에서 대체로 2~3%포인트 정도 뒤졌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섭섭해 하던 안 전 후보 지지층의 이탈은 시간이 갈수록 늘었다. 6일 이전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와 박 후보의 격차는 7~8%포인트까지 벌어졌다. 박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문 후보의 지지율이 빠지는 모습이었다. 특히 그런 현상은 부산·경남(PK)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안 전 후보와 문 후보가 첫 공동유세를 부산으로 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안철수의 등판'은 이런 추세에 분명한 제동을 걸었다. 주말 대회전을 마치면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문 후보가 다시 2~3%포인트 차로 박 후보를 바짝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 전 후보가 '전폭 지지' 선언을 하지 않고 간을 보는 동안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문 후보에게 '반전의 계기'는 만들어줬지만 '역전의 희망'까지 담보해 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부산 서면에서 만난 강양수(68)씨는 "(안철수의 등판이) 너무 늦었다.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 같다"면서 "문재인 지지자들은 대선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지 후보를 결정해놓은 상태 아니냐"고 말했다. 반면 황소영씨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어느 한 마디, 어느 한 행동이 한 순간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부산 사람들은 조금 거칠지만 인간적인 정이 많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런 것을 보여준다면, 지지는 하지만 투표하러 가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8일 서울 대학로 유세를 지켜본 박정희(36·직장인)씨도 "안철수의 전폭 지원 선언이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말했다.
"안철수가 사퇴를 했을 때, (바로 문재인을 지지하지 못하고) 조금 고민했다. 차라리 투표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저를 비롯해 안철수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지지한다고 얘기했으니, 한 편으로 완전히 묶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지지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안철수가 그동안 흔들렸던 지지자들의 마음을 잡아준 것 같다."'박근혜 대세론' 무너뜨린 안철수, 문재인에 '희망' 줄까?
과거부터 이어온 '대선의 법칙'이 있다. 당선 가능성이 있으면 결집하고, 없어지면 이탈한다. 그게 대세론이다. 안철수 전 후보가 스스로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게 바로, 자신의 등장으로 '박근혜 대세론'이 깨졌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심지어 '안철수 현상'으로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까지 동반상승했다. '박근혜 대세론' 앞에서 2007년 대선의 악몽을 떠올렸던 야권 지지층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안 전 후보가 대선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대선 판은 다시 대세론에 의해 점령당했다. 안 전 후보의 지지층 중 상당수가 유보적 자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대선 결과에 회의적인 시각이 야권 지지층 사이에 확산됐다.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지난 7~8일 실시한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3.1%포인트)를 보면, 응답자의 52.5%는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게 낫다'고 답했다. '새누리당이 재집권하는 게 낫다'고 답한 응답자는 39.9%에 그쳤다.
그런데 대선 결과 전망은 '박근혜 후보가 이길 것 같다'는 답이 53.3%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이길 것 같다'는 답(30.9%)보다 22.4%포인트나 높았다. 특히 '정권교체를 원한다'는 응답자 가운데도 절반 이상(54%)이 박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권자들은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은 높지만, 박근혜 후보가 이길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안철수의 재등판'이 가져와야 할 가장 큰 효과는 야권 지지층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문 후보가 야권 지지층에 '이대로 가면 진다'는 열패감이 아니라 '잘 하면 이길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맛보게 한다면 바람은 분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안철수 효과'는 지지층을 결집하는 기계적·물리적 효과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지층의 마음을 움직이는 심리적 효과, 보이지 않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학로에서 만난 박선주(36·직장인)씨는 "문재인이 계속 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고, 안철수가 뭔가 해주기길 계속 기다리면서 지치는 중이었다"며 "안철수의 문재인 전폭 지원 선언을 보면서 눈물까지 나더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바람이 중요한 것 같다"며 "이제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그런 바람이 분 뒤에 문재인 쪽에서 뭔가 보여준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는 이현준(35)씨는 지난 9일 안 전 후보와 문 후보의 공동 유세를 보기 위해 경기도 군포시 산본역까지 찾아왔다.
"사실 안철수가 적극 지원하기 전까지는 (대선 승리가) 많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부산 서면 유세가 (부산이) 뒤집어질 정도로 잘 됐고, 어제도 광화문광장에 2만명 정도 왔고, 여기도 많아봐야 500명 생각했는데, 수천 명이 왔다. 이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기대감이 중요하다. 패배감에서 기대감으로 바뀐다는 게 희망이 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충분히 역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지난 10일 전북대 앞 유세를 지켜보던 신남숙(26)씨는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이다. 그는 이번 대선을 자신의 삶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었다.
"안철수를 지지했지만 안철수가 후보직 사퇴했다고 해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정권교체를 위해서 단일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새누리당의) 광화문광장 유세 사진이 조작된 것을 봐도 그렇고... 20·30 투표율이 올라가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젊은층이 정치를 멀리 했지만, 이제는 취업이나 등록금 문제 등 자기 삶의 문제로 피부에 와 닿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투표율도 올라갈 것 같다."지난 11일 서울 신촌 유세장에서 만난 송승아(24·대학생)씨도 "과거 투표율이 낮았던 것은 찍을 후보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며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젊은 층의 큰 지지를 받았던 안철수가 문재인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찍을 사람이 있는 이번 대선에서는 젊은 층의 투표율이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특히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끌려가던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인간 마이크' 무장한 안철수... 20대에 정치 관심 유발
대선 후보도 아닌데, 안 전 후보가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유세차량도 없는데 안 전 후보가 뜨면 사람들이 모였고 얘깃거리가 생겼다. 대표적인 게 '인간 마이크'다. 안 전 후보는 기존 정치권에 대해 불신하는 지지자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유세차와 마이크로 상징되는 기존 선거운동 방식마저 피하고 있다. 유세차에 오르는 대신, 허영 수행팀장의 목말을 탔고, 마이크를 쓰는 대신 자신의 말을 주변 시민들이 따라서 외치도록 유도했다.
안 전 후보의 발언을 반복해서 크게 외치다 보면 어느새 합창을 하고 있는 시민들과 하나가 되고, 분위기도 더 후끈 달아오른다. 198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유행했던 '소리통'이 원조다. 모여든 시민들, 특히 20·30대 젊은층은 안 전 후보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통'이라고 외치기 시작할 때부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다. 은근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로에서 만난 안수일(26)씨도 "제 동생이 정치에 정말 관심이 없었는데도, 안철수 팬이었다"며 "그래서 이번에 투표를 꼭 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안철수는 젊은이들한테 어떤 멘토같은 사람"이라며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했던 젊은층들도 (안철수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안산에 살고 있는 박희진(20·대학생)씨는 올해 첫 투표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는 "안철수 때문에 뉴스도 챙겨보고, 유세장에도 2시간 일찍 가서 기다렸다"며 "인간 마이크 하는 게 너무 재미있기는 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에겐 이번 대선이 재미있는 놀이가 되고 있다. '안철수 효과'의 또 다른 성과는 20대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박씨는 당돌하게 말한다.
"안철수가 사퇴했다고 투표 안 해? 그건 멍청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