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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정상적인 벼, 오른쪽이 백수피해를 입은 벼다. 백수피해를 입은 벼는 처음에는 색깔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검정색으로 다시 변색된다.
 왼쪽이 정상적인 벼, 오른쪽이 백수피해를 입은 벼다. 백수피해를 입은 벼는 처음에는 색깔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검정색으로 다시 변색된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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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안 지어 봤겠지만 두 벼가 뭔가 다르다는 건 알겠지? 이래서는 수확이 안 되는 거거든.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이런 걸 사가."

추석을 열흘 앞둔 19일 전북 김제시 부량면의 한 논두렁. 검게 변색된 벼 이삭은 농부의 손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힘없이 벼 낟알을 토해냈다. 떨어지지 않고 이삭 줄기에 붙어있는 것들은 낟알이 채 맺히지도 않아 쭉정이가 된 부분이었다. 

볼라벤, 덴빈, 산바. 8월 말부터 전국을 휩쓴 세 차례의 태풍에 백수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라 농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백수 피해란 심한 바람으로 수분이 말라 벼가 익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전북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김제시 일대에서만 전체 재배면적(2만1964ha) 중 35%가 넘는 7800ha에서 백수현상이 발생했다.

김제평야, 백수 피해로 벼 수확량 30% 이상 줄어들 듯

전북 김제는 산지 비율이 60%를 넘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데다 사질 양토가 많아 삼국시대부터 농업용 저수지인 벽골제가 있었을 정도로 벼농사에 맞춤인 곳이다.

그러나 올해 추석을 맞는 이 지역 농민들의 표정은 밝지가 못했다. 8월 말부터 2주 사이 세 차례 불어닥친 태풍으로 벼농사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곳 농민들은 벼 이삭에 백수현상이 일어나 전체 수확량의 30~40%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조경희 김제농민회 사무총장은 "김제는 자연 조건이 좋아 2모작을 하는데 그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봤다"고 설명했다.

"보리랑 벼랑 2모작을 하면 대략 6월 10일경에 논에 모를 심게 되요. 그럼 8월 말쯤부터 벼 이삭이 패기 시작하고. 근데 태풍이 하필 딱 그때 온 겁니다. 10일 늦게 심은 벼만해도 별 피해 없는데 바람 제대로 맞은 거지 뭐."

벼는 수확기가 가까워오면 이삭이 올라온다. 그 안에 수분이 차고  낟알이 맺혀서 커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바람이 세게 불면 수분이 말라버려서 낟알이 맺히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벼 색깔이 하얗게 변한다고 해서 백수라 부른다고 한다.

말을 이어가며 주변 논을 살펴보던 조씨는 한 쪽 논두렁으로 기자를 데리고 갔다. 연이은 태풍의 영향으로 논에 쓰러진 벼들이 많았지만 조씨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백수피해를 입은 벼는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진하고 거무틔틔하게 변한다"면서 색깔이 다른 두 논을 가리켰다. 10일 차이를 두고 심어진 벼는 키는 비슷한데 전혀 다른 색깔이었다. 

전북 김제시 부량면의 논. 왼쪽은 백수피해를 적게 입은 논, 오른쪽은 많이 입은 논이다. 왼쪽 논의 벼가 10일 가량 늦게 심었음에도 수확기 벼 색깔이 나는 반면 오른쪽 논은 정상적인 논과 확연히 다른 색깔이다.
 전북 김제시 부량면의 논. 왼쪽은 백수피해를 적게 입은 논, 오른쪽은 많이 입은 논이다. 왼쪽 논의 벼가 10일 가량 늦게 심었음에도 수확기 벼 색깔이 나는 반면 오른쪽 논은 정상적인 논과 확연히 다른 색깔이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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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한 방에 1년 헛농사... "추석 어떻게 나야 할지 막막하다"

이번 태풍으로 농민들이 얼마나 피해를 본 것일까? 약 7만6000㎡(2만3030평)이 넘는 면적에서 벼 농사를 짓고 있는 조씨와 직접 피해 예상액을 계산해보기로 했다.

보통 논은 가로 40m, 세로 100m 정도로 네모낳게 구획이 나뉘어져 있는데 이것을 '1필지'라고 한다. 조씨는 김제시 봉남면에서 총 21필지 규모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중 벼농사를 하는 19필지는 남의 땅을 빌려서 짓는 농사다.

"보통 1필지에서 쌀이 25가마가 나와요. 변동 직불금 감안해서 계산하면 가마당 농민이 받는 돈은 약 17만 원이고요. 논 하나당 425만 원의 이익이 생기는 셈이지요."

농부가 가을에 25가마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비용들이 있다. 25가마를 수확하면 우선 그 중 12가마를 논 주인이 소작료로 가져간다. 여기에 농약·비료 값으로 2가마, 기계 삯으로 5가마가 더 들어간다. 결국 남는 것은 6가마 정도. 금액으로 계산하면 논 하나당 102만 원 정도가 남는다.

19필지를 운영하는 조씨는 평년이라면 475가마를 수확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김제시에 따르면 조씨는 올해 태풍으로 12필지에서 70%의 피해를, 5필지에서 30%의 피해를 봤다고 신고했다.

기계적으로 계산했을 때 그의 올해의 예상 수확량은 222.5가마. 평년에 비해 절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올해 줘야 하는 소작료 204가마를 주고, 1년간 들어간 농약·비료값을 빼면 이미 적자다. 수확량은 절반가량 줄었지만 손에 쥐는 돈은 전혀 없는 것이다. 1년 헛농사 한 셈이다. 

조경희 김제농민회 사무총장이 백수피해를 입은 벼를 손바닥에 가볍게 치자 낟알이 바로 떨어진다. 백수피해를 입은 벼는 힘이 약해 바람이 불거나 충격을 받으면 쉽게 바닥에 떨어진다고 한다.
 조경희 김제농민회 사무총장이 백수피해를 입은 벼를 손바닥에 가볍게 치자 낟알이 바로 떨어진다. 백수피해를 입은 벼는 힘이 약해 바람이 불거나 충격을 받으면 쉽게 바닥에 떨어진다고 한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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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내가 입은 피해가 평균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2모작을 많이 하는 집일수록 피해가 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게다가 그나마 조씨는 이앙기, 컴바인,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을 가지고 있어 기계 삯이 들지 않는다. 기계가 없는 소작농들에 비해서는 사정이 조금 더 나은 편인 것이다.

이런 조씨에게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재해보상금은 약 480만 원. 50% 이상 피해를 본 논 12필지에 주어지는 금액이다. 피해가 50%를 넘지 않는 5개 필지에 대해서는 농약 대금 4만 원 보상이 고작이다. 피해를 입은 저질 쌀에 대해서는 국가가 등외 등급으로 저가 수매에 나설 예정이지만 백수 피해를 입은 이삭은 낟알을 붙잡고 있는 힘이 약해 그마저도 얼마가 수확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조씨는 "당장 추석을 어떻게 나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그래도 태풍 지난 이후로 계속 해가 떠서 피해 직후보다는 많이 괜찮아진 상황"이라며 "기계를 돌려봐야 알겠지만 계산했던 것보다 쌀 수확량이 조금이라도 많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태풍 없어도 연말되면 돈 빌리는 게 농민들 일"

올해 조씨의 추수는 10월 15일께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한 해 땀흘려 키운 농작물을 거둬들이고 나면 논밭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바로 '빚'과의 전쟁이다.

"내가 평년에 벼농사 짓고 보리랑 다른 거 농사 지어서 4000만 원 정도 번다고 하면 사람들이 농사할 만하다고 말해요. 근데 지금 내가 은행에 이자만 1년에 1200만 원을 내요. 따지고 보면 별로 안 남아. 내가 농사 19년 지어서 지금 빚이 2억1000만 원 있어."

웬 빚이냐고 묻자 조씨는 조용히 검정색 수첩을 꺼내 펼쳤다. 펼쳐진 쪽에는 원금과 이자율, 채무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앙기 구매자금 대출, 장기전환 대출, 영농자금 대출, 주택 담보대출 등 종류도 다양했다.

19년차 농민 조경희씨의 채무 현황. 왼쪽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빌린 돈, 오른쪽은 금융기관 채무다. 우측 하단을 보면 금융기관으로 매년 나가는 이자만 1244만 원이다.
 19년차 농민 조경희씨의 채무 현황. 왼쪽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빌린 돈, 오른쪽은 금융기관 채무다. 우측 하단을 보면 금융기관으로 매년 나가는 이자만 1244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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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1000만 원 중 1억3000만 원이 금융기관에서 빌린 금액이었다. 조씨는 "태풍 없어도 연말 되면 으레 돈 빌리는 게 농민들 일"이라면서 "올해는 농사가 안 되서 빚을 더 크게 져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택 담보대출도 한도까지 하고 보험 약관대출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상태"라면서 "돈 나올 구멍이 없다"고 말했다.

새해는 두 달도 더 남았지만 조씨의 새해 소망은 농민에게 주어지는 쌀 가격이 지금보다 더 오르는 것이다. 그는 몇 년째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산다. 1998년 16만 원이었던 쌀 한가마니 가격이 14년이 지난 지금 17만 원으로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 김제시 교통비는 다섯 배, 농약 값은 두 배 이상 뛰었다. 물가 인상률에 못 미치는 쌀 가격. 농가 빚이 늘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다.

"추석이니까 그런 거 생각 좀 해보면 좋겠어. 4인 가족이 20만 원짜리 쌀 4가마니면 1년을 먹거든. 4인 가족 입에 풀칠하는 데 80만 원이면 되는 거야. 이렇게 싼 게 어딨어. 이거 몇 만원만 올리자고 하면 무리일까?"


태그:#김제, #백수피해, #쌀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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