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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이나 주류산업협회 사람들, 자기 아는 사람 중에 알콜 중독인 사람 있으면 정말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가 없었다면 저도 없었습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시 수송동 국세청 건물 앞.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아래 센터) 정상화를 위한 기도회'에서 발언 기회를 얻은 백덕수씨는 말을 이어갈수록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몸도 화를 이기지 못해 앞뒤로 눈에 띄게 흔들렸다.

백씨는 음주 피해자와 가족들의 치료 및 재활을 위해 설립된, 국내 유일의 알콜 중독 전문 치료기관인 한국음주문화센터(아래 센터)의 초기 환자 중 하나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그에게 새 삶을 열어준 센터가 올 11월이면 문을 닫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씨가 하필 국세청에 분통을 터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 이은 알콜중독, 이곳에서 끊었죠"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의 센터 1층에서 백씨를 만났다. 그는 오랫만에 갠 바깥 날씨만큼이나 환하게 웃으며 얼마 전 지난 자기 생일 얘기부터 꺼냈다. 7월 3일. 7년 전 알콜 중독이던 그가 센터로 찾아와 금주를 시작한 날이다. 백씨는 그때부터 실제 생일 대신 이날 미역국을 먹는다고 했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서 알콜중독을 치료하고 7년째 금주중인 사회복지사 백덕수씨.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서 알콜중독을 치료하고 7년째 금주중인 사회복지사 백덕수씨.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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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고 1때부터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술을 마셨다. 술은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도 알콜 중독이었고, 어머니는 알콜 중독에 도박 중독까지 있었다. 큰 형은 알콜중독에 간암으로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그가 유년기를 겪으며 4남 4녀이던 가족은 1남 2녀로 줄었다. 술이 아니어도 사람이 죽는 이유는 많았다.

큰 누나는 사고로 차에 치여서, 작은 형은 불에 타서 없는 사람이 됐다. 백씨는 "아픔 속에서 살다보니 스트레스만 받으면 술을 마셨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어느 순간 그는 알콜중독자가 됐다.

술에 대한 욕구를 참지 못하게 되자 직장 생활도 가정 생활도 평탄치 못했다. 해고와 구직을 반복하며 20여 차례 병원에도 가봤지만 소용없었다. 치료를 잘 받다가도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구치소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사이 군에 간 아들도 문제성 음주로 조기 전역했다. 알콜중독이 3대로 이어질 판국이었다. 백씨는 무서워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일산 백석동에 위치한 센터였다.

"알콜중독은 무서운 병이에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뒤로도 지속적인 관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센터의 장점은 중독자가 중독 치료부터 생활재활, 직업재활을 거쳐 사회에 복귀할 때까지 전 단계를 관리해준다는 점이지요."

백씨는 2005년 7월부터 2개월간 센터에서 입원치료를, 6개월간 통원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2년간 직업재활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사회복지사, 중독전문가, 음악치료사, 노인상담지도 자격증을 땄다. 그 뒤로 2년 7개월간 알콜중독 치료 시설에서 근무하다가 현재는 자신이 치료를 받았던 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1년째 일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기적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일 주일 이상 술을 끊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던 아들도 바뀐 아버지를 보고 덩달아 술을 끊었다. 백씨는 "알콜중독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제 대에서 그걸(알콜중독) 끊어내서 정말 다행"이라며 웃었다.

일반 병원에 비해 센터의 치료가 월등히 효과가 크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백씨처럼 센터를 찾는 환자 수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외래 환자 수는 하루 평균 18.1명, 입원 환자는 71.1명으로 2010년에 비해 각각 29%, 5.3% 증가했다.

현재 센터 병동은 밀려든 중독자들로 빈자리가 없다. 백씨는 "병원에 못 들어간 중독자들은 자기들이 센터 근처에 방을 얻거나 인근 고시원에서 생활한다"고 설명했다. 음주 충동이 일었을 때 빨리 센터로 오기 위해서다. 그는 "일산 백석동은 땅값이 비싸서 고시원도 타 지역에 비해 5만 원 정도 비싼 편인데 그래도 환자들이 그렇게들 많이 한다"고 말했다.

백씨는 "중독자들은 센터를 마음의 안식처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알콜중독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수시로 술을 먹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데 그럴 때마다 센터에서 받았던 치료를 떠올리면서 참아간다는 얘기다.

그러나 센터의 이런 역할도 올 11월부터는 어려워질 예정이다. 지금 보유하고 있는 운영비가 10월 이후에는 직원들 월급 지급이 불가능해지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백씨는 이 얘기에 대해 묻자 눈에 띄게 굳은 표정으로 자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그걸 자세히 얘기하다보면 화가 날 것이고 그러면 술을 먹고 싶어질 것이라는 이유다.

자신에게 있어 분통이 터지는 얘기라는 뜻이다. 그는 "술을 한잔이라도 먹으면 7년 전으로 돌아가는 건 초읽기"라며 자세한 사정은 다른 직원에게 묻기를 부탁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센터 운영이 어려워진 것일까.

경기도 일산시 백석동에 위치한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KARF).
 경기도 일산시 백석동에 위치한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KARF).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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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보호 외치던 주류업계들, "병원에는 더이상 지원 못해"

국내 유일의 알콜중독 치료기관인 센터가 생긴 것은 지난 2000년. 음주가 사회·경제적으로 미치는 폐해가 극심해지자 국회는 국민건강증진기금을 술에도 부과하는 입법안을 내놨다. 이에 주류업체들은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음주피해 대책으로 현재의 센터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자발적으로 발표했다.

그 결과 한국주류산업협회가 매년 50억 원을 분기별로 출연하는 조건으로 지금의 센터가 만들어졌다. 최초 기금 규모는 100억 원이었다. IMF외환위기를 이유로 50억 원이 줄어든 것이다. 50억 원의 재원은 해마다 협회 소속 주류업체들이 매출에 따라 정률제로 마련한다.

센터는 공익 재단으로 설립된 만큼 그간 비영리 원칙에 따라 병원을 운영해왔다. 현재 센터의 한 달 입원 치료비는 70만 원에서 80만 원 사이. 실비에도 못 미치는 치료비로 진료를 하는 이유는 병원 문턱을 낮춰 더 많은 알콜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병원 1층에 커피전문점을 마련하고 그곳을 중독자들의 재활 치료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일들은 주류산업협회에서 나오는 매년 일정한 금액의 출연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던 센터의 재정상태가 직원들 월급도 못 줄 정도로 나빠진 이유는 지난 2011년부터 주류산업협회가 출연금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지급되지 않은 출연금의 규모는 약 100억 원. 주류산업협회와 주류업계 측에서는 출연금 지급 중단의 이유로 센터의 알콜중독자 치료 활동을 꼽았다.

공익재단을 만들면서 주류업계에서 의도했던 것은 예방, 홍보 활동의 확대였는데 현재 센터의 활동은 치료에 너무 치중돼있다는 얘기다. 진로 홍보실의 최용훈 과장은 "돈을 내는 주류 회원사들은 센터 측에 원래 취지대로 돈을 써달라고 몇 년째 요구해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방 주류사들을 시작으로 2006년부터 출연금을 안 내는 회사가 늘어났고 진로가 마지막까지 부담을 하다가 출연을 잠시 중단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한 "사내 적립은 다 되어있는 상태라 센터 쪽에서 원래 취지대로 운영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주류산업협회가 올 4월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 보낸 공문. 병원사업을 중단해야 출연금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한국주류산업협회가 올 4월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 보낸 공문. 병원사업을 중단해야 출연금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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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류산업협회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협회에서는 아예 지난 4월 병원사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출연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문구를 명확히 명시한 공문을 발송했다. 현재 협회에서 보유하고 있으면서 센터에 넘겨주지 않고 있는 출연금은 40여억 원이다.
그러나 당초 주류사들이 스스로 '소비자 보호'라는 측면에서 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던 것에 비춰볼 때 이러한 해명은 납득이 쉽지 않다. 결국 알콜중독자 치료를 집중적으로 잘하고 있기 때문에 술을 판매하는 입장에서 돈을 못 주겠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97년 공익재단 설립 의지를 밝히며 전국주류제조업체 경영자들이 날인했던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입법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문서에 보면 알콜 중독자 치료는 재단이 해야 할 주요 추진 계획 중 하나로 명시되어 있다.

1997년 주류협회에서 낸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입법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중 주류소비자보호사업 주요 추진계획. 오른편에 알콜중독 치료항목이 있다.
 1997년 주류협회에서 낸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입법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중 주류소비자보호사업 주요 추진계획. 오른편에 알콜중독 치료항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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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노조는 이러한 병원 해체 움직임에 대해서 꾸준히 대립각을 세워 왔다. 센터에서 진행하는 사업은 치료, 재활, 예방, 연구의 네 가지인데 이 중 병원과 재활본부가 없다면 사실상 예방 및 연구 사업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워 재단은 해체 수순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양순승 센터 본부장은 "지난해부터 센터 직원들이 자기 휴가를 내고 교대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국내 유일의 알콜중독 치료기관인 이 병원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병원 하나 못 살리는 사회라면 문제 있는 사회"

노조 측에서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국세청 측에 의심의 눈초리를 돌리고 있다. 센터가 만들어진 이후로 센터 이사장과 사무총장이 모두 국세청 퇴직관료로 채워졌는데 이들이 한결같이 센터 운영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병원 매각 시도는 센터 건립 초기부터 시작됐다. 초대 이사장이었던 성희웅 전 이사장은 취임 6개월만에 손해가 크다는 이유로 센터 매각을 추진했다. 2005년에는 이사장이 출연금 구조의 불안정을 이유로 재단건물 매각과 병원사업 포기 등을 감독기관인 보건복지부에 건의했다가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지난 2008년 취임했던 국세청 법인납세국장 출신 김남문 이사장은 임기 중에 내부 동의를 구하지 않고 센터 인근 일산병원에 병원 건물을 매각하려다 노조에 들통나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건물 매각 움직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왜 이사장들은 계속 병원 사업을 포기하고 재단 건물을 팔려고 하는 것일까? 정철 공공노조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분회장은 "센터를 없애고 센터가 받는 출연금을 대신 가져가는 단체를 만들려는 게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정철 공공노조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분회장.
 정철 공공노조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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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류산업협회의 출연금은 어차피 계속 나오는 것이니 센터가 없어지고 그 돈을 사용해줄 연구 단체 하나만 만들면 출연금 전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노조측의 주장이다. 이들이 이렇게 확신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국세청 주도로 그런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 분회장은 "2007년 6월 국세청 주도하에 '주류연구원'이라는 단체가 생기더니 주류협회에서 바로 와야 할 출연금이 주류연구원을 들렀다 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주류연구원은 2011년 6월 폐원됐고 주류연구원이 보관하고 있던 출연금 30억 원은 센터로 오지 않고 주류협회로 되돌아갔다.

"주류협회에서 2006년에도 출연금을 안 준적이 있었는데 국세청에서 법적 효력도 없는 행정지도 공문 한 장 발행하니까 출연금이 제까닥 나왔다"는 게 정 분회장의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연금 지급을 거부하는 주류협회와 국세청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얘기다. 국세청은 주정업체 면허권과 생산량 결정 등 주류산업에 대해 폭넓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정 분회장은 "처음에는 국세청 출신 이사장들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랐다"며 "요즘에는 센터 해체해서 그 돈으로 국세청 출신 퇴직관료들 더 많이 낙하산으로 보낼 수 있는 단체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노골적"이라고 지적했다. 센터 노조 측에서 1인 시위나 집회를 국세청 건물 앞에서 여는 이유다. 그는 "이제 센터 이사회에서 국세청 '낙하산'들을 좀 걷어내고 사회적인 명망이 있는 관련업계 분들로 모셨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이사회 구조는 사실상 국세청이나 주류업계 이사를 막아내기 어려운 구조다. 센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업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이사회는 총 15명으로 구성된다. 이중 한국주류산업협회장과 주류협회 상무, 센터 사무총장, 국세청 법인납세국장은 당연직 이사로, 협회장은 국세청 국장 출신이, 협회 상무나 센터 사무총장은 국세청 세무서장급 관료들이 퇴임 후 가는 '단골 코스'다.

정 분회장은 "이 네 명에 주류업계에서 위촉된 이사 세 명이 합쳐지면 과반에 가까운 7명이 한 뜻으로 움직이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차기 이사 선임도 이사회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계속 국세청 퇴직관료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2005년 병원이 만들어진 후부터 줄기차게 '낙하산' 이사장들과 맞서 온 센터 노조지만 이제는 힘이 부친다. 센터 노조는 센터 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지난 5월부터 단체협약도 해지된 상태다. 그래서 정 분회장 혼자 노동부에 쟁의신청을 하고 1인 지명파업 중이다.

정 분회장은 "알콜중독은 평생을 가는 병"이라며 "이런 병원 하나 못 살리는 사회라면 문제 있는 사회라는 생각에 혼자 파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그:#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국세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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