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달 전, 경북 청도라는 곳을 여행 하고 있었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려 꽤 추웠다. 배가 고파서 음식점 문 앞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졌다. 날 조개 몇 개를 주워서 허겁지겁 먹었다. 저녁이 되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숨도 가빴다. 허리를 새우처럼 굽히고 가슴을 움켜진 채 걷다가 도로가에 있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배가 아프고 숨이 가빠서 견딜 수 없어요. 약 좀 주세요"
"보호자 연락처 있으십니꺼?"
"없어요. 전 가족이 아무도 없어요. 그냥 약 좀 주세요"
"진료비는 있으십니꺼?"
"없어요. 제발 그냥 좀 주세요.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쌀쌀맞게 생긴 그 병원 간호사는 끝내 내게 약을 주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가족 연락처도 말하지 않는 노숙자를 받아 줄 병원은 우리나라에 단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였기에.

형과 누나 동생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지만 말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10년 넘게 계속되는 내 방랑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2년 전, 죽기 전에는 다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 했었다.   

내가 사람들 눈에 띈 것은 다음날 아침이다.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청소부들이 발견 하고는 119에 신고 했다고 한다. 그 전날 저녁, 병원에서 쫓겨나듯 나온 뒤 주머니를 탈탈 털어 소주를 한 병 샀다. 아픔과 추위를 잊으려고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정신이 아득해 지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잠시 정신이 들었다. 낮에 왔었던 그 병원이었다. 그 간호사가 다시 가족들 연락처를 물었다. 어쩐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누나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가족들 얼굴이라도 보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악몽을 꾸었다. 큰 솥에 삼베옷을 삶고 있었는데 너무 덥고 숨이 막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일어나라고 소리쳐서 죽을힘을 다해서 일어났다. 눈을 뜨자 형, 누나, 조카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상범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눈물 이었다. 뜨끈한 물줄기가 볼을 타고 목으로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응급실에 들어올 때 이미 반송장 이었다고 한다. 패혈증 이었다. 날 조개를 주워 먹은 게 화근이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이 패혈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적으로 깨어나기는 했지만 의사 말대로 난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한 발짝도 옮기기 힘겨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의사는 뱃속에 있는 장기가 손상돼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머릿속에는 악성 종양도 자라고 있다고 했다.

벌써 세 달째 병원에 누워 있다. 가족들도 힘들어 하는 눈치다. 이젠 발길도 뜸하다. 일주일전 조카가 왔다간 이후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외롭다. 그동안 혼자 여행 하면서 느낀 외로움은 엄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느낀다.  이젠 제대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꿈속에서 보는 세상이 더 밝다. 가끔 인호 얼굴이 꿈에 보인다. 너무나 생생하다. 군복을 입고 있을 때도 있고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있을 때도 있다.

어쩐 일인지 고윤희는 만날 수가 없다. 단 한번만 이라도 만났으면 좋으련만. 꿈에 보이지 않으니 얼굴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열 살 때쯤이다. 소담스런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밤 이었다. 하얀 눈에 들떠 마실(강원도. 충청도에서 쓰는 방언, '마을에 놀러가다') 을 가려는 나를 붙잡아 앉혀 놓고 아버지는 '하얀여우' 이야기를 들려줬다. 

 "눈이 많이 오는 날 밤엔 마실을 가는 게 아니란다. 너 영환이 할아버지 알지? 내게는 아저씨 벌인데 젊었을 때 여우에게 홀려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단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 밤 이었지. 영환이 아저씨가 술을 잔뜩 마시고 뻐꾹산을 넘어 '송장골' 로 마실을 가는 중 이었어.

 사방이 온통 하얘서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어림짐작으로 방향을 잡아서 계속 걸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걸어도 계속 그 자리였어. 그 때, 먼발치 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기쁜 마음에 그곳을 향해 계속 걸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그게 사람이 사는 집에서 흘러나온 불빛인줄 알았던 게지.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그 빛을 잡을 수가 없었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 어느새 그 불빛은 저 만치 물러가 있고 힘을 내서 좀 더 걸어가면 또 어느새 도망치듯 저 만치 가 있었던 게지. 그러다가 그만 아저씨는 큰 구덩이 속에 빠지고 말았단다. 너도 알지 그 산에 노루 같은 거 잡으려고 구덩이 많이 파 놓은 거.

 아주 깊은 구덩이라 아저씨는 나올 수가 없었어. 그 때 그렇게도 잡으려고 애쓰던 불빛이 구덩이 밖에서 아저씨를 노려보고 있었단다. 알고 보니 그것은 불빛이 아니라 여우 눈빛이었어. 그때서야 아저씨는 자기가 여우에게 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

 눈이 오는 날 밤에 그 산에 여우가 나타나 사람을 홀린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거든. 그 여우 털색깔이 온통 하얀색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우인줄 모르고 계속 따라갔던 것이지. 그 상황에서 만약 정신을 잃었으면 여우에게 잡아 먹혔을 텐데 다행히 그 아저씨는 힘이 장사고 담대한 사람이라서 날이 밝을 때 까지 정신을 잃지 않았어. 그래서 간신히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던 게지. 

 그 아저씨 말고도 그 하얀여우 에게 홀린 사람이 옛날에는 아주 많았단다. 하얀여우는 눈이 오는 날 사람을 홀려서 낭떠러지에 떨어뜨린 다음 잡아먹기도 하고, 산 속을 헤매게 해서 지쳐 쓰러지게 한 다음 잡아먹기도 한단다. 겁이 많은 사람이 걸리면 무서운 소리를 내서 기절시킨 다음 잡아먹기도 하지. 그러니까 눈이 오는 날엔 절대 그 산에 가면 안된단다. 너처럼 어린 아이는 아마 겁을 줘서 잡아먹겠지."

이 얘기를 듣고 난 겁이 나서 그날 마실을 가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하얀여우가 쫓아 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 날 이후로도 난 한동안 눈 오는 날 밤에 외출을 하지 못했다.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 하얀여우란 동물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은 몇 해가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를 보고 낄낄 댈 만큼 머리가 컷을 때쯤이다.

요즘 난 가끔 그 하얀여우를 본다. 눈처럼 하얀 여우가 빨간 눈을 번뜩이며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눈에 띈다. 하얀 여우는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이었다.

난 오랜 시간 하얀여우 에게 홀려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다만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영환이 할아버지처럼 함정에 빠진 후에야 내가 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구덩이는 너무 깊었고, 난 많이 지쳐 있었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태그:#하얀여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