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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부대에 도착했다. 전부대원 50명이 한 내무반에서 지지고 볶아야 하는 말로만 듣던 깡통 막사였다. 이곳에서 2년 하고도 6개월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 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어디를 가든지 처음이 힘들다. 학교든 직장이든. 군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휴전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최전방이라 긴장감이 더했다. 대북, 대남 방송이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렸다.

몸이 뻣뻣하다는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엔 아직 이른 초가을인데도 무척이나 추웠다. 두려움이 한기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올챙이 포복 실시, 야 신병 이래가지고 총알 피하겠어?"

말로만 듣던 신고식 이었다. 워낙 긴장을 한 탓인지 힘든 줄도, 창피 한 줄도 몰랐다. 50명이 지켜보는 내무반 한 가운데서 박박 기고 마지막엔 노래도 불렀다.

두려움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이등병 때는 저능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리바리하다. 낮선 환경에 대한, 그리고 군대라는 폭압적인 분위기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 똑똑하지도 않았던 난 그야말로 진짜 바보가 되어 신고식을 마쳤다. 바보가 되지 못했다면 결코 노래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신고식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지만 분명 가혹 행위였다. 제 정신 가지고는 실컷 가혹행위를 당하고 난 뒤,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고식이 끝나자 누군가 나를 살짝 불러냈다. 컴컴한 막사 뒤로 데리고 갔다. 두들겨 맞는 줄 알고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채 따라갔다. 아니었다. 담배를 한 대 주면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길상범 이병님, 고생하셨어요. 이제 끝났습니다. 저도 한 달 전에 똑같이 했습니다."
"아닙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아랩니다."
"아~그러십니까?"
"저 6월 군번입니다."
"어~그래, 반가워."

이렇게 만났다. 고향은 서울이었고 이름은 서인호,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후반기 교육을 일찍 끝내서 나보다 한 달이나 빨리 부대에 왔지만 분명 후임병이었다. 후반기 교육은 신병 훈련을 받은 이후에 받는 일종의 실무 교육이다. 난 그 후반기 교육을 자그마치 석 달이나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 이후로 인호와 난 친 형제처럼 지냈다. 호칭도 서 이병, 길 일병이 아닌 그냥 형, 동생 이었다. 한 따가리(군대용어, 상사가 가하는 얼차려의 통칭) 할 때도 인호와 함께 있어서 견딜 수 있었고 고통스러운 훈련도 인호가 있어서 힘든 줄 몰랐다.

1박2일, 꿀맛 같은 첫 외박도 함께 나갔다. 처음 쐬는 바깥바람에 취해서 우린 외박 구역을 이탈해 서울까지 갔다. 외박은 부대가 속해 있는 행정 구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 만약 헌병들 불심 검문에 걸리면 그대로 영창 행이다.

일탈은 달다. 아슬아슬함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친구와 함께 하는 일탈은 더 달다.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더 대범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때 그랬다.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은색 철모를 눌러 쓴 헌병들을 피하기는커녕 일부러 주변을 얼쩡거리며 시위하듯 침을 찍찍 뱉고 담배를 뻑뻑 펴 댔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제대할 때가 됐다. "네가 제대하는 날 신촌 역까지 마중 나갈게" 하는 말을 남기고 난 부대를 떠났다. 인호는 서운함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내가 없는 부대에서 인호가 혼자 어떻게 견딜까 불안해하며 버스에 올랐다.

인호가 제대할 때, 같은 부대에 있던 친한 고참(선임) 몇 명을 불러서 함께 신촌역으로 마중 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주머니도 두둑했다. 인호가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을 원 없이 사주겠다고 작심하고 나갔다. 

그날 우린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혈기를 이기지 못해 어깨동무하고 거리를 쏘다니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다가 지쳐 여관방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태그:#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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