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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빨리 찾아 뵐 걸. 생전에 손 한번 잡아드렸더라면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소선 어머니가 계신 장례식장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후회만이 밀려온다.

 

나는 열사 전태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전태일평전>도 읽어 보지 않았고 그냥 주워들은 몇 가지 이야기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만 그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분신한 그날 바로 죽은 줄로 알았다.

 

3년 전, 이소선 어머니의 팔순에 맞춰 나온 어머니의 구술 회고록,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고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태일은 분신 후 의식이 있는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 어머니가 병원에 왔을 때,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이뤄줄 것을 다짐받는다.

 

"내가 죽으면, 헛되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엄마가 제발 내 말 들어주세요. 엄마, 엄마,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줘."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가운데 

 

어머니는 전태일과의 약속을 지켰다. 아들이 살아서 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했다. 전태일이 죽은 후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다른 삶은 없다. 오로지 태일과 한 약속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그런 삶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엄마, 이제 노동조합 그만하면 안 돼?"

 

어머니가 구속된 뒤 고등학생인 순덕(막내딸)이 혼자 집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둘째아들(전태삼)과 큰딸(전순옥)도 노동조합에서 살다시피 했다. 청계 노동자들도 자주 오지 않았다. 순덕은 시끌벅적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밤이 되면 어린 순덕의 슬픔은 두려움이 되었다. 한참을 울던 순덕이 친구 연임의 집에 갔다. 그러나 연임의 아버지는 딸을 찾아온 순덕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기엔 너무 무서운 시절이었다.

 

순덕은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자 학교도 가지 않고 어머니가 있는 수원교도소로 갔다. 아침 일찍 가족이 면회 왔다는 소릴 듣고 어머니는 큰 사고가 났는가 덜컥 걱정부터 했다. 노동교실이 폐쇄당했을 때 청계 노동자들이 창문 아래로 몸을 던지고, 깨진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또 손목을 그었다. 그런 사고가 또 났는가 해서 어머니는 겁이 났다.

 

어머니가 면회실에 들어 와 보니 학교에 가 있어야 할 막내 순덕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애가 타는데 순덕은 아무 말 않고 울기만 했다. 어머니의 채근에 순덕이 겨우 한마디 내 뱉었다.

 

"엄마, 이제 노동조합 그만하면 안 돼?"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가운데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간 돌보지 못한 막내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을 것이다. 전태일의 유서를 품고 사는 건 어머니만의 일은 아니었다. 둘째아들인 태삼도 큰딸인 순옥도 유서를 품고 살았다. 미치치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들을 감행하면서 청계피복노조를 지켰다. 그 사이 어린 딸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순덕이 다녀간 후 어머니는 지독한 가슴앓이를 했다.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로 사느라 다른 자식들이 어찌 사는지 돌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어쩌면 그건 사치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인간 이소선'이 포기해야 했던 삶은 무엇일까

 

1981년 어머니와 둘째아들 태삼이 같이 징역을 살 때 며느리가 매주 면회를 왔다. 며느리는 세 살된 첫딸 손을 잡고 돌도 안 된 쌍둥이 아이를 한 놈은 안고 한 놈은 업고 다녔다. 아이 한 명 데리고 다니려면 기저귀가 한 보따리인데, 쌍둥이 보따리에 어머니과 남편 속옷 보따리까지….

 

나는 며느리 윤매실씨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면회를 다녔을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쌍둥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누가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윤매실씨는 어떻게 그 시절을 견디었을까? 그 고통이 얼마나 되었을지 나는 감히 감히 상상이 안 된다.

 

어릴 때 3년간 아빠도 없이 자란 세 손주를 생각하면 이소선 어머니는 마음이 아프다. 징역 살고 온 아들을 손주들이 낯설어 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는 아이 셋을 생각해서라도 취직해서 돈을 벌라"고 했다. 그래서 집회나 농성장에서 아들을 만나면 왜 왔냐고 나무라기도 했다.

 

"난 자식들이 뭐하고 사는지도 몰라. 관심도 없어."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가운데

 

딸이 집을 샀다며 밥 한번 먹으러 오라고 했지만 여든이 다 되도록 어머니는 딸에 집에 가보지 못했다. 큰딸이 영국에 유학을 갈 때는 유학 간다는 사실을 가기 전 날에 알았다. 어머니는 딸이 무슨 돈으로 유학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산 어머니에 대해 자식들은 불만이 없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 든 어머니 편안하게 모시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남들처럼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을 꾹꾹 묻어두고 포기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어머니 역시 노동자의 어머니로 사느라 죽은 자식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산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삶에 미안한 마음이 왜 안 들었겠나? 


전태일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삶을 이소선은 굴레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태삼이, 순옥이, 순덕이 거기에 사위에 손자, 손녀로 생각이 이어질 때, 이소선의 마음은 한없이 흔들린다.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가운데

 

모두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은 신문 기사들이, 어머니가 아들의 유서를 품고 아들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런 삶을 살며 포기했던 평범한 삶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어머니가 포기했던 것이 무엇인지 한 번만이라도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남다르게 정의롭고 다정하고 지혜로운 분이다. 그래서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오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도 자식들 품에 보듬고 손주들 재롱 보며 살고 싶은 우리네와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이 책을 쓴 오도엽씨에게 고마운 사람들에 관해서 빼먹지 말고 글을 쓰라고 일렀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어머니과 전태일의 가족들에게 진 빚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경찰을 따돌리는 어머니의 담대함과 기지에 놀라고 통쾌해했다. 또한 가정사나 청계피복노조의 처절할 투쟁을 읽을 때는 내내 울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삶을 알아갈수록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 또 한 사람, 어머님과 2년을 살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삶을 담아낸 오도엽씨가 고마워졌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글로 써 내면서 이 사람은 또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내가 오도엽씨라면 나는 정말 이야기를 듣다말고 어디로 도망가버렸을 것이다. 오도엽씨의 고통 속에서 이 책은 태어났다.

 

어머니과 가족들, 청계피복노조 노동자, 오도엽씨 모두 고맙고 미안하다.


"어머니, 이제는 편히 쉬세요.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씀, 후마니타스 펴냄, 2008년 12월, 332쪽, 1만2000원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후마니타스(2008)


태그:#이소선, #오도엽,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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