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옅은 잿빛이었다. 아침에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니 오후 3시부터 비가 온단다. 잿빛 하늘은 비의 전주곡쯤 되겠구나, 짐작했다. 한 여름에는 햇볕이 쨍쨍 나는 날보다 이렇게 흐린 날, 걷기가 훨씬 좋다. 더위가 한결 누그러져 땀이 덜 흐르고, 물도 덜 마시게 되니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물론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아질 수는 있으나, 땡볕 아래를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오후에 비가 내리면 높아진 불쾌지수가 기온이 내려가는 것처럼 쑥 내려갈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면서 시작한 도보여행이었다.
지난 7월 23일, 가평 연인산 임도와 용추계곡 길을 걸었다. 한 여름에 임도를 걷는 건 어찌 보면 고역이다. 너른 임도에는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거의 없고 길만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가끔은 고행에 나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연인산 임도를 걷다가 빠져나와 용추계곡으로 가는 길을 코스로 잡았더니 환상적인 도보여행 코스가 되었다. 역시 여름에는 계곡이 최고야,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던 것이다.
이 날 도보여행은 도보모임
'숲길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다.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려면 길 친구가 있어야 더 재미있다. 용추계곡은 서울에서 가깝고 물이 많고 경치가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피서지로 손꼽히고 있다. 도보여행이 부담스럽다면 용추계곡으로 그냥 피서를 떠나도 된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드물어 한적하게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점, 잊지 말기를.
경춘선 전철이 개통된 뒤, 많은 사람들이 이 노선을 이용하고 있다. 상봉역에서 가평역까지 경춘선 급행 전철을 타면 40분 남짓 걸린다. 물론 예전에 경춘선 열차처럼 여행하는 맛을 오롯이 느낄 수는 없지만, 전철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등산복 차림이라 여행하는 맛은 난다. 토요일에는 그래도 나은데,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전철이 꽉 차서 자칫하면 스파이더맨이 되어 전철 문에 달라붙어서 오갈 수 있으므로, 감안하길. 그런 경험이 있어서 하는 얘기다.
가평역에서 내려 연인산 입구 백둔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다. 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 어렵고, 걷기는 부담스러운 거리였기 때문이다. 택시비는 3만 원 안쪽. 혼자 탈 때는 부담스럽지만 네 명을 꽉 채워 탄다면 비용을 나눌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니, 이용해볼만 하다.
연인산 도립공원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느 회사에서 신입사원 연수를 하는지 같은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은 산행을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에 모여서 커다란 함성을 포효처럼 뿜어내 가끔 산을, 숲을 흔들어댔다. 젊은 함성이 힘차게 퍼진 산은 더 젊고 푸르러지는 것 같다. 역시 젊음은 좋다. 강한 전염성까지 더불어 있으니 더더욱.
여름을 맞이한 산은 울창했다.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숲에서는 싱그러운 기운이 사정없이 퍼져 있었고, 우리는 그 기운을 호흡을 통해 체내로 받아들이면서 걸었다. 장수고개로 가는 길, 무척이나 가팔랐다.
우리가 시방 걸으러 온 거여, 아니면 등산을 하러 온 거여, 하는 불평이 터져 나왔지만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거야 굳이 논하지 않아도 경험으로 안다. 30여 분을 땀을 흠뻑 쏟으면서 비탈길을 오르니, 잔잔한 숲길이 펼쳐진다. 차량 한 대가 너끈히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진 길 여기저기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길, 산악자전거가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MTB코스였다. MTB와 도보 여행자는 같은 길을 지향하니, 동지라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길 사이사이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면서 했다. MTB가 신나게 달릴 수 있는 길은 걷기 좋은 길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MTB는 두 바퀴로 속도를 지향하지만 도보 여행자는 두 발로 느림을 지향한다는 것.
걷는 동안 수십 대의 산악자전거들이 우리를 지나쳐가거나 오거나 했다. MTB를 즐기는 건 남녀가 다르지 않았다. 떼를 지어 달리는 산악자전거 사이에서 여자들을 드물지 않게 발견했던 것이다. 파이팅, 멋있어요. 힘내세요. 걸으면서 그들을 응원하는 맛도 각별하다. 이따금 우리의 환호에 화답하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지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숲은 그저 짙은 초록빛으로 물든 줄 알았더니 걷는 사이사이 야생화가 눈에 띈다. 동자꽃이며, 산수국이 걷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게 만든다. 이런 길은 조금 천천히 걷는 게 좋다. 꽃이 수런거리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길은 숲 사이를 뚦고 용케도 나 있다.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길, 숱하게 많은 자전거들이 바퀴를 굴리면서 지나간 길, 그 길을 길 친구들과 걷는다. 바람이 이따금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불어와 걷느라 흘린 땀을 식혀준다.
더위에, 걷기에 지칠 무렵 그림자가 살짝 깃든 길 위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 도시락을 늘어놓는다. 임도는 자동차가 너끈히 지나갈 정도로 넓지만 그렇다고 그 길을 온전하게 차지하면 밥을 먹다말고 여러 번 일어나야 한다. MTB 자전거가 지나가야 하므로. 그래서 길 한쪽은 비워둔다. 입맛이 없을 때 도시락을 싸들고 길 위로 나서면 입맛이 없다는 소리가 아마도 쏙 들어갈 것이다. 집에서 먹던 반찬을 그대로 들고 왔을 뿐인데, 왜 이리 입이 단지 모르겠다. 모든 게 꿀맛이다.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표지판을 따라 한 시간쯤 내려왔는데도 계곡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만 걷고 계곡 물에 발을 담그면서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 조바심이 깊어지고 있는데, 대체 계곡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툴툴거리는 참에 길 아래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계곡이 멀지 않았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싹 가시게 하는 게 물 말고 무엇이 더 있으리오.
폭우로 물이 불어난 계곡은 때로는 얕게, 때로는 깊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침없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에 세속에서 얻어온 근심과 설움, 걱정을 떠내려 보내면서 걸음을 옮긴다. 신발이야 출발할 때부터 수륙양용이 가능한 등산용 샌들을 신었으니 젖거나 말거나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물속으로 발을 들이민다. 발목을 적시면서 흐르는 물은 시원한 기운을 양껏 품었다. 젖은 양말을 스쳐 지나가는 물에 서늘한 기운이 서렸다. 걸으면서 흘렸던 땀이 도로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한기가 느껴진다. 역시, 여름에는 물이 최고, 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계계곡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이 깊어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고인 채 남아 있는 것도 아니건만 물은 웅덩이를 만들고, 깊은 소(沼)를 만들어 어서 들어오라고 더위에 한껏 지친 이들을 불러대고 있었다. 마음이 성급한 이들은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는 것이 양에 안 차다는 듯이 온몸을 물속으로 던진다. 풍덩, 물이 출렁이는 소리에 이어 어우, 시원하다, 하는 감탄사가 물보라처럼 계곡 사이로 흩뿌려진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그 뿐이 아니다. 사람의 키 높이를 넘는 웅덩이에 기운차게 다이빙을 하는 이도 있다. 머리까지 푹 젖어 물속에서 나오는 사람들, 동심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동네 개울에서 혹은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던 추억을 돌이키면서 물속에 한껏 마음을 풀어놓는다.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말간 계곡물에 내려놓고 순수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이래서 휴가가 필요한 것이리라.
카메라를 들고 즐기는 이들의 사진을 찍던 나 역시 길 친구들에게 이끌려 계곡 물속에 들어가야 했다. 계곡 물에 옷을 입은 채 몸을 담가보는 것이 대체 몇 년 만일까? 기억나지 않는다. 발목이야 적셔봤고, 허벅지는 계곡을 건너는 캐녀닝을 하느라 담가봤지만 온몸을 담근 기억은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날 것도 같다.
계곡은 내 키를 훌쩍 넘길 만큼 깊었다. 그리고 몹시 차가웠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여벌옷을 챙겼다가 그냥 꺼내놓고 왔는데 가져올 걸 그랬다, 는 후회를 했다. 가볍게 걷자고 나선 길, 굳이 옷가지를 챙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흠씬 젖은 옷을 입고 걷는 맛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등산복이야 땀 흡수가 잘되면서 빨리 마르는 게 장점이 아니던가. 속옷이 그렇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용추계곡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이 깊어지면서 절경을 연출한다. 더위를 피해서 계곡을 찾은 사람들이 이따금 보였다. 가족 혹은 친구, 연인과 함께 계곡을 찾은 이들은 돗자리를 펼쳐놓고 계곡 옆에서 오수를 즐기기도 하고, 물속으로 숨어 더위를 피하면서 놀기도 한다.
오후 3시 이후부터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맞지 않았다. 잿빛으로 구겨졌던 하늘이 조금씩 화사하게 살아나기 시작한다.
용추계곡 입구로 내려온 시간은 오후 5시 반. 오전 10가 채 안 된 시간에 시작해서 얼추 7시간 반을 길 위에 있었다. 오르막길을 걸을 땐 한없이 더디게 흐르던 시간이 어느 사이엔가 계곡을 거침없이 흘러내려가던 물줄기처럼 빠르게 흘러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길을 걸으면서 얻은 깊은 행복감. 이래서 길을 걷고 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