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주노동자도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노동절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이주노동자도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고기복

관련사진보기


"진정서를 넣고 나면 14일 이내에 출석 요구가 있을 테니, 출석요구서가 나오면 노동부 출석할 수 있죠?"
"그럼요."
"노동부에 출석할 때는 신분증과 임금체불 관련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급여 내역서와 통장 사본도 갖고 오세요."

이주노동자 임금체불 상담을 하다보면,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과에 진정을 넣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진정이란 "근로자가 사업주의 근로기준법 위반사실을 근로감독관에게 알리고 관련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진정을 제기할 경우엔 일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게 되는데, 진정 후 14일 이내 출석이라는 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안내 중의 하나다.

그런데 지난 3월부터 진정서를 넣어도 출석요구서가 2주 안에 통보되지 않아서, 위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민원인이 발송한 진정서가 고용노동부가 위촉한 민간인 신분인 조정관에게 먼저 전달되어, 출석요구서를 발송해야 할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가 곧바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 두 달 가까운 임금체불로 근로감독과에 진정을 낸 얀또는 아직까지 출석요구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진정서를 넣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민간조정관으로부터 사측에서 열흘 안으로 지급하겠다고 하니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었다. 그러나 약속한 날이 지나도 사측은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고, 3~4개월 있다가 지급한다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민간조정관은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를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서를 넣은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 얀또는 출석요구서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역시 지난 5월 화성에서 2년 넘게 일하던 회사를 그만 둔 아궁은 퇴직금을 받지 못해 진정서를 넣었다. 진정서를 넣은 지 보름이 지나서야 조정관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받아야 할 퇴직금을 계산하여 팩스로 넣으라는 것이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퇴직 후 14일 이내에 임금과 퇴직금 등을 모두 지급토록 하고 있다. 아무런 조사 권한이 없는 조정관이 진정한 사람에게 퇴직금 계산을 해서 넣으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아궁은 퇴직금 계산을 하여 팩스를 넣었다.

그런데 사측에서는 퇴사한 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조정관의 연락을 받고는 다음 달에나 지급하겠다고 답변을 해 왔다. 이미 출국 항공권을 예약하고, 출국을 기다리는 아궁이 퇴직금을 받으려면 합법적인 체류 기한을 넘겨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걸 예견하고, 사측은 아무런 권한이 없는 조정관을 비웃듯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아궁은 조정관에게 자신의 출국 일정을 알렸지만, 사건을 근로감독관에게 넘기지 않고 한 달 가까이 사측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외국어가 안 되는 민간조정관은 민원을 제기한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일방적인 통보만 함으로 인해 진정인들은 조정이 아닌 고압적인 조사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조정관 성과보수 때문에 고용노동부 위법 행위

이처럼 진정서를 넣은 지 두 달이 지나도록 근로감독관으로부터 출석요구서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민간조정관이 중간에 끼어서 진정서를 근로감독관에게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금년 2월말부터 공인노무사 자격증이 있는 자, 기업에서 인사노무 담당 등 행정업무 경력이 있는 자, 근로감독 분야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 등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체불 제로(zero) 서비스팀'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서울관악지청과 인천북부지청에서 체불제로 서비스팀을 시범운영한 결과 전체 체불사건의 33.5%가 민간조정관의 상담 조정으로 사전 해결됐다고 밝히고, 금년 2~4월 중 민간조정관을 위촉하여 확대 실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의하면 체불 제로 서비스팀은 전국 43개 지방 고용노동관서에 구성되어, 체불사건이 접수되면 근로감독관이 조사에 나서기 전에 유선이나 면담을 통해 상담 조정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민간조정관들이 임금체불과 관련하여 일선에 배치되면서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민원인들이 애매한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도 고용노동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현재 민간조정관들은 일일 상담사례비로 6만 원을 받고, 해결 1건당 성과보수로 1만 원에서 2만 원을 추가로 지급받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성과보수를 좀 더 받으려하는 민간조정관들이 진정서를 붙잡고 근로감독관에게 넘기지 않음으로 해서,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고 고용노동부는 스스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다.

'근로감독관 직무규정'과 '민원사무처리에 관한 법률' 제6조의 처리기간에 의하면, 근로기준법이 정한 각종 금품미청산과 임금체불 등의 시정기간은 사건접수일로부터 25일 이내로 정하고 있다. 즉 민원인이 진정을 한 지 늦어도 25일 이내에 근로감독관은 사건을 마무리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부득이한 사유로 사건을 25일 이내에 처리하기 곤란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1회에 한해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을 든다 해도, 얀또나 아궁처럼 시급하게 돈을 받아야 하는데도 한 달 가까이 출석요구서조차 받아보지 못하는 현실은 민간조정관들의 횡포이자, 근로감독관들의 직무 유기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민간조정관 월권 유혹과 근로기준법 위반 여지 많아

근로기준법에 따라 근로감독관은 당사자 조사 도중 서로 화해를 권하거나 사용자에게 시정명령을 내려서 이를 이행토록 할 수 있다. 당사자간에 서로 화해하거나 시정명령이 이행되면 근로감독관은 내사 종결하고, 시정명령이 이행되지 않으면 감독관은 사용자를 검찰로 입건송치한다. 즉 현재 민간조정관이 하고 있는 상담 조정 업무는 근로감독관이 마땅히 해야 할 업무 중 하나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지난 3월 고용노동부의 제3노총지지 발언을 규탄하면서 민간조정관 도입에 대해 "수사권한도 없는 민간조정관에게 체불임금 사건을 맡기고 오로지 타임오프만 쫓아다니고 있는 노동부의 천박한 행태"라고 비판한 바 있다.

또한 민간조정관 문제에 대해 고용노동부에 질의를 하여 답변을 기다린다는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의정부 엑소더스의 이인화 간사는 "민간 조정관 제도의 법적인 근거가 의심스럽다. 사업주가 임금을 주지 않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청에 진정한 사건을 특별 사법 경찰관인 근로감독관이 조사하지 않고, 이를 민간인이 조정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공기관에 민원을 제기했는데, 민간인이 사법경찰의 영역에서 먼저 민원 처리를 한다는 꼴이다. 이주노동자들을 상대하는 경우 해당 외국어를 알아야 하는데, 조정관이 외국어 능력이 충분히 되는지도 의심스럽고, 노동관계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들의 전화 상담 자세가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상당히 억압적이다. 그리고 사전 조정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조정 기피를 신청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에 대한 개선책이나 폐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임금체불 문제로 퇴사한 사측 관계자들과 만나는 것을 껄끄러워 하는 노동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민간조정관은 일말의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 역시 근로감독관이 해야 할 일이다. 그 일을 근로감독관 직무규정과 민원사무처리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면서까지 민간조정관에게 성과수당을 주고 떠넘김으로 해서 하루가 급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고용노동부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제도 도입 취지에 맞게 체불 제로 서비스를 제대로 하려면, 민간조정관은 도에 지나친 개입을 하지 않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민원인에게 민간조정관을 통해 조정을 원하는지 여부를 묻고, 원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곧바로 근로감독관이 사건을 접수하도록 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의 시스템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조정을 강제하는 등 민간조정관에게 지나친 월권을 할 위험성이 내포돼 있고, 근로기준법을 고용노동부가 스스로 위반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태그:#이주노동자, #근로기준법, #민간조정관, #근로감독관, #임금체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