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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회동이 무산됐다.

 

손학규 대표는 13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접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연말의 예산-법안 날치기를 '국기를 문란하게 하는 행동'으로 규정했다. 이 대통령에게는 '민주주의를 다시 공부하라'고 권고했다. 말이 권고이지 사실상 '최후통첩'이다.

 

대통령을 '귀하'라고 부르면서 이른바 '영수회담'도 걷어찼다. 전격 등원을 결정했지만 "이명박 정권의 반(反)민생정책을 막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국회로 들어갈 것"이라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를 피력했다.

 

MB에 '낙인효과'... 시간은 손학규 편이다

 

손 대표가 '기약 없는 영수회담'을 거부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교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야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 터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야성'을 드러내면서 '날치기를 사주한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범죄심리학에서 유래한 이른바 '낙인효과'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애를 주위에서 '바보'라고 낙인찍다 보면 이 아이는 갈수록 의기소침해져 자신이 진짜 바보인 줄 의심하게 되어 결국은 진짜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명박과의 대결에서 시간은 손학규의 편이다. 이명박은 28개월째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은 대통령이다. 권위주의 정권에서도 없던 일이다. 야당 대표와의 회동이 늦춰질수록 이명박은 야당과의 대화를 거부한 '불통 대통령'으로 낙인찍힐 뿐이다. 아쉬운 쪽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손 대표는 이번 2월 국회를 '민생국회'로 한정짓고 ▲ 구제역 대책 마련 및 진상규명 ▲ 날치기로 잃어버린 서민 복지예산 챙기기 ▲ 한반도 전쟁예방 및 남북 평화협력대책 강구 ▲ 친수법, 서울대 법인화법, UAE 파병동의안 등 날치기 규명 및 원상회복 ▲ 한미FTA 저지 및 한-EU FTA 관련사항 점검 ▲ 대규모 국가부채와 가계부채, 전세대란 및 생필품 급등대책 ▲ 부자감세로 인한 카드소득공제 폐지 저지 등을 민주당의 등원목표로 제시했다.

 

이번 국회를 '민생국회'로 규정하고 7대 등원목표를 천명한 것도 좋은 전략이다. 민주당이 2월 민생국회에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생산적으로 실효성 있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4월 재보선에 투영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원내대표와의 역할분담과 협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2% 부족하고 허전하다.

 

'노숙자 체질' 손학규의 타고난 '현장 체질'

 

2007년 3월 대선 경선 당시 한나라당의 '제3후보'였던 그에게 탈당의 기폭제는 "손학규는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당 밖으로) 나가도 추운데 나가는 것"이라는 이명박 후보의 발언이었다. 불리한 '경선 룰'과 '줄 세우기'에 적잖은 불만을 갖고 있던 그는 "(이명박 후보가) 예의와 품격의 빈곤을 드러낸 것"이라고 맹공을 퍼붓더니 결국 "나는 이제 시베리아로 간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손학규는 이후 '시베리아'나 다름없는 통합민주당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들어와 경선을 치렀으나 정동영 후보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빈손이었기에 지난 대선 패배 이후 당대표를 맡는 '독배'를 들었고, 총선 패배 이후에도 훌쩍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춘천 칩거 2년 만에 여의도로 돌아왔고, 정계 복귀 2달 만에 민주당 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가 2008년 4월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2년 동안 닭을 치며 칩거한 춘천은 서울보다 추운 곳이다. 손 대표가 머문 산골마을은 홍천과 접한 대룡산 기슭에 있어 '시베리아'나 다름없이 추웠다. 손 대표는 그곳에서 틈나는 대로 북한산의 정상인 백운대(836m)보다 더 높은 대룡산(약900m)을 오르내리며 '체력'을 길렀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전당대회를 두 달 앞두고 정치일선에 복귀했을 때 정치학 교수 출신의 지력(智力)에 '체력'까지 겸비했으니 당대표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허튼소리만은 아니었다. 손 대표의 한 측근도 "솔직히 젊은 수행비서도 혀를 내두를 만큼 빽빽한 일정을 거뜬히 소화할 만큼 '괴력'을 발휘한 것은 민심대장정과 춘천에서 체력을 다진 덕분이다"고 했다.

 

청년들도 견디기 힘든 연말 혹한기의 서울광장 천막농성에 이어 1월 3일부터 시작된 '100일 희망대장정'을 거뜬히 소화해내는 것을 봐도, 그는 주위에서 '노숙자 체질'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만큼 타고난 '현장 체질'이다. 2006년의 '100일 민심대장정'과 이듬해 3월 한나라당 탈당 이후의 2차 민심대장정에서 보인 텁수룩한 수염은 손학규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이후에도 통합민주당 대표로서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생탐방'을 했고, 이번에 다시 '100일 희망대장정'을 시작했다.

 

지금은 이명박과 '맞장'을 뜨는 승부사 면모 보일 때

 

그가 13일 기자회견에서 분노를 실은 "국민의 원망이 가축들의 핏물처럼 온 나라 시내와 강을 넘친다"는 경고는 '민심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민생관리 실패는 이제 어떤 공적도 삼켜버릴 것"이라는 경고 또한 책상머리에서 나온 탁상공론이 아니다.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거적때기' 깔고 밖으로 돌 때가 아니다.

 

"이런 꼴 보려고 2개월 동안 거적때기 깔고 전국을 떠돌았단 말이냐."

 

손 대표는 자신이 조기등원론에 제동을 걸었음에도 지난 7일 의원총회에서 다수 의원들이 '등원 불가피론'을 주장하자 측근들에게 자신의 격정을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연말 예산안 날치기 이후 두 달 넘게 풍찬노숙하며 장외투쟁을 이끌어온 그로서는 등원 불가피론에 맥이 빠질 만도 하다.

 

또 그의 측근들 얘기처럼 야당 대표가 전국을 돌며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 대안을 만들어가는 실험은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거적때기 깔고 전국을 떠돌' 때가 아니다. 지금은 제1야당의 지도자로서 이명박과 '맞장'을 뜨는 승부사다운 면모를 보일 때다.

 

손 대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국민 대중에게 제1야당 지도자로서 그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손 대표는 지난해 10월 당대표로 선출된 후 10%대의 지지율로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대권후보 선호도 2위를 달렸다. 하지만 한 달만에 다시 한자리수로 떨어지더니 최근 지지율은 바닥이나 다름없는 3~4%대까지 하락했다.

 

반면 유시민 전 장관은 파주의 집필실에서 두문불출한 가운데서도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2위 자리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손 대표는 최근 '리얼미터' 주간정례조사(2월 둘째주)에서도 유시민(13.5%)보다 뒤진 7.9%를 기록해 오세훈 서울시장과 공동 3위를 기록했다(전국 19세 이상 남녀 5000명 대상 가구전화 및 휴대전화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1.4%p).

 

'유시민 지지율' 벽을 넘지 못하면 먹히는 건 시간문제

 

물론 비관적인 여론조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야권 후보만을 놓고 후보 적합도를 물었을 때는 손학규(32.4%)가 유시민(16.4%)보다 2배 가까운 차이로 앞선 조사도 있다(1일, 안부근연구소). 단순 지지도에서는 뒤지지만 야권 단일후보 경쟁에서는 손 대표가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셈이다.

 

또 손 대표가 단순 지지도에선 4위이지만, 1, 2순위 선호후보를 묻는 병행조사에서는 유시민(12.5%) 등 경쟁후보들을 근소하게나마 앞서며 박근혜(44.1%)에 이어 2위(13.6%)로 나오기도 했다(11월, EAI). 그에 대한 지지도 하락이 지지를 철회했다기보다는 잠재 지지층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앞으로도 대선은 1년 10개월이나 남았고 선거구도와 지지율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손 대표 본인은 물론 참모들도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가 그가 한나라당 경선을 끝내 포기하고 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00일 민심대장정'에도 불구하고 돌파하기 힘든 '마(魔)의 5%' 지지율 벽이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제1야당 대표인 그가 지금 '유시민 지지율'의 벽을 넘지 못하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경쟁자들에게 먹히는 것 시간 문제다. 이명박과의 대결에서 시간은 손학규의 편이지만, 다른 경쟁자들과의 대결에서 시간은 손학규의 편이 아니다. 연말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까지 기다려줄 만큼 너그러운 경쟁자는 민주당에 없다. 존재감을 상실한 그로서는 돌파구를 만들어서라도 현재의 국면을 돌파해야 할 시점이다.

 

다행히 그 앞에는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4·27 재보선이 놓여 있다. 4·27 재보선은 남은 임기 1년짜리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다. 국정감사가 끝나는 연말부터는 사실상 총선 체제가 가동된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대선이 기다리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할 기회는 6개월도 안 된다. 해당 지역 유권자들 역시 사실상 임기 반년짜리 의원에게 지역사업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 재보선은 여느 재보선과는 다르다.

 

'한나라당의 천당', 분당에서 떨어져도 '본전'

 

어차피 이번 재보선은 이명박의 '아바타'인 안상수 대 손학규의 대결이다. 피해갈 수 없는 혈전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상책이다. 당 대표에게는 어차피 전국이 선거구다. 손 대표는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사실상 경기도 전역이 지역구다. 서울의 강남구처럼 경기도의 신정치 1번지인 분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성남 분당을 보궐선거는 강원지사, 경남 김해을 재선거와 함께 최대 관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손 대표는 민주개혁진영의 지지자들에게는 아직 '회색'이다. 지난 대선 경선 전만 해도 한나라당 후보였다. '시베리아' 발언을 계기로 야권으로 망명했지만 '제3후보'로서 민주당 경선에 참여해 정동영 후보에게 석패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전당대회에서 마침내 민주당 대표가 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대안이고 유능해서가 아니고 그를 넘어서 민주당을 대표할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총선을 앞장서서 이끌 '얼굴마담'이 필요하다. 총선에서 '최고의 얼굴마담'은 야당에 승리를 안겨줄 가능성이 큰 대선주자다. 2012년은 4월에 총선을 치르고 8개월 뒤에 대선이 있다. 총선과 대선을 한 해에 치르기는 1992년 이후 20년 만의 재판이다. 1992년 총선과 대선 결과는 각각 민자당(과반에 1석 부족한 149석)과 김영삼의 승리로 끝났다. 2012년에도 총선에서 승리한 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손 대표에게도 총선 승리가 곧 대선 승리라는 얘기다. 그는 지금 춘천 대룡산에서 2년간 단련한 체력과 돌파력으로 성남 분당을에 출마해 승부사의 면모를 보여줘야 할 때다. 분당은 우스갯소리로 '한나라당의 천당'이다. 민주당은 떨어져도 부담 없는 지역이다. 그로서는 지고도 이길 수 있는 지역이다. 붙으면 단번에 야권의 대표주자로 떠오를 수 있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헌신성을 인정받으면 시쳇말로 밑져야 본전이다.

 

더구나 민주당 표적집단면접(FGI) 조사에서도 여야 지지성향과 상관없이 유권자들이 '거물'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에서도 강재섭 전 대표와 정운찬 전 총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어 '빅 매치'의 가능성은 그만큼 크다. 지금은 민주당이 강금실, 신경민, 조국 등을 내세워 '간'을 볼 때가 아니다. 지금은 정면승부할 때다. 그것이 손학규의 운명이다.

덧붙이는 글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한 애서가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참모들에게 농반진반으로 "책이 읽고 싶어 감옥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손학규 대표는 자타가 공인한 '현장파'이다. 손 대표와 가까운 한 중진 의원은 서울광장에서 노숙투쟁을 할 때 손 대표에게 '책이 읽고 싶어 감옥 가고 싶다'던 DJ의 일화를 거론하며 "손 대표도 대통령이 되어서도 다시 현장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덕담을 했을 정도다. 그러나 '현장'에 가려면 먼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태그:#손학규, #분당을, #유시민, #시베리아, #민심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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