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유난히 길게 느꼈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나보다. 한낮의 햇살이 등에 닿으면 뜨듯한 윗목에 누운듯 등허리가 데워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자전거를 애용하는 사람들이 가을을 체감하는 기분좋은 순간이다. 이런 날씨가 주말에도 계속 되니 발바리 자전거족에게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가을날의 보약같은 햇살을 내내 즐기며 달린 곳은 인천 강화군 삼산면의 한적하고 아늑한 섬 석모도다. 사실 이 섬은 자전거 여행자에게 친절한 곳은 아니다. 마을 이름인 삼산면에서 보듯 작은 섬에 산이 세 개나 우뚝 솟아있다.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좋을지 모르나 자전거 탄 사람에게는 고개 혹은 오르막이 세 개나 존재한다는 의미다. 게다가 해안도로엔 자전거길은커녕 갓길도 거의 없다. 도로의 맨 우측 흰선을 생명선 삼아 앞바퀴를 고정하고 달려야 한다.
이런 섬이라면 한 번 다녀간 자전거 여행자는 다시 찾지 않을 법도 한데, 희한하게 석모도는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봄, 가을로 이 섬을 꼭 달린다는 어떤 자전거족은 고개를 넘으며 섬을 일주할 때는 허벅지가 아프고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는데 이상하게도 섬이 밉지가 않단다. 석모도에 그 어떤 매력이 숨어 있길래 다들 힘들어 하면서도 좋다할까. 나도 그 매력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달려가 보았다.
섬속의 섬, 석모도 애마 잔차를 딱지처럼 착착 접어서 차에 싣고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을 향해 간다. 석모도는 형뻘인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주말을 맞아 강화도 가는 48번 국도의 많은 차량들 한쪽에 울긋불긋 화려한 자전거 복장을 한 라이더들이 단체로 혹은 서너명이, 어떤 이는 홀로 달려가고 있다. 길고도 위험한 국도변을 굿굿하게 달려가는 그들이 마치 금속말을 탄 용감한 전사처럼 보인다.
강화도의 서쪽 끝에 있는 외포리 선착장에 도착, 따로 주차료를 받지 않는 인심좋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석모도 가는 배표를 사니 왕복 2천원, 무척 싸다. 애마 잔차와 함께 선착장에 서서 배를 기다리는데 눈앞에 보이는 석모도가 손을 뻗치면 닿을 듯 가깝다. 어쩐지 배삯이 싸더라. 30분마다 두 섬을 오가는 배에 타려는데 자전거를 데리고 탄 사람은 3천원을 더 내야 한단다. 즉석에서 애마 잔차를 접은 다음 손으로 들고 타겠다고 하니 직원들이 신기하다고 웃으며 그냥 타란다.
차량들로 꽉찬 배안에서 강화도에 사신다는 50대의 보기좋은 자전거 부부를 만나 석모도 얘기도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배삯을 따로 안낸 내 작은 자전거가 궁금한지 이리저리 만져보며 관찰 중. 남자도 힘들다는 섬 라이딩을 같이 하는 중년의 부인이 참 멋있어 보였다. 머리위로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먹으려 달려드는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데 그 표정까지 생생하게 보인다. 인간이 만든 과자에 중독된 갈매기들의 식탐어린 눈빛이 안됐다.
한적하고 아늑한 곳갈매기와 함께 서해 바다위를 떠가던 배는 채 10분도 안되어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있다가 본섬 강화도로 돌아가는 마지막 배 시간이 저녁 9시라니 한결 여유로운 섬 여행을 즐길 수 있겠다. 석포리 선착장 앞에는 배가 오가는 시간에 맞춰 섬을 일주하는 마을버스가 작은 매표소와 함께 정겹게 기다리고 있다. 하루 8천원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도 여럿 있으니 굳이 자전거를 데리고 섬에 오지 않아도 되겠다.
석모도는 40km 정도의 해안길이로 하루나 여유롭게 1박 2일로 자전거 여행을 하기 좋다. 섬 중앙의 산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민머루 해변과 보문사 등 관광지와 펜션들이 많고, 북쪽은 해안도로와 섬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모여있다. 자전거 여행도 남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섬을 한바퀴 도는 코스가 일반적인데, 나는 거꾸로 북쪽 해안도로를 향해 달려갔다. 관광지보다는 섬 마을과 이맘때쯤의 황금빛 들녘이 먼저 보고 싶어서다.
많은 유적들과 유명한 명승지가 많은 본섬 강화도가 도시로 나가 성공하여 출세한 형이라면, 석모도는 시골읍에 남아 전원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동생같다. 저 앞에 바다와 이름모를 작은 섬이 떠있는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바닷가의 소박한 텃밭과 집들의 풍경이 아늑하게 느껴지고 정답기만 하다.
주말임에도 지나가는 차가 뜸한 해안도로를 신나게 달리다보니 길가에 집집마다 내놓은 빠알간 고추들이 가을 햇살을 맞으며 썬탠중이다. 추석명절 때 딸이 주었다는 고추들을 열심히 닦으며 말리고 있는 동네 어느 할머니는 자전거 운동하냐며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섬 마을 할머니에게 자전거는 아직 운동의 도구지 여행의 도구로는 생각되지 않나보다. 갈라지고 딱딱하게 굳은 살이 배긴 할머니의 손발이 너무 작아보여 맘이 짠하다.
석모도에서 주민이 제일 많이 사는 동네 삼산면에 도착했다. '만물슈퍼'에서 간식을 사먹고 돌담사이로 예쁜 나팔꽃들이 피어난 마을길을 걸어본다. 섬에는 2천여명의 주민이 산다는데 다들 들녘으로 바다로 일을 나가셨는지 동네는 한산하기만 하다. 어디서 왁지지껄한 소리가 들려 가보니 동네에 있는 '농기계수리센터'에 아저씨들이 모여있다. 때가 추수철이니만큼 트랙터와 각종 농기계들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가을 석모도는 금모도 삼산면부터는 광활한 황금들녘의 농로와 길이 펼쳐진다. 여기가 섬이라는 걸 잠시 잊을 정도로 주위는 온통 금빛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평화롭고 배부른 풍경에 힘든 줄도 모르고 들판 사이의 작은 길을 따라 저 멀리 섬의 북쪽 끝 하리 포구와 저수지를 향해 페달을 밟는다. 이 들판엔 지나가는 차들도 거의 없어 호젓한 라이딩을 맘껏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듯한 석모도 평야를 달리다보니 가을 석모도는 가히 금모도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너른 평야의 곳곳에서 트랙터들이 부지런히 추수를 하고 있는데 주위로 새들이 새카맣게 몰려 따라다닌다. 가까이 가보니 다름아닌 반가운 제비들이다. 추수할 때 나오는 벼 낟알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제비들도 참 오랜만에 보고 그 모습에 배 주위로 몰려드는 갈매기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섬 속의 이 드넓은 평야는 알고보니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란다. 석모도를 비롯한 강화도의 간척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온 고려 조정이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펼쳐 조성한 곳이라고 하니 조용한 평야가 다시 보인다.
어느 들녘에서 주민들이 맛있게 새참을 먹고 있는데, 옆에 웬 경찰차가 서있다. 자세히보니 주민들이 순찰중이던 경찰관들을 불러 같이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섬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정다운 풍경이 아닌가 싶다. 황금들녘 옆 길가에 곱게 피어난 해바라기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게 해주었다.
노랗게 익은 벼들이 고개숙여 인사하는 평야를 달려 북쪽 끝 하리 포구와 저수지에 도착했다. 게구멍이 숭숭 뚫린 개펄에 올라앉은 어선과 녹슨 닻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되는 하리 포구를 지나면 가을 정취로 가득한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가엔 마당에 편안한 평상이 있는 소박한 식당이 있고, 낚시꾼들이 물에 비친 구름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는 이색적인 하리 저수지는 해가 질 때면 그림같은 노을로 유명해 영화 <시월애>의 배경이 되기도 했단다. 자전거 여행자들에겐 편안한 중간 휴식처이기도 하다. 석모도에 배를 타고 같이 왔던 50대 부부 라이더를 여기서 또 만나게 되어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기 좋은 중년의 부부 라이더가 달려왔던 섬의 남쪽 해안길을 달려 간다. 마음속에 쌓인 번뇌를 지우듯 사백개가 넘는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올라가는 절 보문사, 섬의 유일한 바닷가로 적막한 폐염전의 풍경이 인상적인 민머루 해변 가는 길, 그리고 해안가를 점령한 많은 펜션들. 그만큼 차들도 관광객들도 많아 몇 시간 전 내가 지나왔던 북쪽의 석모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세 개의 오르막 고개를 만나 결국 힘에 부쳐 끌바 (자전거 용어로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고 나아감)를 하기도 하면서 힘들게 달려갔지만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나니 또 생각나는 섬이다. 누구는 아늑한 엄마 품속 같다고 하고 누구는 쓸쓸함과 번잡함이 공존하는 섬의 분위기가 좋다고도 한다. 석모도에 가면 꼭 자전거를 타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