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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출했어요. 이제 집에 안 들어갈 거예요."

많은 결혼 이주여성들을 만나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무슨 말인지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문화적 차이인지 어떤 이유인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때면, 옛 속담을 생각하며 그러려니 하게 된다.

그런데 유독 H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길 좋아했고, 성격이 괄괄해서 아직 철부지 같기도 하고, 순진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H를 처음 만난 것은 삼 개월 전이다. 그녀가 베트남에서 결혼하고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H는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자신의 나이보다 두 배는 더 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상추, 깻잎 등을 시설재배 하는 농부였다. 말수가 적고 덩치가 큰 남편과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쫑알거리는 H가 같이 있으면 아버지와 딸 같아 보였다.

결혼한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H는 뜬금없이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활달한 성격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H의 답변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신랑하고 싸울 때 쓰려고요."
"네? 혹시 남편이 H 때려요?"

"아니오, 그런 적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신랑이 화나면 물건 막 던져요. 시어머니랑 똑같아요."

매주 일요일 H가 참석했던 태권도교실 모습
▲ 태권도교실 매주 일요일 H가 참석했던 태권도교실 모습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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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가출소식을 전해 온 H씨

H가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한 건 결국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렇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H는 가출하기 전까지 매주 일요일 태권도 교실에 참석했다. 태권도 교실에 열심인 걸 보면서 참 의외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났네, 남편하고 싸웠네 하며 집을 나와서 보는 사람마저 조마조마하게 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하루는 남편과 싸웠다며 집을 나온 H로부터 사연을 들어봤다.

"한 달 비닐하우스에서 일했는데, 오만 원 받았어요. 공장 가서 일하겠다고 했더니, 베트남 가래요."

아무리 집안일이라고 하지만, 결혼 이주여성인 H 입장에서는 한 달 일한 대가로 아르바이트 하루 일당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나서 기분이 상하고 만 것이었다. 그 일로 다투다 차라리 공장가서 일하겠다는 H와 집안일을 하라는 남편 사이에 고성이 오가며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남편 되는 사람에게 연락을 해 봤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H가 나가서 어머니가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앓아 누우셨어요. 좀 달래서 데려와 주세요.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죠"라며 하소연을 했다. 남편의 말을 전해들은 H는 "그 말 다 거짓말이에요. 집에서 하는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 달라요"라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H를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었다. 당시 H를 차로 태워줬던 지인은 "아이고,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탱크 지나가는 줄 알았어요"라며 H 말이 사실이었다고 전해줬다. 잠도 자지 못하고 앓아누웠다는 시어머니는 거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H가 집으로 돌아간 지 며칠이 지나면서 'H가 성깔은 있어도 잘 참고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 가출한 것이었다. 결혼 이주여성들이 가출하고 나서 곧바로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경우는 흔한 경우가 아니다. 보통은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할 뿐만 아니라 가출 전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H는 자신의 가출 사실에 대해 당당하게 전해 왔다. H는 마마보이처럼 시어머니 눈치만 보며 히죽히죽 웃기만 하는 남편을 믿고 평생을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돈 주고 사 온 여자 취급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했다.

비록 물리적인 폭력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겠다는 각오로 태권도를 배웠던 H라면, 그녀는 가출을 결심하기까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곱씹었을지 모른다.

"H가 결국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가게 된 것은 아무도 자신을 한 가정의 아내로, 며느리로 여기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출했다는 전화에 '그런가보다'하며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태그:#결혼이주여성, #베트 남, #가출, #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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