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8일 오전 8시 30분. 시화공단에 위치한 (주)파카한일유압 정문 앞에는 5, 6명이 모여 있었다. 삐죽하게 높이 쳐진 철망 아래 정문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출입을 허락했다.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몇 명은 주위에서 나무를 주워와 작은 통 속에서 불을 떼기 시작했다. 5일 전에 내린 눈이 얼어붙어 길은 미끄러웠고 기온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날씨였다.
 

회사 정문에 모인 사람들은 2009년 5월 31일부로 해고된 파카한일유압의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예전과 그대로 회사 작업복을 입은 채 예전과 같은 시간에 출근했지만 회사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해고된 지 약 220일. 예전에는 그나마 노조사무실로 출근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굳게 잠겨진 철제 정문과 담을 따라 높이 심어진 철조망만이 그들을 반겼다. 회사의 신고로 경찰서에 연행되는 것이 이벤트 같은 행사가 되어 버렸다.

 

한 번씩 따뜻한 커피라도 타주던 회사 안쪽의 경비원들도 더 이상 그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 정문 근처에 설치된 CCTV에 녹화되면 경비원들도 회사 관리자로부터 문책을 당하기 때문이다.

 

파카한일유압은 건설 중장비용 유압메인 컨트롤밸브를 생산하는 직원 200여 명의 시화공단에서 꽤 규모있는 회사였다. 2005년 미국 다국적 기업 '파카'가 '한일유압'을 인수하면서 '파카한일유압'으로 상호가 변경된 이후 매출액 420억, 회사 신용등급 A를 받는 등(2008년 자료) 재무상태가 양호한 회사였다.

 

하지만 2008년 12월 글로벌 경제위기와 물량감소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휴업을 강행했고 현재 34명이 해고된 상태다. 외국투자자본에 대한 지원이 많은 화성 장안공장으로 이전하면서 기존 노동자들은 책임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화공단의 우량기업이 신규투자자본으로 둔갑하여 화성으로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경기도는 장안공장의 실적으로 만들고 있다.

 

해고된 지 220일을 넘기면서 그나마 생계를 이어주던 실업급여도 지난달로 끝이 났다. 그렇게 해고된 노동자들은 추운 겨울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월급은 안나오고 생계 막막

 

사람좋게 생긴 김명수씨는 추운 날씨에 얼굴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시종일관 웃으며 얘기했다. 선한 웃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잇는 그는 결혼 4년차 신혼부부다. 현재 생활은 아내가 모두 해결하고 있다. 그나마 아직 아기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그의 말들 속에 허탈함이 묻어 나온다. 

 

"그래도 맞벌이라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다른 사람들 얘기는 더욱 가슴아프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해고 이후 저축한 돈을 쓰다가 주위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지내고 있다.

 

대출까지 쓰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이도 많다. 이에 대해 김명수씨는 "대부분 서민들이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 싸우고 싶어도 생활고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하소연한다. 어떤 사람은 100일 갓 지난 아이를 노래방에 맡겨놓고 나오는 이도 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아프다.

 

밤에는 야간 알바, 이후 오전 출근

 

박구호씨는 야간에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렇게 밤새도록 일하고 다시 파카한일유압으로 출근한다. 별다른 일정이 없을 때만 틈틈이 잠을 잔다. 피곤하지 않냐는 물음에 "피곤해도 함께 하는 사람들 때문에 버텨낸다. 좋게 하려고만 하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웃는다.

 

곤란한 일이라면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라는 아버지의 성화다. 지난 해 파카한일유압 사례를 보도한 MBC <PD수첩>을 본 주위 사람들이 "미국기업을 어떻게 상대하냐. 억울해도 참아라"며 복직투쟁을 만류한다고 한다. 주소지를 옮기지 않아 한 번씩 시골집으로 날아가는 소환장도 부모님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다.

 

예전에는 외국계 기업에 다닌다고 하면 주위의 인식이 좋았다. 직장도 괜찮고 임금도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파카한일유압 측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직접 당해보니 그야말로 "환상이 깨졌다"고 말한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A씨는 결혼을 대비해 장만한 아파트를 팔 생각이란다. 월급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대출금을 갚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종시 계획안 반대하는 김문수 도지사보면 가장 화나

 

매일 추운 길거리 생활 200일째. 건강은 어떻냐는 물음에 "다들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고 한다. 몸이 고생하는 건 괜찮은데 정작 큰 병은 '스트레스'다. 생계에 대한 불안감, 회사에 대한 억울함에 더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고 한다.

 

한번씩 법원에서 날라오는 서류나 전화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경기도청 앞에서 40여일 간 외국인 투자 자본 지원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천막 농성을 하며 강해졌다며 넉살좋게 웃는다.

 

그런 그들에게 요즘 가장 열받는 뉴스는 세종시 개발 계획에 대해 김문수 도지사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두손 걷고 나선 모습이라고 한다. 수도권 기업을 세종시로 옮겨가는 것에 대해 표로서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라는 김문수 도지사의 화끈한 발언은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2009년 뜨거운 여름, 파카한일유압 해고 노동자들은 경기도청 앞에서 40일동안 천막농성을 했다. 시화공단에서 화성시 장안면 일대 외국인 투자단지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 외국 투자 자본에 대한 기본적인 규제를 요구했다.  신규투자유치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옮겨와 실적으로 둔갑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것이다.

 

40일 넘는 천막농성 동안, 그리고 화성 장안 공장에서 파카한일유압과 동일한 제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박구호씨는 "언론에서는 외국인 유치한다는 소리만 초점을 맞추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며 결국 뒷감당은 노동자들의 몫이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늦었지만 지역사회에서도 관심

 

시흥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최근 파카한일유압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동자들이 해고된지 200일이 되어가던 12월 중순이었다.

 

강석환 당시 시흥YMCA 간사는 "지역에서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틈을 좁혀 주었던 파카한일유압 노동자들이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데 늦게 찾아와 미안하다"며 인사말을 전한 후 시민단체들도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지난 9일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인 조정식 의원과 면담을 가졌다. 조정식 의원은 해고자 복지, 임금, 화성 장안공장으로의 공장이전 등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확인하고 "김윤식 시흥시장과 함께 중재 방안 등을 상의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파카한일유압 해고 노동자들과 시흥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주 김윤식 시흥시장과의 면담을 앞두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흥시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파카한일유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