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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말과 고상한 말만 늘어놓는다 해서, 훌륭한 문장이 될 수 없소, 글이란 뜻을 드러내고 진실해야 하오" "하늘은 세상을 귀하고 천함으로 구분하지 않고, 고르게 내렸을 뿐이오. 사람이 사람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오." - 서인과 남인에 맞서 답하는 연암 - (6마당 장면#24)

"글을 읽고 안 읽고는 보는 이의 마음이 정하고, 문장이라 함은 쓰는 이의 마음을 드러내거늘, 나라에서 막는다 하여 사람의 마음속까지 막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하하하 소신은 그리 못하지요!" - 정조 임금이 열하일기를 고문체로 재 집필하라고 하자 이에 답하는 연암 - (6마당 장면#25)


지난 7일 밤 9시, 함양 연암문화제에서 마당극패 우금치 창작 공연 <소소선생과 낙화기담> 공연이 열리고 있다. 400여명의 관객들은 공연 내내 해학과 풍자를 담은 마당극을 보며 즐거워했다. 사진은 아리랑의 선율에 따라 신명나는 놀이판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
▲ 소소선생과 낙화기담 지난 7일 밤 9시, 함양 연암문화제에서 마당극패 우금치 창작 공연 <소소선생과 낙화기담> 공연이 열리고 있다. 400여명의 관객들은 공연 내내 해학과 풍자를 담은 마당극을 보며 즐거워했다. 사진은 아리랑의 선율에 따라 신명나는 놀이판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
ⓒ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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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사상가 연암의 꿈

지난 7일 밤 9시, 함양 연암문화제에서 선보인 창작 초연 마당극패 우금치의 <소소선생의 낙화기담>은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실학자이며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이다.

연암의 중국 기행문 <열하일기>는 그 풍부하고 활달한 필치로 철학과 사상, 과학과 음악, 실용과 논리를 담은 뛰어난 사상서로, 당대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는 진보의 열망이 담겨있다.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서'는 김택영이 조선 500년 이래 최고의 문장이라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정조 임금은 <열하일기>를 읽고 나서, 당시 지식인들의 문체가 순정치 못하게 된 것은 전부 박지원의 죄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당장 순수한 글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연암은 문체반정을 꾸짖는 정조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덕분에 이 책은 1783년 탈고한 후 100년 동안 금서가 되었다.

<열하일기>를 통해 당시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과 청나라의 문물을 본받아야 한다는 연암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혁신적 사상이었다. 연암은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우언과 해학을 즐겨 구사했다.

이날 선보인 <소소선생의 낙화기담>도 연암의 사상과 작품인 '양반전'과 '호질'을 춤, 민요, 판소리, 탈 연기 등을 적절히 섞어 해학과 골계를 표현해냈다. 공연 1시간 전까지 부슬비가 내려 음력 17일에도 불구하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 됐지만, 메인무대 옆 지우천에서 흐르는 계곡물소리와 여름밤 풀벌레소리가 조명과 한데 어우러져, 자연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맛볼 수 있는 환상적인 무대를 자아냈다.

특히 이번 공연은 심오한 연암의 사상을 현대인들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구성하여 가족과 함께 나온 어린이와 노인들의 시선까지 한데 붙잡았다. 400명이 운집한 정사각형으로 짜인 무대는 극의 몰입을 가져다주었고, 객석의 의자에는 다시 나무를 덧대 공연시간 90분 동안 어느 야외무대에서 볼 수 없는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소녀 같은 젊은 여인이 아리랑을 청아하게 부르며 연암의 꿈속으로 들어온다.
▲ 1마당. 연암의 꿈 소녀 같은 젊은 여인이 아리랑을 청아하게 부르며 연암의 꿈속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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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이야기...전체 6마당

공연은 총 6마당으로 1마당에서 5마당까지는 양반전 이야기를 통해 양반의 허위의식을 꼬집기도 하고, 연암이 호랑이가 되어 북곽 선생을 꾸짖는 꿈속 이야기로 전개됐다. 6마당은 안의현감이 박씨전을 쓰게 되는 현실 속 이야기로 거짓과 불의, 불의와 위선으로 가득 찬 당시 조선의 현실세계를 꿰뚫어보며 능청과 익살, 해학과 풍자로 엄숙주의, 허위의식, 경직된 사고에 매달렸던 시대의 똥통을 걷어찼다.

마당극 <소소선생의 낙화기담>은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정사를 보덕 계축년(1793년․정조17)어느 날,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 달빛에 뒤척이다 잠이 든 연암의 꿈속으로 문장의 벗들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꿈속에서 연암의 벗들이 양반을 돈으로 산 부자에게 양반이 지켜야 할 온갖 도리와 행실을 가르쳐주자, 연암이 스스로 부자 역할을 맡아 "그만 두시오 그만! 참으로 맹랑하오. 장차 날더러 도적놈이 되란 말이오?" 하며 양반의 허위의식과 도적 같은 횡포에 기겁을 하며 양반되기를 거절하며 위선의 시대를 고발한다.

초혼 의식으로 혼을 외쳐 부르면 영정이 깔리며 그 위로 흰꽃가루가 뿌려진다.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는 벼슬아치가 여인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열녀전을 쏟아놓는다
▲ 3마당. 초혼 의식으로 혼을 외쳐 부르면 영정이 깔리며 그 위로 흰꽃가루가 뿌려진다.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는 벼슬아치가 여인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열녀전을 쏟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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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당시 지배계층의 부조리하고 위선적인 시대상황을 냉철하게 비판하면서도 웃음과 골계를 잃지 않는다. 이날 공연 중 이 장면이 가장 짜임새 있고, 빠르게 진행됐다.
▲ 3마당. 분이와의 만남, 초혼 극은 당시 지배계층의 부조리하고 위선적인 시대상황을 냉철하게 비판하면서도 웃음과 골계를 잃지 않는다. 이날 공연 중 이 장면이 가장 짜임새 있고, 빠르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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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로 교차되는 빨간 천위에 하얀 꽃잎이 떨어지는 3마당은 볼거리도 풍부했고, 극적으로도 가장 완벽했다.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는 벼슬아치가 여인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열녀전을 쏟아놓는 장면은 지배계층이 경직된 사고로 양민들을 옭아맸고, 효부열녀들에게는 절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죽음을 부추긴다는 사회적 살인을 고발했다. 이 부분에서 서인과 남인은 오늘날 대규모 미디어 언론사를 연상시켰다.

단지, 이 장면에서 미흡한 건 관객들의 호흡을 유도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는 점. 마당극 특유의 성격으로 관객들을 무대 속으로 끌어들여야 했는데 단조로움을 느낄 수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빨간 관복, 파란 관복으로 동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부분은 빠른 템포로 과거와 현실을 박진감 있게 전개해냈다. 또 등장인물들의 연두, 연보라, 하늘색, 연한 갈색 등의 치마저고리는 가면과 사각형 무대 주변에 놓인 등과 함께 관객들의 편안한 시선처리를 유도해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연암이 대사를 말할 때 주 무대중 하나로 쓰인 나무로 만든 탑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연암은 굴각, 이올, 육혼 세 귀신과 함께 호랑이가 되어 양반사냥에 나선다. 덕 높은 북곽선생은 과부인 동리자의 집에서 운우지정을 나누다 호랑이을 보고 기겁하여 달아나다 똥통에 빠져버린다.
▲ 4마당. 호질 연암은 굴각, 이올, 육혼 세 귀신과 함께 호랑이가 되어 양반사냥에 나선다. 덕 높은 북곽선생은 과부인 동리자의 집에서 운우지정을 나누다 호랑이을 보고 기겁하여 달아나다 똥통에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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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에 중점...해학과 골계 담아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중국의 각종 상인, 직업 연희인,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등 하층 민중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다. 물론 연암은 자신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그 내면 심리와 언동을 여실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 결과 연암은 도학자거나 엄숙주의에서 초탈한 풍부한 개성의 소유자로 생생하게 형상화되었다.

마당극 <소소선생의 낙화기담>은 이 같은 부분에 많은 주안점을 두었다. 대사 하나 하나도 아름답거니와 류기형 작가가 <열하일기>를 재해석한 부분은 정말 백미다. 해학과 골계를 정확히 집어내고, 웃음으로 풀어냈다. 류기형 작가는 연출도 겸했고, 창작 초연 마당극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게 극을 풀어갔다.

이 부분은 4마당 '호질'에서 정확히 묘사되고 있는데 연암 선생은 굴각, 이올, 육혼 세 귀신과 함께 호랑이가 되어 양반 사냥에 나선다. 지배계층으로 덕 높은 북곽 선생이 과부인 동리자의 집에서 운우지정을 나누다 호랑이로 변한 연암과 그 벗들을 보고, 기겁하여 옷도 제대로 못 추스르고 달아나다 똥통에 빠지는 부분은 압권이다.

마당극은 자연스럽게 '호질'이야기로 전환시켜 위정과 벼슬아치들을 몰아낸다. 호랑이마저 "선비란 것이 더럽고 잔인하고 무섭구나, 내 오늘 몹시 배가 고프나, 저 놈 잡아먹고 병들까 무서워 저 놈을 못 먹겠다." 하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포복절도를 하면서도, 내심 지배계층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서 허탈함을 느낀다.    

꿈속에 금부도사가 나와 연암의 글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연암을 한양으로 압송하고 있다. 연암은 관리들과 임금의 경직된 사고에 대응하여 법고창신과 글의 진실성, 평등의 실학을 제시하다 죽음의 위기에 이른다.
▲ 5마당. 문체반정 꿈속에 금부도사가 나와 연암의 글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연암을 한양으로 압송하고 있다. 연암은 관리들과 임금의 경직된 사고에 대응하여 법고창신과 글의 진실성, 평등의 실학을 제시하다 죽음의 위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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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하일기>로


"근일에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원을 따지면 박지원의 죄 아닌 것이 없다. 열하일기는 나도 이미 숙독하였다. 어찌 이것을 속이고 숨길 것인가? 이야말로 그물을 빠져나간 큰 고기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전파된 후로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마땅히 이것을 맨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매듭을 풀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한 뒤라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 정조 (김하명 논문 '연암 박지원' 에서)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 피서지로 썼던 곳이다. 오늘날 하북성 북부, 열하강 서쪽에 있는 '청더(承德)'에 해당하는 이곳은 북경에서 약 230㎞ 떨어진 곳으로 조선 사신이 열하까지 간 것은 연암 때가 처음이었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약 2300리, 북경에서 열하까지 약 700리. 육로 3000리에 해당하는 먼 길에서 연암은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보며 강렬한 질투심을 느꼈다. <열하일기>에는 18세기 조선 사회가 겪고 있는 균열과 양반 사대부들의 위선, 실학을 무시하고 옛 문헌에만 잡혀 있는 봉건 사회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담겨 있고,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연암의 간절함이 곳곳에 드러난다. 학자들은 연암이 <열하일기>를 1780년 가을부터 1783년까지 썼다고 짐작하고 있다.

연암은 쉰 살이 넘어 정조의 부름을 받고 1792년부터 5년간 안의현감을 지냈다. 연암은 안의삼동 가운데 하나인 지금의 용추계곡 입구인 안심마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들면서 이를 상용화시키는 등 실학을 실천하는데 앞장섰다.

마당극이 공연된 지우천은 용추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안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곳이다. 연암 선생이 최초로 세운 물레방아와도 거리가 가깝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라 이날 공연은 그 의미가 매우 남달랐다. 안의현의 동헌이 있던 지금의 안의초등학교와 공연 장소인 안심마을 지우천은 4㎞로 정도로 거리가 매우 가까운 편이다.

나는 '소소 선생' 이오!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 되는 것일까. 꿈속에 금부도사가 나와 연암의 글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연암을 한양으로 압송한다. 연암은 관리들과 임금의 경직된 사고에 대응하여 법고창신과 글의 진실성, 평등의 실학을 제시하다 죽음의 위기에 이른다.

딱딱하고 묵직한 주제 속에 예고 없이 나타난 연암의 장난기. 정확히는 연출의 힘이다. 대신과 궁녀, 망나니가 모두 달려들어 연암의 목을 치려는 찰라 '문체반정' 장면이 종료된다. 알고 보니 망나니는 분이였다.

꿈속에 깨어난 연암은 박씨의 죽음을 전해듣고 박씨가 꿈속의 분이임을 알고 분이를 위한 열녀전을 스며 소설속 벗으로 다시 만난다.
▲ 6마당. 연암, 함양박씨전을 쓰다 꿈속에 깨어난 연암은 박씨의 죽음을 전해듣고 박씨가 꿈속의 분이임을 알고 분이를 위한 열녀전을 스며 소설속 벗으로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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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당에서 5마당까지가 꿈 속 이야기였다면 6마당은 안의현감이 되어 박씨전을 쓰게 되는 현실 속 이야기다. 꿈에서 깨어난 연암은 박씨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박씨가 꿈속의 분이임을 알고, 분이를 위한 열녀전을 쓰며 소설 속 벗으로 다시 만난다.(편집자 주 : <열녀함양박씨전>은 아전의 조카딸로 죽을 병에 걸린 사람에게 시집간 뒤, 곧바로 남편이 죽자 삼년상을 치르고 끝나는 날 자살한 함양 박씨가 주인공이다. 과하게 정절을 요구하는 봉건제도를 비판하는 내용.)

연암은 분이에게 "오냐 오냐, 세상이 널 죽게 했구나, 어찌 네 목숨을 네가 끊었다 하겠느냐"면서 세상의 위선과 부조리를 통철하게 비판한다. 마당극 <소소선생과 낙화기담>은 공연 내내 한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을 중심으로 소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있다. 아리랑 선율과 함께 다시 한 번 신명나는 쏟아지는 놀이판은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해주아리랑 : 아리 아리 얼쑤 아리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 가세
           진도아리랑 :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리리가 났네
                             아리랑 음~ 아리라기 났네
                 (해주)1. 지붕마루에 박꽃이 피어
                             저 하늘 별 인양 반짝이네
                 (진도)2. 달빛은 밝아서 발그레하고
                             별빛은 쏟아질듯 반짝거린다
                 (해주)3. 뒷동산 진달래 만발하고
                             앞산의 두견이 구슬피 운다
                 (진도)4. 노다 가세 노다 나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노다나가세 

어찌 세상 밖 죽임이 '분이' 뿐이겠는고.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 꿈속과 꿈밖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작 초연 마당극인 이 작품은 주제에 충실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극의 이해를 돕는 아주 뛰어난 수준작임에 틀림없다.

연암이 스스로 "나를 '소소 선생' 이라 불러도 사양치 않겠노라." 할 정도로 세상에 대한 불평과 시대와의 불화를 풀어낸 것처럼 <소소선생과 낙화기담>은 연암이 다시 나타난다면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굿모닝지리산(www.goodji.com)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연암 박지원, #극단 우금치, #소소선생, #연암문화제, #굿모닝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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