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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일(2009년 1월 4일)

히말라야 발자국
08:40   남체Namche 3440m)
11:30   몽라(Mong 3973m, 중식)
13:10   포르체탱가(Phortse Tenga, 3675m)
15:20   도레이(Dole 4110m, Namaste lodge)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무수한 의미들로 채워진 과거의 잔영이 모두 사라진듯, 몸도 마음도 더없이 가볍다.

어제 약속대로 쿠시와 후배를 뒤로 하고 첫번째 트레킹 조망 목적지인 고쿄리로 향했다. 쿠시와 후배는 남체에서 며칠 몸 상태를 보다가 칼라파타르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오늘 우리가 가야할 곳은 고도가 4110m인 도레이(Dole)이다. 대부분의 트레커가 도레이 바로 전 마을인 포르체 탱가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게 되는데, 조금 욕심을 부려 도레이까지 일정을 잡았다. 어제 3750m의 샹보체에 오른 후 고소 적응이 완전한 듯 몸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또한 내일 우리가 가야할 곳인 마체르모(Machhermo)의 고도가 4110m인 것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도레이에서 자지 않고 포르체 탱가(3675m)에서 일정을 마치게 되면, 내일 무려 800m정도의 고도를 높여야 하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분명 '고소'의 불청객이 방문할 것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남체를 떠나 만나는 첫 마을 캉쥬마에 이르니 칼라파타르와 고쿄리의 갈림길이 나왔다. 고쿄리를 등반한 후 이번 트레킹의 종착역인 칼라파타르로 방향을 잡을 계획이기에 왼쪽 고쿄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갈림길에서 몽라까지 약 두 시간동안은 경사면에 붙은 심한 오르막길이었다. 어제 몬조에서 남체까지의 오르막길은 숲속에 난 산길이었으나 이곳은 절벽을 옆에 두고 산허리길이었다. 특히, 자주 야크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산 쪽으로 몸을 붙여 야크가 지나가기만 기다려야 했다.

산허리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긴 계곡이 있었고, 그 아래에서 빙하가 녹아 흐르는 차디찬 강물 소리가 고요히 잠든 대지를 깨우며, 날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날은 얼마나 좋은지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반사되는 햇살이 어우러져 온기로 포장된 길을 열어주었다. 

아마다블람과 에베레스트산의 만년설이 햇빛을 반사해 환하게 앞길을 열어준다. 계곡 아래는 하데스의 영역인 듯 날 향해 과성을 지른다.
▲ 남체에서 몽라로 향하는 산허리길 아마다블람과 에베레스트산의 만년설이 햇빛을 반사해 환하게 앞길을 열어준다. 계곡 아래는 하데스의 영역인 듯 날 향해 과성을 지른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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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라 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티하우스의 바깥 뜰에서 네팔 빵으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였다. 어떤 소스도, 양념도 없이 밀가루만 구운 듯 아무런 맛이 없다. 진짜 빵이다. 고개 꼭지점에 붙어 있는 몽라 마을은 전망이 참 좋은 곳이다. 바로 눈앞에 설산 타보체와 촐라체가 내려다보이고, 그 우측으로 아마다블람의 우아한 자태가 나를 너그럽게 안아준다. 아마다블람(6856m)은 '어머니의 목걸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너무도 아름다운 산이다. 안나푸르나의 마차푸차레, 알프스의 매터호른과 함께 세계 3대 미봉(美峰)이란다.

쿰부 히말라야의 심장부에 위치한 아마다블람에 취하지 않을 이 어디에 있을까? 그 수려한 미모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신의 창조적 예술성에 찬사를 보내게 한다. 보면 볼수록 영혼마저 빼앗길 정도의 유혹을 받는다. 지식과 권력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처럼 저 아름다움에 나의 영혼을 맡기고 싶다. 이런 무언지언(無言之言)의 감동을 '악마의 유혹'이라 부르는 것인가? 

몽라(3973m)의 초라한 티하우스 뒷 뜰에서 점심을 먹으며 바라본다.
▲ 몽라 언덕에서 마주한 타보체(Taboche 6495m) 몽라(3973m)의 초라한 티하우스 뒷 뜰에서 점심을 먹으며 바라본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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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유혹, 아마다블람!
▲ 아마다블람 악마의 유혹, 아마다블람!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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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포르체 탱가로 향하는데, 30여분 동안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내려가면서 아름다운 여인 아마다블람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도레이 방향의 급경사 산길을 따라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지루하게 계속되는 오르막길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포르체 마을과 뒤를 튼튼히 버텨주는 탐셰르쿠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충분한 고소 적응 기간도 없이 무리를 해서인지 머리에 강한 무게감이 느껴지며, 기분까지 몽롱해졌다. 나란은 계속 앞에서 "slowly"를 외친다. 해도 산 너머로 넘어가 기온이 뚝 떨어져 버렸다. 땀으로 젖은 옷에 기온까지 떨어지자 추위가 살 속으로 파고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콧물이 줄줄 흐르고, 3시 이전에 산행을 마치라는 선배 트레커들의 충고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높은 고개에 이르자 멀리 고쿄리 계곡을 넘어 하얀 설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산이 경계를 이루며 채색의 조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고쿄리 방향의 베아트리체가 되어 나를 이끌다.
▲ 초오유 고쿄리 방향의 베아트리체가 되어 나를 이끌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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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란이 말하길 '초오유!'란다. 바로 그 초오유! 트레킹에 오기 전 산꾼인 엄홍길 씨와 박영석 씨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때마다 등장했던 초오유이다. 책에서 보고 상상했던 산이 바로 눈앞에 있다. 머릿속에 그려진 상상의 그림을 지우고 내 앞에 살아 있는 초오유를 담는다. 도레이에 도착하기 30분 정도부터 초오유가 우리를 이끌어 주었다.

몽라까지는 아마다블람이, 도레이부터는 초오유가 나의 사랑스런 베아트리체가 되어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상대적인 세상에 절대적인 행복의 뿌리는 내릴 수 없을까?


이처럼 삶에도 목적이 있는 것일까? 초오유를 보며 걷고 있는 나에게 삶의 나침반은 무엇인가? 삶에도 초오유가 있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행복'이다. 행복이 목적 자체인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의 정체는 '자아실현과 중용'이다. 자아실현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사는 인생의 즐거움이요, 중용이란 부족함과 지나침이 없이 각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中)'은 물리적 '가운데'의 의미보다 상황적 '적절함'의 의미가 정확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행복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목적과 과정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의 상대성이다.

행복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은 단계의 목적으로서 과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삶의 목적과 과정을 서로 괴리되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금, 이곳'에서 만나고 있고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타고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자본의 삶이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걷는 이 길의 돌부리 하나, 꽃향기를 날리는 바람 한 뭉큼까지 사랑하고 느끼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인 것이다. 명문대 입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학창 시절의 다양한 경험과 즐거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적을 추구하는 이 과정이 곧 목적이요, 사랑과 행복의 대상인 것이다. 목적과 수단 모두가 진선진미해야 하고, 지금도 행복하고 이후에도 행복해야 한다.

둘째로 행복의 상대성이다. 행복은 절대적인 것일까, 상대적인 것일까?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중간고사에서 95점을 받았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95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95점의 점수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얻은 행복감이 더 큰 것이 사람의 일반적 심리이다. 비교를 통해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다.

협력과 나눔보다 경쟁이 강조될수록 사회는 배고픈 것은 차치하더라도 '배 아픈' 사회가 될 것이다. 진짜 행복을 돌려주어야 한다. 되찾아와야 한다. 네팔에서 수 백 만 원짜리 명품을 입어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명품을 명품으로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명품은 그 제품 자체가 가진 가치가 아니라 타인들이 부여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여긴 명품이 없는 세상이다. 비교가 없는 세상이다. 그 자체로 행복한 세상이다.

이제 내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 행복의 기준을 부여하고 결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상대적인 세상에 절대적인 행복의 뿌리는 내릴 수 없을까?

오롯한 도레이 롯지의 살가운 풍경들

도레이 마을에 들어가는 초입의 모습!
▲ 도레이 롯지 도레이 마을에 들어가는 초입의 모습!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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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오후 3시 20분 도레이에 도착하였다. 도레이는 풍경이 좀 을씨년스러운 마을이다. 꼭 외딴 곳에 버려진 느낌이라고 할까?

도레이에 도착하자마자 피곤에 떠밀려 첫 번째 롯지를 고민 없이 선택하였다. 도레이와 포르체 탱가의 롯지 수준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 없이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얇은 판자를 칸막이 삼아 방과 방을 엉성하게 구별 지어 놓았다. 야외에서 비박하는 것과 진 배 없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양초를 켜고 잠을 자야할 지경이었다. 세수를 하고 싶다고 하니 양은 대야에 찬물을 담아와, 길거리로 나가 씻고 오라고 한다. 춥다. 나가기 싫다. 그마나 식당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젊은 주인 여자가 끊임없이 야크 똥을 가지고 와 손으로 난로에 집어넣는다. 따뜻함에 취해 있다가, 그 모습을 보자 또 쓸데없는 근심이 일어난다. 저 손으로 혹시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직까지 나란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한 적이 없다. 함께 식사를 하자며 말을 건네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웃음뿐이다. 내 딴에는 고용인인 트레커와 포터라는 관계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얼핏 식당 커튼 뒤로 나란이 밥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네팔 고유의 풍습대로 손으로 먹는 것이었다. 문화적 차이였다. 문화적 차이를 우리는 수준의 차이, 질적 차이로 인식하도록 훈련받지 않았던가? '아유, 더러워. 야만인들.' 나란 뿐 아니라 현지인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풍습에 대한 문명사회에서 온 위대한 트레커들의 거부감과 비하를 알고 있기에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롯지에 함께 투숙한 외국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식당에서 자기로 했나보다. 나 혼자 냉방 중인 방으로 들어가자니 억울하다. 나란에게 "여기 머무를 수 있냐"고 넌지시 물어본다. 선머슴 같은 주인 아줌마가 날보고 OK 사인을 보낸다.

방문을 개인 열쇠로 잠근 다음 식당에 와 누웠다. 이틀간 무리한 것 같아 몸이 천근만근이다. 잠이 들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4명의 네팔리가 들어오더니 시끌벅적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네팔말이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그 리듬에 맞추어 간혹 들리는 아줌마의 간드러진 웃음소리! 정말 깬다.

구석에 모여 이야기하는 네팔리의 모습을 보며, 옛 풍경을 떠올린다.

옛적 우리내 저잣거리에서 장에 가지고 온 물건을 모두 판 사내들은 집에 가지고 갈 돈을 만지작거리며 부인의 행복한 미소를 생각한다. 그 중 한 사내가 말한다. '이보게들, 집으로 그냥 들어가기 섭하지 않나? 내 오늘 한 턱 쏘지!' '정말인가?' '암. 사나이가 이 정도 돈도 못 쓸까?'하며 실컷 너스레를 떨며 생색을 낸다. 그리고 술 한 잔을 친구들에게 돌린다. 그 술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내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지고 있는 풍경! 이런 오롯한 분위기가 친숙하고 포근한 그리움을 되살려 준다.

그는 비틀거리는 깜깜한 귀로에서 부인에게 댈 궁색한 변명거리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겠지.


태그:#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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