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 위해 전문가들이 한 곳에 모였다. '미국산 쇠고기 개방' 파동으로 인해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던 운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하천정비사업 우선추진' 발언 이후 논쟁이 재점화되는 분위기다.
23일 금요일 오후 1시 30분, 서울 고려대학교 생명과학관 오정강당에 모인 전문가들은 '한반도 대운하, 얻을 것과 잃을 것 토론회'를 열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날 토론에는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 홍종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등 10명의 관련 인사들이 참여했다. 하버드대의 컬크우드 교수(조경학과 학과장 겸 환경기술연구소 소장)도 참가해 목소리를 보탰다.
6시간이 넘게 진행된 열띤 토론의 현장을 재구성해 보았다.
[반대가 따져 묻다] '지구온난화해결 운하'에서 이제는 '4대강하천정비 운하'?첫 번째로 강단에 선 홍종호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낙동강 운하 우선 추진' 발언과 '단계적 추진 방안' 등 최근 급변하고 있는 운하 사업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과 찬성 측 사람들은 최근 운하에 대해 단계적 추진이니 치수사업이니 수질보전사업이니 등등 다양한 얘기를 쏟아내고 있다. 목적과 수단이 혼재된 상황에서 2년 동안 운하 문제를 유심히 다뤄온 나도 운하건설의 취지가 뭔지 정말 헷갈린다." 홍 교수는 발제 제목을 기존에 쓰던 '한반도 대운하, 경제적 타당성 없다'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한 한반도 대운하인가'라고 바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어 홍 교수는 "갑자기 치수사업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기 때문에 무엇을 두고 운하의 경제적 가치를 연구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정치권에서는 '대운하'란 이름을 잘못 지었다고도 하던데 운하는 이름이 아니라 사업 구상 자체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홍 교수는 또 운하 사업에 대한 정부 측의 '말 바꾸기'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사업이름] 경부운하 → 한반도대운하 → 낙동강운하(현재) [사업계획] 물류운하 → 관광운하 → 지역개발운하 → 지구온난화해결운하 → 수자원확보운하→ 4대강하천정비운하(현재) [추진방식] 전국 동시다발적 공사하여 4년 내 완공 → 단계별 추진 [물류효과] 5000톤 바지선 → 2500톤급 → 1000톤급 [민자유치]100% 민자(유일하게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계획) → "수자원 개선 운하"로 변하면서 100% 민자유치 불가능 [운행속도] 서울 - 부산 1주일 → 40시간 → 36시간 → 30시간 → 이론적으로는 2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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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교수는 "이러다가 나중에는 '남북한긴장완화운하'로 옮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며 "백지화가 최우선이지만 이게 힘들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하고 논의해야 하는데 이거마저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어 홍 교수는 "찬성 측의 '말 바꾸기'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요한다"면서 "반드시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 한반도 대운하 계획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운송시설 사업인가? 수질개선 사업인가? 치수 사업인가? 환경친화적 하천복원 사업인가?- 낙동강에 운하를 만들면 어떤 물동량이 구미·대구와 부산 간을 배로 오간다고 보는가? - 100% 민자사업이라는 애초의 계획은 포기된 것인가? (수질개선 사업은 공적인 사업)- 단계별 추진이라는 것이 결국은 한반도 대운하를 하겠다는 것인가? - 기존의 하천정비사업(2008년 총예산 1조 533억원)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밀어붙이기' 자제하고, 충분한 연구 통해 사업 자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의향은 없나?[찬성의 반박] "물류뿐 아니라 창의적 생활공간으로서의 운하다"
반대 측 교수들의 강한 문제제기에 대해 전택수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문화경제학)는 "경제성을 넘어 문화 기반의 창의적 생활공간으로서의 운하"란 논리로 반박에 나섰다. 물자수송뿐만 아니라 산업입지·물 관리·문화관광·생태환경 등 운하의 기능은 다양하다는 것.
"총체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1:1로 따지면 운하가 철도나 도로에 비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수송만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19세기적인 발상이다. 종합적으로 놓고 보면 수송은 운하의 5개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전 교수는 "운하 건설을 두고 한 가지 목적에 대해서만 논의하는 것은 사회적인 낭비"라며 "운하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목적으로 건설되어 왔으며 시대의 변화와 함께 건설 당시의 목적이 변화되어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 교수는 "축복이냐 재앙이냐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며 "선언적인 얘기만 되풀이하는 것은 패배주의적인 철학과 생활양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들어 반대 측의 태도를 비난했다.
"17C 말 홍양호·박제가 등이 수레 도입을 주장했다. 수레도입에 반대한 조선의 양반들의 논거는 '산이 많다', '길이 없다', '우마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운하 도입 반대 이유도 '산이 많다', '물이 없다', '땅이 좁다', '삼면이 바다', '하상계수 높다' 등 자연조건이다. '수레'에서 '운하'로 변했을 뿐 조선시대 때와 전부 똑같은 이유 아닌가."진 교수는 "결국 과학기술의 역할은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자연의 있는 그대로 다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을 어떻게 정복하고 다룰 것인가가 과학이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운하의 '관광성'을 강조하던 전 교수는 청중들에게 "돈벌이 팁을 주겠다"며 "운하를 건설하면 우리는 요트 생산 강국 될 것이다. 특수목적성 회사에 주식을 투자하면 분명히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합의] "수자원 개선은 민자사업 안 돼", "'운하 전문가' 100명 학자 없다"
그야말로 '난상토론'이었지만 서로간의 의견이 일치했던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홍종호 교수는 "정부의 계획 중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 100% 민자사업으로 운하 추진을 한다는 거였는데 '하천정비 운하'를 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이마저도 바뀐 것 같다"며 "하천정비는 이익창출사업이 아니라 공적인 사업인데, 이는 결국 정부 돈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냐. 해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의 조원철 연세대 교수(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는 "수자원 개선을 위해 건교부에서 쓰는 예산이 연간 약 1조5천억원 정도 되는데 이것을 민자로 한다는 거 자체가 문제"라며 "이것은 국가가 맡아야 할 중요한 하천사업이므로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이 바뀌어서 나도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또 홍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이 공언했던 '운하 추진을 위해 10년을 연구한 100명의 학자'도 없었던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찬성 측 학자도 인정한 사실"이라며 "연구기간도 기껏해야 1년 반 정도였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말했다.
조 교수도 "홍 교수가 말했듯 10년을 연구한 100명의 '운하 전문가'는 사실 없다"며 "이거는 100% 맞는 말"이라고 말했다.
[엇갈림] 찬성 학자 사이에 의견 갈려... 터널 안? 스카이 안?'운하는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찬성 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운하 추진 처방 안'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첫째로는 조령산맥 구간 공사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터널 안'과 '스카이 안'이 팽팽히 맞선 것.
조원철 교수: '터널 안'이 옳다. 스카이라인 방식은 높이가 너무 높다. 자연경관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이건 신뢰할만하지 않다.박석순 교수: 지속가능한 발전의 원칙에 의거하여 터널보다는 '스카이라인' 안으로 가야 한다.둘째는 '식수원 공급'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전택수 교수: 배 다니는 물을 못 마신다는 것은 무책임하다. 유럽은 다 마시지 않나.박석순 교수: 국민들의 정서상 배 다니는 물로 취수하기는 어렵다. 간접취수, 취수원 이전 등을 통해 1등급에 가까운 물로 수돗물 공급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날 토론회에 함께 참여한 하버드대의 칼크우드 교수는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체계적,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처리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며 "어제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좀 해봤는데 대운하 사업을 4년 안에 하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오전에 있었던 기조연설에서 "21세기의 대형 건설 공사는 체계적인 타당성 연구와 숨김없는 환경영향평가, 계획·설계과정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과 주민들의 참여, 지속적인 관리 감독 등이 필수적"이라며 "보스턴의 성공적인 지하차도 건설 프로젝트인 '빅 디그'(Big Dig)는 700회가 넘는 관련 단체 회의와 25년의 시간이 걸려 완공된 건설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토론회를 지켜본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반도 대운하' 찬반 투표에서는 총 139명 중 반대가 75표, 찬성이 28표, 입장유보가 26표인 것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