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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내가 애초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답사를 시작할 때는 연말까지 현장 답사를 모두 마치고 내년 2월말까지 연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때그때 글이 잘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회는 머슴 출신 안규홍 의병장 (2)로 이미 두 차례 답사도 마쳤고, 자료도 다 구한지라 지난 회에 이어 곧장 집필하려고 하였지만 일주일을 빈둥빈둥 지냈다.

 

이 기간은 대통령 선거 마지막 기간으로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까 도통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바, 산골 서생도 대통령 선거에 예외일 수 없었나 보다. 사실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것을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 산골 서생, 곧 글쟁이의 바른 임무가 아닌가.

 

세상만사가 그물코처럼 연결돼 있다. 일백 년 전에 의병들의 이야기와 오늘의 대통령 선거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듯하지만, 사실은 깊은 관계가 있다. 일백 년 전에 의병투쟁이 오늘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사는지 밝히는 게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의의이리라.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일찍이 사마천이 쓴 <사기>에 “집이 가난해 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하게 된다(家貧則 思良妻, 國亂則思良相)”라고 한 바, 나라가 태평스러울 때는 애국자들이 넘친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는 그 많던 애국자들은 사라지거나 오히려 그들이 매국노가 된 사실을 지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내우외환에 망해 가는 나라를, 외세에 침략당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낫과 죽창, 화승총을 들고 일어나 목숨을 바친 이는 그 잘난 애국자가 아니고 대부분 이 땅의 유생, 농사꾼, 포수, 상인, 군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구한말 안규홍(安圭洪) 의병장은 국록을 한 번도 먹은 적 없는 천민인 머슴이었다. 그는 1879년 4월 10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아버지 안달환(1826~1882)의 부실(副室, 첩) 정씨 소생으로 태어났다. 곧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정씨는 먹고살기 위해 어린 남매를 데리고 이웃 문덕면 법화마을에 사는 고종으로 부농인 박제현의 집으로 옮겨갔다.

 

안규홍은 어려서부터 담살이(머슴살이)를 하며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는 효자로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이 뛰어났다. 그가 어느 날 나무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마침 한 관리가 세금을 받으러 와서 방자한 행동으로 마을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세금을 받는 것이 너의 직책인데 어찌 마을 사람을 때리느냐? 이 마을에는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하고서는 마를 장정들과 그 관리를 결박하고는 혼내주었다. 그 이후에는 그 마을에는 다시는 그런 폐단이 없었다.

 

담살이에서 의병 전선에 투신하다

 

1905년 일제의 위협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규홍은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천장만 쳐다보며 탄식하자 곁에서 함께 자던 이가 그를 위로하며 세상 되는 대로 살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뿌리며 “차라리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오랑캐(왜놈)가 되어 살지 않겠다”하고 그는 담살이를 청산하고 의병 전선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길로 의병에 투신 안규홍은 전해산(全海山) ‧  심남일(沈南一)과 더불어 첫째가는 의병장이 되었다. 일제가 남긴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 다음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거괴(巨魁) 안규홍 보성군 봉덕면(현, 문덕면) 법화촌 31세, 융희 2년 4월 순천 부근을 점거한 강용언(姜龍彦)의 부장(副將)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떤 일로 해서 강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首魁)가 되어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郡)을 날뛰었다.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백 명을 넘었고, 전해산 ‧  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이다. 여러 번 관헌과 충돌할 때마다 교묘하게 체포를 면했고 악랄한 약탈을 자행…… .

 <전남폭도사 137쪽>

 

 

 

나는 일백 년 전 의병장들의 전적지와 그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울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 분들이 우리 현대사에서 희생만 된 채, 광복 후 단 한 번도 현대사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그늘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오래 전부터 일제 강점하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을 만나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며, 내 글을 읽은 젊은 세대들이 나라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사라질까 두렵다.

 

선열의 통곡이 들려오는 듯하다

 

온 나라를 말의 잔치로 몰았던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이제 끝났다. 나의 불만은 그동안 대통령이 17대까지 내려오면서 한두 번만이라도 의병전선에서, 만주벌판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투쟁을 한 선열이나 그 후손이 하였다면, 그래도 민족정기와 정의와 양심이 살아 있는 나라가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이다. 이는 나만의 불만이 아닐 것이다. 의병이나 독립투사 후손은 물론, 민족의 정의와 양심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안타까운 바람일 것이다.

 

이번 제17대 대통령선거는 온 나라가 ‘경제’ 타령에 함몰되어 그나마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만들어 놓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와 같은 기관들이 제대로 마무리도 못한 채, 허겁지겁 문을 닫게 되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다.

 

“과거에 얽매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는 새 정부의 목소리에 묻혀, 해방 후 단 한 번도 정리치 못한 채, 과거사를 또 다시 역사의 저편으로 흘러 보내지는 않을까 산골 서생은 몹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아마도 내년 봄에도 온갖 잡새들이 제 세상인 양, 더욱 날뛸 것이다. 민족을 반역하고도 해방 후 단 한 번도 단죄 받지 않고,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아왔으며, 교육조차 잘 받았으니, 매국노 후손도, 왜놈 밀정 후손도, 왜놈 순사나 군인 후손도 저마다 제가 가장 애국자라고 핏대를 세울 것이다.

 

벌써 내 귀에는 선열의 통곡이 들려오는 듯하다.


태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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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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