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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해도 너무 하오

지난 9일(일), 안규홍 의병장 전적지를 다시 찾고자 오전 9시에 담양 숙소를 떠났다. 이번에도 고영준, 고태석씨, 필자 세 사람이 일행이 되었다. 날씨가 아주 맑았다. 11시에 후손 안병진씨와 약속하였기에 시간이 충분하다고 한껏 늑장을 부리며 보성으로 달렸다.

우리 일행이 보성군 조성면에 이르렀을 무렵, 길가에서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차를 세웠다. 핸들을 잡은 고영준씨는 길도 물을 겸 차를 세워 태우자, 그분은 보성으로 가는 길이라면서 이 지방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10여 분 달린 후 조성면 장터 마을에 이르자, 노인은 거기서 멀지 않은 산 밑 마을이 은곡리라고 일러주고는 그곳에서 내렸다.

세상만사, "쉽게 얻으면 쉽게 잃어버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지난번 안병진씨를 찾아갈 때 조성면민회 정윤래씨 길 안내로 쉽게 찾아간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은곡리 어귀에서 주민에게 안병진씨를 찾자, 그는 은곡리 마을의 한 집을 가르쳐 주는데 낯익은 집이 아니었다. 뒤에 알았지만 동명이인이었다.

그제야 기록을 확인하자 조성면 은곡리는 안규홍 의병장 묘소 지번이요, 후손 안병진씨가 사는 마을은 조성면 덕산리였다. 이 모두가 기록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안규홍 의병장 묘소로 가는 오솔길
 안규홍 의병장 묘소로 가는 오솔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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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잘못 든 길, 어차피 먼저 묘소를 찾기로 하였던바, 우리끼리 묘소에 절이라도 드리려고 몇몇 주민에게 물었으나 모두들 위치를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이 오늘날 의병장들이 대접받는 현실이라고 두 고씨는 개탄했다. 그곳에서 30여 분 헤매다가 하는 수 없이 안병진씨에게 전화를 걸자, 곧장 아들의 차를 타고 달려와 묘소로 안내했다.

묘소에 오르는 길조차 오솔길로 갈잎이 수북이 쌓였다. 묘소에 이르자 언저리 봉분이 나무에 그늘이 지고 의병장의 묘소라고 하기에는 초라했다. 구한말 호남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안담산 의병장은 살아서도 담살이로 천대받았고, 나라를 위해 죽어서도 이런 푸대접인가. 우리 일행은 ‘의병대장담산안공지묘(義兵大將澹山安公之墓)’ 묘소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안 형, 보성 군수나 군 의원을 찾아가서 실정을 말하고 묘지 정화사업이라도 부탁드려요. 누구 땜시리 나라를 찾고 자기들이 녹을 먹고사는지도 모르고…. 정말 해도 너무 하오.”

고영준씨가 안병진씨에게 단단히 일렀다.

언저리 나무에 그늘진 안규홍 의병장 묘소
 언저리 나무에 그늘진 안규홍 의병장 묘소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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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 의병부대의 조직

1907년 전후로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안규홍이 머슴을 살고 있던 보성 법화마을에도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안규홍은 평소 마음속에 품어왔던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할 생각을 동료에게 밝혔다.

그 무렵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안규홍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머슴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수십 년 동안 근간히(부지런하고 성실히) 고용하여도 삯 전(임금)을 받지 아니하고, 매우 신실하기에 주인이 사랑하며, 이웃동네에까지 칭찬이 자자하더니 지난해 9월, 갑자기 주인을 하직하는지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가더니, 근처에 있는 머슴 일백여 명을 모집하여 연설하며 말하기를, '비록 우리가 남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랏일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하고, 의병을 일으켜 호남 남일(심남일)파와 합세하였다고 하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 자 ‘머슴꾼 의병’(알기 쉽도록 고어를 현대어로 고쳤음)

안규홍을 따르는 자가 까마귀 떼가 몰리듯 하였지만 대부분 머슴이나 가난한 농사꾼들로, 그들이 가진 것은 고작 호미나 괭이와 같은 농기구를 가졌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유생들은 그와 함께 창의하는 걸 수치로 알 정도였다.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은 곧 재정적 후원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관동인 강용언(姜龍彦; 이명 姜性仁) 의병 부대가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진압을 피해 전라도 순천 일대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안규홍을 기꺼이 맞아들여 부장(副將)에 임명하였다.

강용언 의병장에게는 토착 의병 안규홍의 가세가 현지 지리에 어두운 약점을 보완해 주고, 또한 지역 농민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해결해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강용언 의병장은 듣던 바와는 달리 주민의 재물을 탐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인데, 일도 하기 전에 재물을 탐하고 백성에게 포악한 짓만 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안규홍은 강용언 의병장을 꾸짖었으나 듣지 않으므로 그를 즉결 총살하였다. 의병장 강용언이 제거되자 비로소 군기가 바로 잡혔다. 강용언을 제거한 안규홍은 여러 부하의 추대로 마침내 의병장이 되었다.

안규홍은 서울에서 내려온 해산군인 오주일(吳周一) 등 수십 명을 포섭하여 항일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곧 대장 안규홍을 비롯한 토착 농어민 출신은 지리에 밝고, 지역주민과 일정한 연고를 맺고 있으며, 관동의병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오주일 등 해산군인들은 전술 전략에 이론과 실제를 골고루 갖췄기 때문이었다.

보성군 문덕면 법화마을과 동소산
 보성군 문덕면 법화마을과 동소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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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안담살이 의병부대는 막강한 의병부대로 1908년 음력 3월 무렵, 그가 머슴살이를 하던 법화마을에서 가까운 동소산(桐巢山)에서 창의의 깃발을 드높였다. 당시 안규홍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의 이름이 <담산실기(澹山實記)> ‘가상(家狀)’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비로소 의병의 깃발을 들고 염재보(廉在輔)로 부장(副將)을 삼고, 이관회(李貫會)로 선봉장(先鋒將)을 삼고, 임병국(任秉國) ‧ 손덕호(孫德浩) ‧ 정기찬(鄭基贊) ‧ 장재모(張載瑁) ‧ 송경회(宋敬會)로 좌우익(左右翼)을 삼고, 안택환(安宅煥) ‧ 소휘천(蘇輝千)으로 후군(後軍)을 삼고, 오주일(吳周一) ‧ 나창운(羅昌運)으로 참모(參謀)를 삼고, 임정현(任淨鉉)으로 서기(書記)를 삼고, 박제현(朴濟鉉)으로 운량관(運糧官)을 삼았다."

안담살이 의병부대의 등장은 신분적인 갈등보다는 항일투쟁을 위해서라면 모든 계층이 서로 협력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머슴출신이 이끄는 평민 의병부대에 비로소 양반 유생들이 가담한 획기적인 창의의 깃발이었다. 

안규홍 의병장이 20여 년 담살이를 하였고, 안규홍 의병부대가 창의의 깃발을 날린 법화마을 들머리.
 안규홍 의병장이 20여 년 담살이를 하였고, 안규홍 의병부대가 창의의 깃발을 날린 법화마을 들머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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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와 <안담실기>,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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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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