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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에 다녀왔습니다. 예년만 못한 단풍이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가을 산은 아름다웠습니다. 여섯 명의 동행이 있었습니다. 제가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그들의 뒷모습만을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왜 뒷모습만 찍었는지 아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겨울 방학 때 이곳에 한 번 더 오자고 했습니다. 그때는 앞모습도 찍자고 했습니다. 아이들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꼭 그러자고 서로 약속을 했습니다.


제 앞에서는 한없이 순한 양 같은 아이들이 급우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학생부에서 조사한 내용을 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울컥 미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움과 저주만으로는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슨 말로 아이들의 잘못을 깨우칠 것인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가장 나쁜 짓이라고,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런 상투적인 말로는 아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막막했습니다. 너무도 막막한 마음에 저는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울먹이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하니 내가 대신 운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길이 열리곤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상담실로 데려가 진실게임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을 테니 꾸며서 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한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께 죄송하고요, 면목이 없고요…."


그것은 물론 제가 원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부탁했습니다.


"선생님께는 그렇고, 네가 힘들게 한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말해봐. 솔직하게, 좋게 말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러자 그 아이의 입에서 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단어가 흘러나왔습니다.


"죄책감이 느껴졌습니다."


"죄책감? 그런 감정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니?"
"아니요."


"그럼 처음이란 말이야?"
"예."

 

다른 아이들에게도 변화가 온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괴롭힌 급우들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그들을 데리고 가을 산을 찾은 것은 그들이 보여준 변화가 감상적인 수준에서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아이들을 모릅니다. 다만, 그들에게 매를 댄 적이 없지만 한 번도 제 지도에 불응한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은 아이들에게 인격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제가 아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산을 오른 여섯 명의 아이들 중 두 명의 아이가 어제 학교를 떠났습니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했습니다. 저녁 무렵, 그 중 한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죄책감을 느꼈다는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선생님, 애들에게 사과하고 싶어요. 그래서 내일 학교 가려고요."

 

오늘 아침 아이가 학교에 왔습니다. 반 아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그것이 나쁜 짓인 줄도 모르고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그러니 용서해달라고, 너희들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울먹이며 말을 이어가다가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아이가 흘린 눈물이 너무도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저는 아이를 떠나보내며 인생을 길게 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어깨를 한 번 힘껏 껴안아 주었습니다. 마음이 슬프지만은 않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마음을 되찾았으니까요. 아이와 함께 걸었던 가을 산길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태그:#가을,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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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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