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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서울 동교동에 자리한 '글벗서점'에 찾아갔습니다. 이날 여러모로 재미있고 도움되는 책을 본 한편,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 준 책손을 보았습니다.

먼저, 나이 예순 안팎이 되었음직한 신사 한 분. 이분은 5000원에 파는 어느 음악 관련 전문책 하나를 ‘뭐 이리 비싸게 받느냐?’면서 ‘내가 청계천에 가면 이런 책을 얼마나 싸게 사는데’ 하고 이야기합디다. ‘청계천에 가면 싸게 사는데, 오늘 이렇게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덧붙입니다.

그렇다면, 헌책방 임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데에서 싸게 파는 책이니, 이곳에서도 그 값을 맞추어서 팔아야 할까요. 바쁘신 분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 헌책방 한 곳을 찾아와 주셨는데, 마땅히 싸게 넘겨야 할까요.

뭐, 할인매장에서 싸게 판다고 구멍가게에서도 똑같은 값에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실 분들한테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같은 물건이라도 백화점에서는 더 비싸게 부르는 값을 놓고 항의 한 번 안 하시는 분들한테도 더 드릴 말씀이 없고요.

헌책방에서 책을 살피다 보면, 책에 발을 올려놓고 읽는 사람을 드문드문 봅니다. 어른이 이렇게 한다면 참으로 얼빠진 사람이고, 아이가 이렇게 한다면, 아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의심할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책을 다루는 기본 예의를 모르니까요.
▲ 책 읽는 발 헌책방에서 책을 살피다 보면, 책에 발을 올려놓고 읽는 사람을 드문드문 봅니다. 어른이 이렇게 한다면 참으로 얼빠진 사람이고, 아이가 이렇게 한다면, 아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의심할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책을 다루는 기본 예의를 모르니까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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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손님 한 분. 저보다 적어도 대여섯 살은 훨씬 어린 듯한 아가씨. 저보다 먼저 들어와서 책을 구경하셨는데, 이런저런 실랑이 소리가 있건 말건 자기 볼 책을 차분하게 보더니, 책값 2만1천원을 카드로 긁고 나갑니다.

요리책을 중심으로 사 가시는데, 책값을 놓고 헌책방 아주머니하고 한두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하고 선선히 받아들여 줍니다. 2시간쯤 책 구경을 하며 책을 고르고 나가면서도, 책방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잡지책에도 눈길을 두며 발을 떨어뜨리지 못합니다.

문득, 집이나 일터에서 ‘어른’ 대접을 받을 그 신사 분은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 분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 어른과 견주면 딸내미 나이에서도 좀 모자랄 만한 젊은 아가씨는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 분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헌책방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헌책방에는 어떤 책이 들어올까요. 헌책방에 헌책 한 권 들어오기까지 어떤 사람들 손을 거칠까요. 헌책방 일꾼들은 얼마나 힘을 기울여서 일할까요. 이런 대목은 얼마나 생각해 볼 만하며, 책 한 권을 살 때 이러저러한 헌책방 얼거리와 둘레 삶터는 얼마나 생각해 보면 좋을까요.

흔히들 하는 말로, 헌책방 임자는 고물상 같은 곳에서 헐값에 사들인 책을 우리들한테 비싸게 판다고들 합디다. 우리들이 책을 사러 가면 똥값에 쳐 주면서, 책을 팔 때에는 바가지를 씌운다고들 합디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해 보지요. 밥집에 가서 밥을 사 드신 적 있는가요. 당신이 밥집에 가서 사먹는 그 밥 한 그릇 원가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횟집에 가서 사먹는 그 회 한 접시 원가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옷집에 가서 사입는 옷 한 벌 원가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모든 곳에는 모든 일꾼들 손때와 다리품이 들어갑니다. 횟집에서는 어시장에서 아주 싼 값에 물건을 떼오겠지요. 옷집에서는 천가게에서 천을 아주 싼 값에 떼 와서 옷을 지어 팔겠지요. 헌책방 임자도 고물상이든 개인한테는 싼 값에 책을 사들일 테고요. 그러나 여기에는 이 모든 곳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 품과 시간과 마음이 배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과 사랑이 배이지 않은 밥 한 그릇은 맛도 없지만 값도 비싸게 느껴집니다. 피와 땀과 눈물과 사랑으로 지어내지 않은 옷 한 벌은 그저 바가지만 씌운다는 느낌일 뿐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과 사랑으로 캐내고 손질하고 꽂아 놓아 파는 헌책이 아니라면 이와 마찬가지일 테지요.

지난달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1960년에 나온 손바닥책 96권을 장만했습니다. 이 손바닥책을 읽고 간직하신 분은 아주 깨끔하게 아껴 주셨더군요. 책마다 손때며 애틋함이며 고이 묻어 있었습니다. 헌책방에서 헌책 하나 제대로 대접할 수 없는 분들 마음가짐이라면, 도서관에서도 새책방에서도 똑같은 매무새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껍데기가 조금 헐어 보인다고 얕보는 사람한테는, 깊은 속을 들여다보는 고운 마음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 잘 읽은 책 지난달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1960년에 나온 손바닥책 96권을 장만했습니다. 이 손바닥책을 읽고 간직하신 분은 아주 깨끔하게 아껴 주셨더군요. 책마다 손때며 애틋함이며 고이 묻어 있었습니다. 헌책방에서 헌책 하나 제대로 대접할 수 없는 분들 마음가짐이라면, 도서관에서도 새책방에서도 똑같은 매무새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껍데기가 조금 헐어 보인다고 얕보는 사람한테는, 깊은 속을 들여다보는 고운 마음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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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 몫입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헌책방 한 곳에서는 얼마나 피와 땀과 눈물과 사랑을 들여서 헌책 하나를 갖출까요. 유기농 곡식을 사먹으려고 곡식 하나에 비료가 들어갔는지 농약이 들어갔는지 따지는 그 마음씀처럼, 우리가 사읽는 헌책 하나에는 헌책방 일꾼들 손품과 다리품과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배였는지를 헤아려 보면 어떻겠습니까.

알아야 믿을 수 있고, 알아야 사랑할 수 있잖아요. 헌책 하나 다듬으려고, 헌책 하나 손보며 가꾸려고, 헌책방 일꾼이 얼마나 많은 힘과 시간과 품을 들이는지 알아야, 비로소 우리가 찾아가는 헌책방에 가득가득 쌓인 책이 허투루 쌓인 책이 아님을, 저마다 고유한 책임자가 언젠가는 나타날 것임을, 이 모두 헌책방 임자한테는 딸아들처럼 소중한 보물임을, 내가 아니더라도 책 값어치를 알아보고 온돈 들여서 책값을 치를 사람이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책 하나 아낄 수 있는 마음이라면 무엇일까요. 책은 종이에 찍힌 글자를 읽으며 줄거리를 헤아리고 중심슬기를 잡아채도록 이끌어 주는 벗입니다. 겉이 좀 헐더라도 속이 허술할 수 없는데, 책 하나 마주하면서 껍데기에 매인다면, 그리고 껍데기 때문에 책을 얕보거나 깎아내린다면,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이, 책을 읽어서 좋아질 일이 있을까요.



태그:#책읽기, #헌책방, #책, #손때, #다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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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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