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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아침이 깃든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시간, 세상은 아직 기침 전이다.
▲ 정선의 아침 산촌에 아침이 깃든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시간, 세상은 아직 기침 전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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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출발지는 강원도 정선. 남들은 아라리 가락이 스며있는 정선으로 여행을 오지만 이곳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곳을 탐한다. 아무리 풍광 좋기로 소문난 곳이 정선이라지만 산촌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겐 이곳이 지긋지긋한 생활의 터전일 뿐이다.

날선 일상을 잊기 위해 떠난 여행지, 동해바다

고단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 가을 날에 만나는 동해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지난 월요일(22일)이었다. 쪽빛의 바다 앞에서 세상과 쉬 교감하지 못하는 날선 성정을 탓하고도 싶었다.

정선에서 강릉까지는 1시간 남짓. 비포장일 때만 해도 3시간이 넘게 걸리던 길이었다. 세월 좋아진 탓에 강릉 가는 길이야 가까워졌지만 속도가 빨라진 만큼 놓치고 가는 것들이 많아졌다.

단풍 길인 삽답령을 넘으면 강릉시 왕산면이다. 고려말 비운의 왕인 우왕이 이성계를 피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왕산(王山)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지명마저 눈에 거슬렀던지 왕산(旺山)이라고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반세기가 넘었어도 일제에 의해 뒤틀려진 지명을 바로잡지 않았다.

왕산을 지나면 성산이다. 강릉엔 유독 '산'으로 끝나는 지명이 많다. 지나온 길인 왕산과 성산 외에도 회산, 구산, 삼산, 금산, 학산, 두산, 병산 그리고 홍길동을 쓴  허균의 호가 된 교산까지.

일제가 왜곡한 지명, 아직도 고쳐지지 않아

성산을 지나 곧 바로 달리면 바다가 나온다. 강릉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바다가 아무리 손짓해도 그 곳 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행도 원기가 있어야 힘이 들지 않는 법. 여행자의 허출한 배를 채워주는 곳은 순두부촌으로 유명한 초당 마을이다. 허균의 아비인 허엽의 호인 초당이 마을의 지명이 된 곳이지만 초가지붕은 만날 수 없었다.

허균과 난설헌의 생가터라고 알려진 집은 가을을 맞아 고즈넉하다. 여행자는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는 음식점 마당으로 들어갔다. 오전 9시 30분. 아침이라기에는 늦은감 없지 않고 점심이라 하기엔 턱없는 시간이다. 순박하게 생긴 안주인이 내어 준 순두부는 맑고 고소하다.

여행자는 순두부 한 그릇으로 빈 속을 채우고 길을 다시 떠난다. 어디로 갈까. 강릉에 닿으면 바다는 어느 방향으로 가도 만날 수 있다. 근처에 있는 경포는 식상하다. 횟집 총각들이 회 한 접시 먹고 가라며 갈 길을 막는 것도 귀찮은 날이다.

안목항에 있는 빨간등대와 하얀등대. 두 개의 등대가 배를 안전하게 인도한다.
▲ 안목항 안목항에 있는 빨간등대와 하얀등대. 두 개의 등대가 배를 안전하게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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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도 배가 든든해야 한다. 굳이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아도 안목항에서는 식사가 해결된다.
▲ 낚시 삼매경 낚시도 배가 든든해야 한다. 굳이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아도 안목항에서는 식사가 해결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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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끝까지 간다면 울산을 지나 부산까지 이르는 길. 반대 방향으로 가면 양양을 지나 속초와 고성까지 갈 수 있다. 송림이 우거진 길을 지나 잠시 내려가니 마을과 함께 백사장이 나타났다. 백사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항구. '안목항'이었다.

안목의 원래 지명은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라 하여 '앞목'이었다. 그 지명을 '안목'으로 바꾼 것 또한 일본인들이었다. '앞목'이라는 발음이 되지 않던 그들은 그저 부르기 편하게 '안목'으로 하고 말았다. 받아쓰기가 전혀 되지 않았던 일제는 우리 땅의 이름을 그렇게 왜곡했다.

안목항에서 차를 세웠다. 사람이 떠난 백사장은 갈매기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인공으로 만든 방파제는 바다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거센 파도로부터 방파제를 보호하기 위해 놓아둔 테트라폿은 기형으로 태어난 불가사리처럼 보인다.

동해바다에서 만난 작은 풍경, 안목항과 사람들

방파제를 따라 걸었다.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비릿한 소금기도 여느 때보다 덜했다. 가을빛은 오른쪽 뺨을 흘러내렸다. 하늘은 푸르렀지만 먼 바다는 해무로 자욱했다.

방파제 끝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항구로 들어오는 뱃길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두 개의 등대가 없다면 아무리 만선을 한 배라 할지라도 항구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백사장이 갈매기들의 놀이터가 되었다면 방파제를 둘러싼 테트라폿은 낚시꾼들의 차지다. 낚시꾼들은 테트라폿 하나씩을 차고 앉아 짜릿한 손맛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낚시 경험이 전무한 여행자는 그 즈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낚시에 걸려 힘차게 퍼득이는 기막힌 장면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낚시꾼들은 낚시를 바다에 던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바다만 응시할 뿐 미끼도 없는 빈 낚시대를 들고만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여행자가 한 낚시꾼에게 낚시대를 바다에 던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고기들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중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내참, 고기가 있어야 낚시를 던질 거 아뇨."

낚시꾼의 말에도 여행자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꾸만 물어보는 것도 실례다 싶어 자리를 떴다. 한참을 걷다보니 방파제 난간에 배가 갈라진 바다고기 한 마리가 걸려있었다. 연붉은 빛을 띤 바다고기는 햇살을 받으며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무슨 고기일까.

"연어네요."

혼자 중얼거린 말을 지나치던 이가 받았다. 연어라는 바다고기를 요리로만 보았지 실제로 만나긴 처음이었다. 언뜻 보아도 70cm는 되어 보였다. 이렇게 큰 놈을 잡은 사람이 누구일까 짐작해보지만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낚시꾼들의 표정만으로는 연어의 주인을 찾아내기란 힘들었다.

연어 떼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낚시꾼. 연어가 나타나면 바빠진다.
▲ 연어를 기다리는 사람 연어 떼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낚시꾼. 연어가 나타나면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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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어나갔던 배가 안목항으로 돌아오고 있다.
▲ 항구로 돌아오는 어선 출어나갔던 배가 안목항으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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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곳곳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낚시에 걸린 바다고기들이 마지막으로 토해낸 생의 흔적들이었다. 안목항에 낚시꾼들이 많은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행자는 낚시꾼들을 지나쳐 등대로 갔다.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등대는 방파제의 끝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낚시의 천국인 안목항

출어를 나갔던 배들이 햇살로 부서지는 바다를 가르며 항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를 마중나가는 것은 선장의 가족이 아니라 갈매기들이었다. 갈매기들은 배가 항구에 정박하고서야 백사장에 내려 앉았다.

빨간 등대엔 바다가 만들어낸 사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작심하지 않고서는 남길 수 없는 글들. 영원을 꿈꾸는 이들이 남긴 사연을 읽으면서 청춘의 시절을 떠올렸다. 여행자가 어디엔가 남긴 글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저 이루지 못한 낚서로만 기억될 뿐이다.

등대에서 쉬고 있는 가족들을 만났다. 경기도 오산에서 왔다는 두 가족은 하루 전날 동해바다로 왔다고 한다. 남편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낚시를 하고 있단다. 남편이 낚시를 하고 있는 동안 부인네들은 심심하다며 칭얼대는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무슨 고기를 잡았다고 해요?"
"망둥어만 잡힌데요."

부인네들은 합창을 하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부인네들의 남편이 있다는 곳으로 가보았다. 그녀들의 남편은 다른 이들과 달리 방파제 안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았다. 실력이 좋은 건지 세 사람은 번갈아가면서 망둥어를 낚아 올렸다.

남편들은 손 맛을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등대에 있던 아이들은 심심하기 그지 없었다. 놀이기구 하나 없는 바다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빨간 등대도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아이들의 칭얼거림을 견디지 못한 부인네들은 남편들에게 숙소에 가 있겠다며 자리를 떴다.

아이들이 떠나자 여행자는 등대에 몸을 기대었다. 편안했다. 어디엔가 등을 기댈 수 있는 삶이란 희망이 있어 좋다. 등대에 귀를 대어 보았다. 귓전으로 무슨 소리인가 전해지지만 해독 불가능한 언어다.

안목항에 있는 빨간등대. 연인들이 즐겨찾는다.
▲ 빨간등대 안목항에 있는 빨간등대. 연인들이 즐겨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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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에 남긴 연인들의 사연. 사연이 이루어지길...
▲ 특별한 낙서 등대에 남긴 연인들의 사연. 사연이 이루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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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등대에 기대어 있었다. 한 없는 자유를 느꼈을까.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여행자는 고단했던 몸을 풀며 눈을 감고 귀도 닫았다. 느껴지는 바람의 느낌만으로도 세상 속에서 받은 상처가 아무는 듯 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웠던 강한 분노도 서서히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안목항에서 만난 철 지난 유행어 "자장면 시키신 분~"

여행자의 평온함을 깬 것은 오토바이 소리였다. 방파제를 달려온 오토바이는 여행자 앞에서 브레이크를 잡았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사내의 손엔 철가방이 들려있었다. 그는 방파제를 이리저리 살피며  "자장면 시키신 분~"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본 여행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파제에서 자장면을 시켜먹다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사내가 몇 번 더 소리치자 방파제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이들이 이쪽이라며 대꾸를 했다. 철가방을 든 사내가 그들을 찾아 내려갔다.

'낚시꾼들이 어떻게 자장면을 시켰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 여행자의 시야에 재미있는 풍경 하나가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테트라폿에 적혀있는 자장면 집의 전화번호였다. 낚시꾼들을 위한 배려인지 마케팅 전략인지 알 수는 없으나 여행자의 기분을 즐겁게 하기엔 충분한 풍경이었다.

등대를 떠나 방파제를 걸었다. 그 순간 바다만 응시하던 낚시꾼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낚시를 던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난간을 넘었다. 낚시꾼들은 던진 낚시를 힘차게 감았다. 빈 낚시만 감아올린 이들은 "에이, 또 놓쳤네!"하며 허탈해 했다. 그들이 다시 바다를 응시하는 사이 바다고기 한 마리가 방파제로 날아올랐다.

낚시를 지켜보던 이들이 퍼득이는 바다고기로 몰려들었다. 여행자도 뛰듯 현장으로 갔다. 무슨 고기냐 물으니 연어라고 한다. 연어를 낚아 올린 낚시꾼은 낚시를 두어 번 더 던지고 나서야 나타났다. 그는 준비해온 칼로 즉석에서 연어의 배를 갈랐다.

연어를 따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 자장면을 배달하는 이도 있다. 그는 하루 100그릇 이상 안목항으로 배달을 나온다고 한다.
▲ 구경꾼들 연어를 따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 자장면을 배달하는 이도 있다. 그는 하루 100그릇 이상 안목항으로 배달을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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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이 낚아 올린 연어. 알이 가득하다.
▲ 연어알 낚시꾼이 낚아 올린 연어. 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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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는 암놈이었다. 알을 가득 품은 연어는 그때까지 살아있었다. 누군가 연어 알이 몸에 좋다고 말한다. 그 말에 구경꾼 하나가 나선다. 여행자도 손을 펼쳐들었다. 주먹만한 연어 알 덩어리가 손바닥에 놓여졌다. 어떻게 먹냐고 물으니 그냥 먹으면 된다고 한다.

안목항에서 맛 본 싱싱한 연어 알 맛 잊혀지지 않아

여행자는 연어 알 덩어리를 입에 넣었다. 톡톡터지는 연어 알은,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없는 기묘한 맛이다. 감미로우면서도 끈적했고, 끈적하면서도 끝 맛은 짭짜롬했다. 어떤 이는 민물낚시 미끼로 쓰기 위해 연어 알을 챙기기도 했다.

그날 안목항에서 본 연어만도 10여마리가 넘었다. 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바늘은 '훌치기'라고 하는 것으로 연어 떼가 지나가는 곳에 낚시를 던져 재빨리 감으면서 잡는 방법이었다. 안목항에서 만난 낚시꾼들은 숭어를 잡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그날 숭어를 낚아 올린 이는 없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연어 알은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그 맛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맛을 여전히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여행자의 언어부재가 한탄스러울 뿐이고, 그날 안목항을 지나가던 연어는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갔다.

가을날에 만난 동해바다는 여전히 안녕했고, 등대에 남긴 이들의 사연도 이 순간까지 영원하다. 입 안에 기억된 연어 알의 향기는 산자락에 핀 산국보다 강렬하고 구절초보다도 은은하다. 가을 날 동해바다에서 만났던 모든 풍경들에게 감사하고 죽어간 연어에게 미안한 저녁이다.

낚시꾼이 잡은 연어를 걸어놓았다.
▲ 연어 낚시꾼이 잡은 연어를 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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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태그:#안목항, #연어, #바다낚시, #등대, #초당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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