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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옥션 시장에 경매품으로 나온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
 미국 옥션 시장에 경매품으로 나온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
ⓒ 헤리티지 옥션 갤러리(www.h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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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체 게바라(1928~1967)의 사망 40주기를 맞아 쿠바 산타클라라시에서는 추도식이 열렸다.

연간 20만명의 추모객이 찾는 체의 묘지 앞에는 이날 하루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에게 체는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였다. 못다한 혁명가의 꿈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각 미국에선 그 꿈을 이용한 행사가 벌어졌다. 1967년 체가 볼리비아에서 체포돼 처형되기 직전 잘린 머리카락이 경매에 올랐다. 시작가 5만달러. 40주기 추도식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옥션 갤러리 "머리카락 경매가 어때서? 경매 중단 않을 것"

미국 댈러스시에 본사를 둔 '헤리티지 옥션 갤러리'는 8일 "남미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을 경매품으로 등재했다"며 "고객들은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 홈페이지 등을 통해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업체의 홍보 담당자인 켈리 노윈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경매품은 쿠바 혁명 이후 쿠바를 탈출해 현재 플로리다 마이애미시에 살고 있는 구스타보 빌로도(71)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며 "미 중앙정보국(CIA)이 1967년 볼리비아군과 함께 체 게바라를 검거할 당시 그는 CIA에 고용된 첩보원이었으며, 체의 매장 직전에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해 왔다"고 밝혔다.

체의 머리카락이 경매품으로 등장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 업체에는 항의 전화와 메일이 폭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윈씨는 "많은 항의가 있었고 그 중에 협박에 가까운 항의도 있었다"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체의 머리카락을 파는 것이 그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윈씨는 "경매를 중단할 계획이 없다"며 "협박성 항의를 경찰에 고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자체 보안만 강화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이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우리 단골 고객 중에 체의 머리카락에 벌써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며 "갈수록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업체는 이날 체의 머리카락과 함께 다른 경매품도 들고 나왔다. 업체 측에 따르면 체가 체포될 당시 신분 확인을 위해 지문 2장이 채취됐다. 그 중 한 장은 현재 쿠바 정부가 갖고 있지만, 빌로도씨가 갖고 있던 나머지 한 장이 이날 경매품으로 선보인다고 업체는 밝혔다.

이밖에 볼리비아군이 체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지도, 체와 그의 부하들 사이에 오고 간 메모들, 사망 직후 체의 시신 사진 등이 함께 경매품으로 올랐다.  

미국 옥션 시장에 경매품으로 나온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과 다른 소장품들.
 미국 옥션 시장에 경매품으로 나온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과 다른 소장품들.
ⓒ 헤리티지 옥션 갤러리(www.h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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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살인자일 뿐... 머리카락 파는 데 아무런 갈등도 없어"

1967년 체 게바라가 사살될 당시 미 CIA의 첩자로 활동하며 체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해 왔다는 구스타보 빌로도(71)씨. 자신이 직접 찍었다며 체의 시신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1967년 체 게바라가 사살될 당시 미 CIA의 첩자로 활동하며 체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해 왔다는 구스타보 빌로도(71)씨. 자신이 직접 찍었다며 체의 시신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마이애미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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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체의 머리카락을 경매품으로 내놓은 장본인인 빌로도씨는 9일 <마이애미헤럴드>와 한 인터뷰에서 "체의 머리카락을 경매품으로 내놓는 데 아무런 도덕적 갈등도 없었다"고 말했다.

빌로도씨는 "그의 물품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고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그런 비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이나 남미 국가에서 제기돼 온 것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쿠바가 뭐라 하든 내 뜻대로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쿠바에서 카스트로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자살로 내몰렸다는 빌로도씨는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체를 영웅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살인자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빌로도씨에게 체는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전범 재판을 담당하며 이전 바티스타 군부 정권의 사람들을 처형한 장본인에 불과하다.

빌로도씨는 "올 초까지만 해도 내가 체의 물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영원히 비밀로 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1997년 쿠바 정부는 다른 6명의 부하들과 함께 체가 묻힌 곳을 찾았다며 체의 시신을 볼리비아에서 자기 나라로 옮겼다, 이후 쿠바는 계속 거짓 정치 선전에 체를 이용해 왔다, 이를 보고 체의 물품을 공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빌로도씨는 자신이 직접 체의 시신을 쿠바 정부가 밝힌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그의 부하 2명과 함께 묻었다고 주장했다. 빌로도씨는 경매 관련 협박성 항의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적이 체의 머리카락을 사갈까 봐 걱정하는 것뿐"이라고 항의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한국 언론들에게까지 욕본 체 게바라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 경매 진행 상황. 5만 달러로 경매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 경매 진행 상황. 5만 달러로 경매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 헤리티지 옥션 갤러리(www.h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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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40주기 관련 국제 뉴스를 전하면서 한국의 일부 언론들도 체에 대해 빌로도씨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는 '혁명가 체 게바라 이젠 이미지 상품'이라는 9일자 기사에서 "정작 체가 공산혁명을 꿈꿨던 남미에서 그는 좌파 정권에 이용당하는 정치적 상징이 됐다"고 썼다. <조선>은 영국의 한 시사주간지가 체를 "모터사이클을 탄 스타 혁명가, 투쟁에 지친 제임스 딘"이라고 한 것을 소개했다. 베레모를 쓴 체의 유명한 사진이 오늘날에는 재떨이에까지 찍힌다며 체는 이미지 상품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 신문은 쿠바에서 열린 체의 추도식에 자발적으로 모인 수만 명의 인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남미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체의 40주기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가 체의 처형지인 바예그란데 마을에서 "체는 여전히 살아 있다"며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변할 때까지 체의 영웅적인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는 다른 외신 내용도 물론 없었다.

같은 날짜 <중앙일보> 신예리 기자도 쿠바 망명객들의 체에 대한 혹평을 소개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신문은 쿠바 출신 학자 훔베르토 폰타바가 올 봄 펴낸 <체 게바라의 실체를 폭로한다>는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소개했다. '체는 혁명 성공 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재혼하고 호화 저택에서 귀족같이 살았다, 체는 양민을 가차 없이 살해한 냉혈한이었다, 체는 전투에 무능했다' 등의 책 내용을 여과 없이 전했다.

하지만 이 신문은 혁명 성공 후 체가 쿠바의 산업부 장관 등을 지내며 미국의 거부 록펠러 등과도 교류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장관 시절 보수를 거의 받지 않았고, 사탕수수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직접 사탕수수를 수확했으며, 쿠바인들에게 허물없이 '체(친구)'로 불렸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

체 게바라(오른쪽)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오른쪽)와 피델 카스트로.
ⓒ 황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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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체의 처형은 유럽 68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에 종속돼 가던 유럽 지성들의 대 각성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선봉에 섰던 장 폴 사르트르는 체를 "이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칭송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평가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의 평가와 달리 체의 초지일관한 삶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체는 1900년대 초반 선진국 대열에 끼어 있던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의학도로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청년은 1951년 '라 포데로사'라는 500cc 모터사이클을 타고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한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일기를 적으며 체는 남미의 찢어질 듯한 가난을 체험하고 의학도로서 삶을 버린다.

이후 과테말라 혁명을 거쳐 1955년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 쿠바 혁명에 가담한다. 1956년 쿠바 게릴라 전투에서 응급처치 약통 대신 쓰러져 가는 전우의 총을 잡으며 용감무쌍한 게릴라로서 입지를 다진다. 1959년 쿠바혁명 성공 이후에 체는 토지개혁성 장관, 국립은행장, 산업부 장관 등의 요직을 거친다. 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비롯한 중요 국면에서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1964년 UN연설 등을 통해 대외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피델 카스트로에 이어 자타가 공인하는 쿠바의 2인자였지만 1965년 체는 아무도 모르게 쿠바에서 사라졌다. 이후 2~3년 동안 체는 자신의 거처를 철저히 숨겼다. 이 기간 체는 "또 다른 전선을 찾아간다"는 편지를 카스트로 앞에 남긴 채 콩고혁명에 가담하고 있었다. 콩고혁명 실패 후 체는 쿠바로 돌아오라는 카스트로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쳤다.

1967년 체는 "아메리카는 하나(Pan-Americanism)"라는 신조에 따라 볼리비아혁명을 위해 다시 정글로 들어간다. 죽기 전 마지막 날까지 '볼리비아 일기'를 썼던 이 39세의 혁명가는 같은 해 10월 미국 CIA의 조종을 받은 볼리비아군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됐다. 

1980년대 한국에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학원에서, 현장에서, 그리고 삶 자체에서 그들은 혁명을 꿈꿨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경찰서 푯말의 말뜻 그대로 한국 땅에 정의가 뿌리내리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불과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그들 중 많은 수가 '꺼삐딴 리' 같은 부박한 기회주의자가 됐다. 변절은 일상화했고 그런 변절이 능력으로 둔갑됐다. 그들이 꿈꿨던 것들은 젊은 날의 치기에 불과한 것이 됐고, 불가능해서 아름다운 것으로 희화화됐다. 그들은 살아서 스스로 꿈꿨던 것들을 욕보였다. 죽어서라도 올곧고자 했던 체 게바라의 꿈까지 그들은 욕보이고 있다.


태그:#체 게바라, #경매, #카스트로, #쿠바, #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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