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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전설이 깃든 수덕여관이 옛터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 41번지 1054㎡의 대지위에 건평 182㎡ 크기의 ㄷ자형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 집은 충남도가 4억원을 들여 지난해 11월 복원공사를 나선지 10달여 만인 지난 8월 24일 준공됐다. 그러나 아직 일반 공개는 미루고 있다. 조경과 집주변 정리 등을 마친 다음 오는 10월 '이응노 기념관' 준공식을 가진 뒤 공개할 예정이다.


복원된 수덕여관은 이제 더 이상 나그네를 재워주고 산채정식으로 유명한 밥을 지어 파는 곳이 아니다. 객실에 고암의 작품이 걸린 전시관으로 변모하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불자들이 템플스테이로 이용하는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새로 지은 수덕여관은 초가지붕에다 7개의 방, 방과 방 사이의 장짓문, 툇마루, 부엌, 안마루, 안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뒤주, 대문 양쪽에 있는 방의 누마루, 나무를 때어 구들을 데우는 온돌 방바닥까지 집의 형태는 옛 모습 그대로다.


고암의 손때가 묻은 낡은 기둥과 헐어빠진 벽채는 물론 안뜰의 오래된 굴뚝을 타고 오른 담쟁이넝쿨까지 없애버리고 모두 새것으로만 갈았지만 분명 수덕여관이다.


초가지붕 처마 위로 높직이 걸려있던 '수덕여관'이란 옥호가 보이지 않아 조금 낯설어 보이기도 하지만 새집이면서 옛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어 별로 낯설지도 않다.


수덕여관은 고암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국각지의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면 단골로 묵어가던 명소로 유명하기도 했다. 옥호는 오는 10월 5일 준공식 기념식을 하는 날 달 것이라고 한다.


'수덕여관'이란 옥호는 고암의 친필을 그대로 사용키로 했다. 고암은 수덕여관을 1944년에 구입해 15년간 살았다. 그러나 고암이 실제로 집에 머문 세월은 길지 않다. 여관은 부인 박귀희(2001년 사망) 여사가 운영했고 그는 바람처럼 떠돌다 잠깐씩 머물고 떠나곤 했다.


그렇지만 고암은 집집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세간에 잘 알려진 2점의 암각화와 수덕여관 앞 남쪽에서 계단을 오르는 언덕바지 작은 바위에 '수덕여관'이라고 고딕체에 가까운 한글체로 새긴 것은 고암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다음 1969년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새긴 것이다.

 

집을 복원하면서 집 서쪽에 세워놓은 가로세로 1m 정도 크기의 유리문이 달린 입간판에 보관되어 있는 그림은 복원공사를 위해 옛집을 헐어 내다 발견된 습작으로 1960년 3월에 발행된 신문과 함께 도배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고암이 파리로 유학을 떠난 1957년 이전의 습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듯 고암과 인연이 깊은 수덕여관은 고암이 1944년 사들인지 63년 만인 지난해 1월 수덕사에서 사들이는 것을 끝으로 그 연이 다했으나 수덕사가 "불심이 깊은 세계적인 화가 이응노의 높은 예술혼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그대로 복원키로 해 '새집'이 지어지고 '이응노 기념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태그:#고암 이응노, #수덕여관 , #수덕여관복원,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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