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을 따라 뻗어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여관이 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자락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돌계단을 올라 마당에 들어서니 이응노 화백이 자연석에 새겨놓은 '수덕여관'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쇠락한 초가집을 뒤로 하고 숨고르기를 하며 돌계단을 바라보니 종실 큰스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의기소침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올라오던 69년 전 나혜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임자는 중노릇 할 사람이 아니야."
세파에 휩쓸려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 김일엽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를 찾은 나혜석에게 만공선사가 꾸짖듯이 한 말이다. 만공선사가 누구인가? 1871년 정읍에서 태어나 태허스님을 은사로 당대의 큰스님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아 득도하고 근대 선(禪)불교를 중흥시킨 큰스님이다. 이러한 스님으로부터 중 되는 것을 거절당했으니 나혜석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종실 큰스님이 김일엽은 불제자로 받아들이고 나혜석은 "안 된다"라고 했다면 득도한 스님이 가지고 있는 잣대는 무엇이었을까? 만공스님에게 불자의 길을 거절당한 후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나혜석과 만공스님의 잣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한 두 여자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김일엽이 1921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인 의복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라는 계몽성 글에, 요샛말로 표현하면 딴지를 걸고 동성인 여자를 형(兄)이라 칭하는 나혜석의 발칙한 칼럼이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였다.
물론 동아일보가 당대의 신여성 두 사람의 논쟁을 유도하여 구독 부수를 올리려는 저의도 있었지만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자존심이라면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페미니스트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원주는 김일엽의 본명이다. 일엽(一葉)이라 하면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舟)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하지만 26세에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찌 이찌오(一葉)가 1896년 사망하던 해에 김일엽이 태어났기 때문에 김일엽이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 의미를 살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김일엽은 진남포 삼숭 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 일본 닛산학교로 유학 간 신세대 여성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일본 유학시절 본처가 한국에 있는 시인 노월 임장화와 간통한 사건으로 이혼한 김일엽은 일본 명문가 출신 오따 세이죠와 열애에 빠져 아들 김태신을 낳아 오따에게 넘겨주고 귀국했다. 그 후 친구 유덕의 애인이었던 방인근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기열과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이즈음 불교에 서서히 심취하던 김일엽은 독일 부르크스 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성욱 박사의 불교논리에 매료됨은 물론 인간 백성욱과 사랑에 빠졌으나 백성욱이 속세를 털고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자 불교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일념으로 재가승 하윤실과 동거에 들어간다.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빠른 1907년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 사실상 우리나라 신시의 지평을 열고 구 한말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불가에 귀의하여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가부장적인 사회인습에 숨막혀 하던 김일엽은,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고 여성은 남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몸을 던져 연출한 행위 예술가이며 전위 예술가였다. 또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기독교 신화에 반기를 든 용기 있는 행동가였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든 이유는 거기에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몇 년 전 경성에서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텅 빈 여관방에는 지친 몸을 누이던 나혜석의 체취는 간데없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
이때 나혜석 역시 모성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관리인도 떠나버린 여관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곰팡이 냄새만 넘쳐나는 여관방 어디에도 모정에 굶주린 태신에게 가슴을 열고 봉긋한 젖무덤에 소년의 손을 끌어다 얹어주던 나혜석의 모습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1927년. 그 당시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못 꾸는 세계여행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리는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뭇 남성과 사랑도 많이 했고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나혜석이 홀로 산사(山寺)에 있는 친구를 찾아와 여관방에서 친구의 아들에게 가슴을 열어준 사연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