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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162 x 107 cm, 카조 베로디에르 화랑, 파리
▲ '햇살 속의 수잔느' 1890년, 162 x 107 cm, 카조 베로디에르 화랑, 파리
ⓒ Cazeau-Beraudier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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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어두운 방입니다. 빛을 좋아하는 모네답지 않게 초상화의 배경은 빛을 차단한 어두운 방입니다. 더욱이 초상화에서 있을 법한, 배경 생략을 통해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기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방 속의 수잔느는 팔꿈치를 탁자에 얹은 채 손을 입가에 대고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사물도 선명하지 않습니다. 수잔느가 앉아있는 의자는 사라진 듯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본식일 도자기 하나가 배경을 균형잡게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사진 속의 수잔느는 연약해 보였답니다. 다소 몸이 약했나 봅니다. 그런 자식에게 더 애정이 가거나 신경이 쓰이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마음 씀씀이입니다. 비록 수잔느는 친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수잔느가 어렸을 때 모네의 가족과 수잔느의 가족이 어려움을 겪으며 지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수잔느는 지켜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수잔느에게 모네는 특별한 방식으로 빛을 선사했습니다. 해바라기가 그것입니다. 수잔느 얼굴 주위에 있는 해바라기꽃 세 그루가 한아름 빛을 던져 줍니다.

저는 이 해바라기가 정말 방 장식으로 꾸며져 있던 것인지, 인위적으로 그림에만 그려 넣은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모네의 그림 그리는 방식상, 추상적일 수도 있는 사물을 배경에 넣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늘 빛의 요동에 따른 사물의 변화에 주목했을 뿐이지, 샤갈처럼 사물과 사람과 동물이 하늘을 날거나, 과거의 추억담이 배경에 나오거나 하는 그림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그림에서 유독 돋보이는 것은 해바라기입니다. 인위적일 수도 있고, 실제의 모습일 수도 있을 정도로 그림은 해석의 자유를 줍니다. 그건 수잔느가 연약하고 섬세한 딸이라는 것에 연유합니다. 빛을 가득 얼굴에 주고 싶은 모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햇살 속의 수잔느'라는 제목입니다. 수잔느는 빛을 가득 받고 있습니다. 마치 아침, 낮, 저녁 늘 햇살을 받으라고 세 그루를 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바라기가 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 제목에 들어 있는 원어 제목 중 '햇살'에 해당하는 단어 'soleils'에는 '해바라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바라기 속 수잔느'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해바라기가 햇살을 의미하게 그림을 의도해 그린 것이 맞을 것입니다. '햇살'은 모네의 모든 그림의 원동력이 되는 그림이니까요.

1914-1917년, 150 x 140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 '원추리' 1914-1917년, 150 x 140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 The Bridgeman Art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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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

지베르니는 모네의 후반 40여 년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 정원에 모네는 하나의 우주를 정착시켰습니다. 연못, 나무, 그리고 꽃밭들이 그것입니다. 전문가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여행하기가 수월치 않기도 했지만, 이곳 정원 안에 그가 그릴 소재는 무궁무진했습니다.

더욱이 햇살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은 그 한순간 한순간이 한 우주이고 화폭의 주인공입니다. 여러 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심고 싶은, 가꾸고 싶은 꽃들을 주문하고 심으면서 모네는 풋내기 정원사에서 노련한 정원사로 변모합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일년 내내 손길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정원사는 빈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여기에 무엇을 심어야지, 이 꽃들을 저곳으로 옮겨야지 하면서 분주하게 정원을 오고 갑니다.

모네 자신이 직접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전문가들에게 이래저래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네는 정원사들을 고용하여, 수련의 넓은 잎사귀의 더러움을 씻어내게 하기도 했고, 연못 위에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를 조금 더 휘게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린 것입니다.

여기 원추리가 있습니다.

주황색과 붉은색의 꽃들이 여린 꽃대 위에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원추리 하나만 돋보이게 잠시 주변은 정원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림 속 꽃과 잎 주변엔 빈틈이 많습니다. 빼곡 채워넣지 않고 하얀 여백을 남겨놓았습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고 있음을, 또는 흔들릴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꽃대는 하늘을 향해 곧게 올라가지만 기다란 잎들은 땅을 향해 원을 그리며 숙이고 있습니다. 모두 곧기만 하면 볼썽사나울 것입니다.

"동양의 뜰에는 꽃이 보다 더 아름다워지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밝은 신뢰를 가지고 보다 빨리 그리고 보다 침착하게 피어나도록 하기 위해 젊은 꽃이 약속돼 있는 활기찬 줄기 앞에는 두 개의 램프와 한 개의 거울을 가져다 놓는 배려와 애정을 기울인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꽃은 밤에도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볼 수가 있다. 그렇게 해서 꽃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화려함을 즐기는 것이다." (<꿈꿀 권리> 중에서)

그림은 4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그리다 중단하고 그리다 중단하고 했을 것이지만, 그래서 모네는 그 몇 년간에 피고지고, 피고지고 했을 원추리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모네는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엔 몇 년의 세월과 꽃 형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겹'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더욱….

1924-1926년, 105 x 73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 '아이리스' 1924-1926년, 105 x 73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 The Bridgeman Art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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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지베르니 가는 길을 알려드릴까요?

서울의 서울역, 청량리역 하는 식으로 파리에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여러 기차역이 있습니다. 그중 생 라자르 역에 가서 루앙행 열차를 타십시오. 루앙은 프랑스 서북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곳도 다 모네와 관련이 있는 곳이네요. 생 라자르 역과 루앙 대성당은 모네 연작의 기념비적인 장소입니다.

그 열차를 타고 가다가 베르농이라는 곳에서 내립니다. 그곳에서 지베르니 마을로 가면 되는데, 그곳까지 가는 자전거를 빌려 탈 수도 있습니다. 지베르니의 모네 정원은 이제 '클로드 모네 기념관'이 되어 있는데 그곳을 들어가면 예전 모습 그대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연못, 수련, 일본식 다리, 수양버들, 그리고 많은 꽃들.

아이리스는 모네가 이곳에서 군락을 이루게끔 키운 꽃입니다. 아이리스가 붓꽃이라는 것은 다 아시죠? 프랑스의 국화랍니다.

저는 이 그림을 조금 유심히 봤는데 왜냐 하면 모네가 백내장 수술을 하고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걸 대형 '수련' 연작을 그리는 와중에 이 꽃도 그렸네요. 그래서인지 수술 전 붉은색이 가득했던 그림의 대상들이 이젠 제 색깔을 되찾았습니다. 여린 보라색의 붓꽃이 연녹색의 잎과 연한 자줏빛 배경 색깔의 비슷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조 속에서 여리게 피어 있습니다. 심한 덧칠도 없습니다.

"모네는 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위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은 어떠한지, 미풍이 꽃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하늘과 물을 배경으로 하여 두드러지는 미묘한 색채를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꽃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형태만 희미하게 나타내고 분위기와 인상을 전하려고 했다. 모네에게 중요한 것은 일시적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지 물질적인 사물 그 자체가 아니었다." (도록 중에서)

청보랏빛 아이리스의 꽃말이 "할 말이 있어요"랍니다. 보라색 자태가 사람의 눈길을 끄는 이유가 있군요. 가만가만 뭐라 하는지 내년 봄에는 귀기울여 봐야겠네요. 

해바라기, 원추리, 아이리스 모두 햇살들이 키우는 꽃들입니다. 지베르니의 정원은 햇살들이 시간과 햇살 줄기를 더 늘려서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부리는 요술에 주목하는 화가가 사는 곳이었으니까요.

비록 지베르니의 그 아름다운 정원엔 가지 못하더라도, 그림이 있는 전시회장은 그런 화가의 옆자리에 잠시 앉았다 오는 곳입니다.

덧붙이는 글 | <'빛의 화가 모네'전> : 서울시립미술관, 9월 26일까지. 02-724-2900, 월요일 휴관. 평일은 밤 10시까지.



태그:#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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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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