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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안개

 

잔물결이 살랑이는 가운데,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수련꽃 들이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노랑, 분홍, 빨강, 하양의 모나지 않은 색상으로 봉오리를 엽니다. 곧 가실 옅은 새벽안개가 몽롱한 단 꿈을 꾼 수련꽃 들을 다독거리기 때문입니다.

 

물과 대기의 경계선 부근에서만 살 수밖에 없는, 아니 경계선 상에서만 살기로 작정한 연잎들이 수면 빛에 의지하여 자신의 외연을 확대해 나갑니다. 게다가 연잎들은 주변 숲이 비춰져 만들어진 물 속 반영체를 자신의 멋진 외투로 삼고 뽐냅니다.

 

그렇게 멋 부릴 줄 아는 연잎이 안전하게 자신을 지켜주니, 수련꽃들은 이제 생기발랄하게 꿈틀거릴 기세입니다.

 

이렇게 물속의 잎자루들은 자라서 물 위에서 연잎을 폅니다. 잎자루 하나에 수련 연꽃이 하나씩 핍니다. 이제 연꽃은 절정기를 끝냈습니다. 여름 7·8월이 수련 꽃들이 피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꽃들은 시들고 9월의 열매를 기대할 때가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환상적인 수련 그림을 통해 그 앳된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은 마치 새벽의 모습을 그린 듯 푸른 물 색깔이 뿌연 안개 기운을 받고 흐려져 있습니다. 이제 왕성하게 수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화가 클로드 모네는, 만약 위 그림이 새벽의 모습이 맞다면, 여러 날 새벽 같은 시간에 나와 짧은 순간 밖에 지속되지 않을 한 순간의 빛의 요동을 잡으려 했을 것입니다.

 

연못 속 지층에 뿌리를 박고, 잎자루를 물 기운에 의지해 세우고, 얼굴만 대기에 허락한 수련 무리들은 자신들의 공든 탑 위로 꽃을 피우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기나긴 물 속 성장을 끝내고 대기와 맞닥뜨린 다음, 색깔별로 표현된 그들의 의지는 대지에 사는 이들에게 꿈 색깔의 다양함을 알려줍니다. '내 꿈은 무슨 색깔이면 좋을까' 궁금하시나요. 그건 아마 님프가 알려줄 것입니다.

 


흐린 아침나절

 

님프는 정확히 들·언덕·동굴·하천·샘·수목에 관계하는 요정이니 이곳 모네의 '아틀리에'인 '지베르니의 연못'은 정말 님프가 살기 딱 알맞은 곳입니다. 수련의 꽃말이 '청순한 마음'이니 님프에게 잘 어울리지요.

 

작품 이름인 불어 'nymphéas(냉페아)'가 바로 수련을 뜻하는데, 우연하게 발견한 것이지만, 강이나 샘의 요정인 님프를 불어로 ‘nymphe(냉프)’라고 합니다. 결국 '수련'은 '님프'에서 나온 말입니다. 수련은 님프의 유일한 외현(外現) 자태입니다.

 

그런데 <‘빛의 화가 모네’전> 도록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랜 고뇌와 망설임 끝에 세상에 나타난 '수련' 작품의 첫 전시는 1909년 3월 그의 전속화랑 뒤랑-뤼엘에서 이루어졌고, 전시 제목은 모네 스스로가 지은 '수련 : 물 위의 풍경 연작'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모네는 작품에 통칭되는 수련을 불어로 냉페아(Nymphéas)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백수련을 가리키는 학명으로 1895년 말라르메의 시에 등장했으며, 이를 인용해 모네가 그의 작품에 통칭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니까 당시 '수련'이나 '백수련'은 일상적인 단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냉페아'는 변종 백수련의 학명이기 때문입니다. 말라르메는 새로운 시어로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누군가 학명을 지을 때 이 '님프'를 연상했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수련'을 '水蓮'으로 알아 '물 위 연꽃'으로 알기가 쉽고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수련의 영어명이 'water lily'이니 무리도 아니지요. 그러나 수련(睡蓮)은 '잠자는 연꽃'입니다. 아침 햇살을 받고 피었다가 노을 질 무렵 잠자듯 지는(봉오리를 오므리는) 짓을 여러 날 반복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전을 뒤지다보면 우습게도 이렇게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또 있습니다. '연못'이라는 말은 '연(蓮)이 있는 못'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독립적인 단어인 줄 알았는데 한자와 우리말의 복합명사입니다.

 

원형 캔버스 안에 잔잔함과 고요함이 가득합니다. 흐린 날씨에 연못도 차분해집니다. 넓은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듯 연못 위는 두 빛의 세계로 나뉩니다. 빛은 요술사입니다. 빛은 물이라는 무대 위에 있을 때 연약한 무희가 되어 부드러운 몸짓을 만끽합니다.

 

원형이라는 캔버스는 파격적입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에 원형 캔버스를 사용하는 이는 모네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전시회에서 그는 네 점의 원형 그림을 선보이는데 그 중의 하나가 위의 작품입니다.

 

"그는 사각틀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티프들을 배치하는 데 너무나 제한적인 사각틀에 비해, 원형의 패널(화판)을 사용하면 공간 속에 모티프들을 분산 배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생기는 것이다."(<모네>(열화당) 중에서)

 

"모네는 통상적으로 풍경화에 사용되는 캔버스의 형태를 과감히 탈피하여 정사각형, 직사각형, 수직형, 수평형 등 다양한 형태의 캔버스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작가가 각각의 작품에 의도했던 빛과 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인 듯하다… (다양한) 화폭을 통한 우주의 형상, 소우주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도록 중에서)

 

그렇지요. 이 땅 위에서 바라보는 우주는 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한낮의 정열

 

한낮의 화사함은 연잎들이 또렷한 색채를 발하게 합니다. 왼쪽 무리들에는 드센 잎자루가 날빛을 받으러 물 밖으로 나올 기세입니다. 가로 2m, 세로 2m의 대형 그림 안에는 우주가 가득합니다. 위 코스모스와 아래 코스모스 사이엔 연녹색 우주바다가 공백의 공간을 나타냅니다. 이 우주는 한낮의 짧은 시간, 그러나 몇 년의 한낮이 녹아 있는 중첩된 우주입니다.

 

모네는 매일 그 시간의 연못을 찾아 같은 진동수의 빛을 가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느린 손짓으로 붓을 잡고 흔들리는 손으로 팔레트를 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주를 나타내려 있는 힘을 다했을 것입니다.

 

전쟁 와중이었고, 가족의 죽음이 있어 슬픔에 잠겨 있었겠지만, 그러기에 더욱 이 우주를 그려내는 데 몰두했을 것입니다. 몇 년이라는 긴 창작 기간이 걸리더라도요.

 

수련 그림은 아니지만 아마도 노적가리 연작을 그릴 때 즈음, 그러니까 한창일 때의 모네는 자연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느림을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해가 어찌나 빨리 지는지 따라잡을 수가 없다네. 나를 낙담시키는 것은 그림을 그릴 때 내가 느림보가 된다는 것일세. 그림을 그릴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것, 순간성과 특히 그림 전체를 감싸는 색조, 똑같은 빛의 입사각을 얻기 위해서 한층 더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는 사실일세."(<모네>(창해) 중에서)

 

분초를 따라 결을 달리해 가는 빛을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베르니 연못 위에 있는 다리를 그릴 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모네는 인상을 붙잡는 '훈련'을 쌓았습니다. 모네는 날마다 다리를 주의깊게 관찰한 결과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리가 달라 보인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건 바로 햇빛 때문이었습니다. 모네는 다리 그림을 수없이 그렸는데, 똑같은 그림은 한 장도 없습니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오름에 따라 캔버스를 바꾸어 조금씩 그림을 그리곤 했답니다."(<모네의 정원에서> 중에서)

 

해는 빨리 지기도 하지만 또 얼마나 빨리 뜨기도 하는지요.

 

몇 년 전, 전남 여수 향일암에서 일출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구름 사이 순식간에 태양이 솟아오르자 태양빛의 화판인, 별 박힌 하늘은 짙푸른 색에서 금세 화사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기다린 시간에 비해 영광의 시간은 짧았습니다. 이내 암자 주변의 사람들은 싱거운 일상을 시작하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연못을 더 자주 볼 일입니다. 빛을 여과시켜 머물게 하니 우리는 눈이 시리도록 연못 속을 볼 수 있습니다. 수련이 발을 담가 놓은 곳을요.

덧붙이는 글 | <'빛의 화가 모네'전> : 서울시립미술관, 9월 26일까지. 02-724-2900, 월요일 휴관. 평일은 밤 10시까지.


태그:#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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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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