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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마르티노 델 카미노 가는 길
ⓒ 정민호
아침 6시 40분, 레온 알베르게를 나서자마자 혼자 걷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단순히 함께 걷던 드림팀과 헤어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지나가면서 보는 순례자들이 모두 낯선 얼굴이기에 그랬다. 하지만 뭐 어떠랴. '올라!'와 함께 서로 친해져간다.

그럼에도 문제는 있다. 몸이 오슬오슬 떨리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물집이 좀 나아졌나 했더니 이번에는 감기 기운이다. 이런 사고뭉치 몸뚱이 같으니라고! 전속력으로 걸었다. 덕분에 오후 12시 40분, 레온으로부터 약 26km 떨어진 산 마르티노 델 카미노에 도착했다. 감기약을 먹고 자야한다는 것이 이날의 유일한 의지였다. 그리하여 하루치 감기약을 한번에 털어 버리고 침대에 뻗어버렸다. 누가 보면 잠자러 온 줄 알았을 것이다.

저길 내가 가야 돼?

▲ 산 마르티노 델 카미노 알베르게
ⓒ 정민호
새벽 4시, 눈이 떠졌다. 워낙 많이 자기도 했거니와 내 위에 있던 할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천둥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너무 이른 시간인지라 억지로라도 더 잘까 했지만 계속되는 천둥소리에 놀라 그대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나와서 뻐근한 목을 움직이다가 깜짝 놀랐다. 하늘에 별이 굉장히 많았다.

한국의 가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청난 별에 감탄했는데, 여기는 워낙 시골마을이라 그런지 밀도가 더 높다.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는 순간이다. 하늘을 보며 기분 좋게 걸었다. 그런데 어라? 옆으로 돌아가라는 신호가 있다. 그건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옆이 ‘어둠의 숲’이라는 것이다.

어둠의 숲! 손전등도 없는 나는 겁을 먹고 말았다. 사람도 무서워하지만 때로는 귀신 따위를 더 무서워하는 터라 몸이 얼어붙었다. 내가 저 길로 가야 돼? 아무 것도 없는데? 손전등을 갖고 있는 순례자가 온다면 같이 가기라도 하겠는데 시간이 워낙 이르다.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마른침만 삼키며 갈등했다.

가야하나? 갈 수 있나? 를 두고 고민하는데 무슨 이유일까? 이럴 때면 상상은 꼭 최악으로 흐른다. 이제껏 봤던 공포영화들은 물론이거니와 머리만 날아다니던 처녀귀신이 유독 기억나는 전설의 고향 시리즈까지,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한 상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또 뭔가? 웬 바람이 평소처럼 “휭~”하고 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웃음소리인 양 “으흐흐흐~”하고 분다. 설마? 순례자의 길인데? 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무거운 발을 뗐다. 등줄기에서는 뭔가가 계속 흐르기만 한다.

긴장감 속에 한참을 걸었더니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갈래길. 어두워서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 라이터로 이리저리 비춰봤지만 허사다. 여기서 해 뜨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러기에는 시간이 이르다. 그래서 결국 디카를 꺼냈다. 디카의 플래시를 터트리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짓인가? 시골길에서 디카를 터트리며 가는 한국인의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그것을, 직접 하면서 길을 찾았다. 어라? 길을 따라가니 아스팔트길이다. 한숨 돌렸나 했더니 다시 숲길로 빠지고, 또 다시 디카를 터트리며 갔더니 다시 아스팔트길이 나온다. 이 사람들이 진짜! 진작 아스팔트 따라가라고 하면 됐잖아! 이때는 이미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투덜거림만 있을 뿐.

읽기만 가능해? 울랄라!

▲ 마을이 눈에 들어올 때의 기분은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는 것과 같다. 사진 속 마을은 아스토르가.
ⓒ 정민호
22km쯤 걸었을까? 외국인이 다가오더니 “반갑습니다”라고 말한다. 무심코 “올라!”라고 했던 나, 그제야 놀라서 봤다. 그의 이름은 밴, 전날 한국여자 두 명을 만났다고 한다. 한국인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밴은 그녀들이 내가 가려는 이날의 목적지인 아스토르가에 머문다고 알려줬다. 운이 좋으면 볼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사이, 12시 30분에 아스토르가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이용료는 4유로. 시설이나 가격 등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침대에 짐을 꾸리는데 전날 같은 알베르게에 있던 사람들이 말을 건다. 잠만 자는 동양인에게 궁금한 게 많았나보다. 그들과 웃으며 수다를 떠는데,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생기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난 물집 때문이다. 도대체 이 물집은 나한테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리도 괴롭히는 것인가?

호스피탈레로에게 받은 주사기를 들고 알베르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너 죽고 나 죽자’는 마음으로 주사기를 찔렀는데 웬 고름(?) 비슷한 것이 나온다. 이거, 무슨 일인지? 당황해서 멍하니 있는데 웬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그의 이름은 장 마리. 프랑스인 인데 나보고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정신이 없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스페인어는?”, “못해요”, “프랑스어는?”, “못해요”, “그럼 영어, 듣는 건 가능해?”, “아니오”, “쓰는 건?”, “그것도 좀….”, “읽는 건?”, “그건 좀 되는 것 같은데요”라는 대화를 마치자 장 마리, “울랄라!”를 외친다.

새삼 느끼지만, 이 사람들의 감탄사는 참 독특하다. 어쨌거나 이때부터 장 마리는 상당히 천천히 말한다. 의도(?)한 대로다. 며칠 경험한 바로는 영어 한다고 하면, 말이 빠르다. 머릿속에서 의역하는 사이, 또 다른 정보가 들어와서 해석이 엉망진창이 된다. 그러나 못한다고 하면 천천히 말해준다. 한결 듣기가 수월하다.

“악기 배울래?”, “여기서요?”, “알베르게에서”, “진짜요?”, “그렇다니까. 5분이면 배울 수 있어”, “설마요?”, “진짜 5분이라니까. 관심 있으면 지금 들어와”라는 대화 뒤에 장 마리가 당당히 들어간다. 정말 5분만에 배울 수 있을까? 이건 과장광고 아닌가? 의구심을 갖는 사이,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리코더다. 신기한 마음에 알베르게에 들어갔더니 장 마리가 리코더를 불고 있다. 그 음악에 취해서일까. 고름 나오던 물집을 잊고 벽에 기대섰다. 단순한 곡이지만,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는 어쩔 수 없어!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이야

▲ 날씨가 좋으면 이곳이 가장 붐빈다.
ⓒ 정민호
마을에 나갔는데 아이들이 나를 보고 “치나(치노?)”라고 외친다. 무슨 소린가 싶어 호스피탈레로에게 물어봤더니 중국인을 의미하는 것이란다. 웬 중국사람? 애들은 동양인을 일단 중국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단다. 그렇다면 유럽인은 결국 동양인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본다는 말이에요? 라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웃는다.

저녁 늦은 시간,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소에 한국을 어떻게 봤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장 물어볼까 했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지라 듣기 좋은 말만 해줄 것 같았다. 그때서야 후회 막심! 진작에 이 문제를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친구들에게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뭐, 아직 남은 길은 300km 이상 남았다. 길도 충분하고 시간도 충분하다는 뜻. 그러니 새로운 과제거리를 반갑게 맞이하기로 했다. 물론, 기대한 만큼 좋은 대답이 나오겠지?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여행이 더 재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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