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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그로뇨 가는 길
ⓒ 정민호
오전 7시에 로스 아르코스의 알베르게를 나왔다. 이날의 목적지는 로그로뇨. 약 28km를 걸어야 한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특히, 포도밭이 많기에 다들 싱글벙글하다. 매튜가 재밌는 제안을 했다.

로그로뇨에서 돈을 벌자는 것이었다. 때가 때인 만큼 포도 따는 일을 도와주면 하루에 50유로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장기여행자다운 기질이었다. 언제쯤이면 나도 저런 사고를 할 수 있을까? 매튜가 부러울 뿐이다.

한참을 걷는데 발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보니 신발 끈이 풀렸다. 대수롭지 않게 앉았는데, 아뿔싸! 신발 끈을 풀고 보니 끈이 세 개다. 잠시 망연자실. 신발 끈이 헤진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운동화가 없던 터라 떠나기 이틀 전에 산 신발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설마 이런 침대에서?

▲ 걷는 아빠를 위해 따라온 이사벨. 엄마와 함께 차로 이동중이라고 한다.
ⓒ 정민호
로그로뇨의 알베르게는 외관도 깨끗할 뿐만 아니라 시설도 좋다. 부엌까지 있는데 가격은 3유로. 확실히 싸다. 우리는 다락방 같은 곳의 침대를 배정받고 올라갔는데, 이럴 수가! 침대를 보고 번호를 확인한 순간, "오 마이 갓!"이 튀어나왔다.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서 일렬로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 뒤에 따라오는 순례자가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것이다. 상황 파악한 드림팀 멤버들, 나를 향해 '럭키 가이'라고 말하며 입으로 괴상한(?)소리를 낸다. 그 와중에 아가씨는 나를 향해 윙크를 한다.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머나먼 땅에서 외국 아가씨와 나란히 붙어 자는 일이 생길 줄이야! 아니지. 이 신성한 길에서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건가? 허벅지를 꼬집고 말았다.

로그로뇨는 제법 큰 도시다. 때문에 알베르게에서 지도를 얻어서 슈퍼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길도 복잡하고 무엇보다 스페인어로 써 있어서 알아보기가 난감하다. 나와 마이키, 스요시는 끙끙거리며 지도를 봤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또 다시 끙끙거릴 뿐이다.

이럴 때면, 세 사람의 다른 점이 나타난다. 먼저 마이키는 끝까지 지도만 본다. 스요시는 거리 이름부터 확인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는다. 말이 통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바디랭귀지라는 세계 공용어가 있지 않던가!

파스타에 도전하다. 그런데?

▲ 다들 즐거운 축제의 거리
ⓒ 정민호
드디어 그날이 됐다. 바로 파스타를 만드는 날! 사실 경비를 아낄 요량으로 한국에서 배워볼까 했었는데 설명이 복잡해서 포기했던 터였다. 그런데 마이키가 알려주는 요리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라면 끊이는 것보다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요리에 소질 없던 나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키의 설명에 따라 파스타를 완성했다. 이제는 슈퍼에서 구입한 토마토소스만 뿌리면 되는 상태!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동양인이 만든 파스타를 구경하고 그 눈빛을 받으며 나는 소스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맙소사…. 나는 할말을 잃었고 멍하니 마이키를 쳐다봤다.

마이키가 왜 그러냐고 묻는다. 통의 안쪽을 보여줬더니 마이키도 말을 잃은 것 같은 기색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주위가 고요해진다고 해야 할까? 내가 사온 것은, 토마토소스가 아니라 토마토였다. 토마토 그림이 있기에 고른 건데… 얼굴이 홧홧 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토마토와 파스타를 비벼(?) 먹는 진기한 경험을 한 뒤, 우리는 감상에 젖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매튜와 마이키는 이곳에서 포도 따는 일을 하고, 알랑과 스요시는 순례 길을 계속 따라가기로 한단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이별이군, 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럴 수가! 모두 산티아고 이후의 일정을 이야기했는데, 뜻밖에도 스요시와 마이키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똑같다. 그곳은 바로 모로코!

모로코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만 아는 나로서는 그곳이 좋냐고 물었다. 왜 가냐고도 물었다. 그랬더니 이들, 흥분해서 알려준다. 영어가 통하고, 물가가 싸며, 여행하기에 비교적 안전하고 사막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설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다 울렁거렸다. 모로코라? 나중에 이야기해줄래? 내가 갈 수 있도록 말이야. 이메일 주소를 적는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실에 숨이 가빠졌다.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다.

도시가 취했다!

▲ 술 취한 거리
ⓒ 정민호
저녁 시간, 바에 갔던 매튜가 오더니 당장 나가자고 외친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산티아고 가는 길에 운이 좋으면 스페인 축제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 내게 그런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슈퍼 가던 길에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술 마시고 있는 걸 봤던 터였다. 호기심으로 따라 나섰더니 웬 스페인 젊은이들이 알베르게 앞에 서 있다.

매튜가 새로 사귄 친구라고 하는 이들, 그중에 파올라라는 여자가 나를 향해 벌어지는 축제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러나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는 바디랭귀지 위주인데 파올라는 술이 잔뜩 취한 터라 꼬부랑 언어가 더 꼬부라져 들려온다.

그런 탓에 엄청난 대화량(?)과 바디랭귀지에도 불구하고 알아들은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 동네는 큰 축제가 일년에 네 번 있는데 이 날 있는 축제는 포도 따는 것을 기념하는 대단히 큰 축제란다.

굳이 그녀가 강조하지 않아도 축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거리로 나가는 순간, '도시가 취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바 앞에서는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춤을 추고 있고 큰 거리에서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들 뜬 얼굴이 가득했기 때문. 사방에서 술 냄새가 풍겨오는 것은 물론이고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다들 풀려있으며 헤헤 웃고 있다. 취해도 단단히 취한 셈.

두 번째로 알아들은 것은, "아 유 레디?"였다. 파올라가 바 앞에서 내 어깨를 짚으며 그 말을 하기에 "뭘 레디해?"했는데, 아아, 맙소사! 파올라가 날 밀었고 난 그대로 바로 끌려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음악 소리, 흥청망청 노는 사람들, 바삐 움직이는 술병들, 춤추느라 바쁜 몸들… 그곳에는 이미 낯익은 순례자들이 한 자리 잡고 있었고 어느 틈엔가 그들 속에 있는 내 손에도 맥주병이 들려 있었다. 서리하던 포도들을 위해 춤추고 마셔야 하는 날이었다. 알베르게가 밤10시에 닫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시간들 덕분에 무모한 여행은 그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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