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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말어."
"왜유?"
"아, 글쎄 오지말라니께."

얼마 전이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강병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농사지은 야채를 한 바구니 싸들고 모처럼 만에 집에 찾아가려 했더니 다짜고짜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형수하구 한바탕 했슈?"
"아니 그게 아니구, 우리 이사 갔어"
"잘 됐네유, 이사 했쓴깨 성냥이라두 사들구 가야겠구먼…."

"그게 말여…. 평수가 넓은 데루 가서."
"한 30평쯤 돼유?"
"아니, 더 넓어."
"얼마나 넓은 데루 갔길래 그류."

강병철 선배는 중학교 선생이다. 다소 어눌한 말씨에 꺼부정한 몸짓, 날씨가 추워지면 오래된 바바리코트에 목도리를 걸치고, 날이 풀리면 티 나지 않은 반소매를 입는다. 내가 강 선배를 처음 만났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늘 그 차림새다. 소박한 옷차림새 하나만 보더라도 전혀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여태 그 흔한 핸드폰은 물론이고 운전면허증조차 없는 다 낡은 사람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직을 맡고 있는 그는 글쟁이들과 어울러 술 마시는 일을 빼놓고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도서관에 틀어박혀 산다.

내가 새로 이사 간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 선배 부부는 한창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넓지? 넓다니께."
"뭘유, 나는 이백 평짜리에 사는디."
"에이, 그거하구 같냐."

선배는 공연히 오래된 원고 뭉치를 뒤적거리며 평수 넓은 아파트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여기로 이사 오느라구 형수 하구 한바탕 했겠구먼."
"그렇지 뭐."

▲ 강병철 선배는 <민중교육지>에 글을 실어 해직 당했다.
ⓒ 송성영
그는 종종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돕거나, 글쟁이들과의 적지 않은 술자리, 나처럼 돈 가진 거 별로 없이 사는 후배들을 불러 술 사주고, 밥 사주는 거 빼놓고는 크게 돈 쓸 일없이 소박하게 사는 부부 교사다. 올해 쉰 하나, 오랫동안 교편을 잡아 온 부부 교사이다 보니 그 나이에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것은 흉이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선배가 정리하고 있는 자료들에는 선배의 과거 이력들이 뒤섞여 있었다. '전교조' 창립을 이끌었던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창립선언문' 등의 귀중한 자료들도 보였다. 선배는 '민주교육실천협의회' 뿐만 아니라 1985년 <민중 교육지>에 참여한 해직교사였다. 최근에 나온 그의 수필집 <선생님 울지 마세요>(온누리)에 당시의 상황을 적어놓고 있다.

"그 해 여름 TV는 악마적 수준이었다. 빨간 글씨로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를 노리고 있다'라는 무시무시한 문구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 뉴스는 거짓입니다. 책을 보시고 판단해주세요'라고 외쳤지만 요직의 모 관료는 '읽어볼 가치도 없다'며 단칼에 잘랐다. '읽지 않고 책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라고 항변하면 '제목만 봐도 안다'고 했다. 조용한 시골학교는 완전히 뒤집어졌고, 나는 신 새벽 구두 발 소리와 함께 끌려갔다. 나는 그 첫 사랑 학교를 쫓겨났다."

▲ 빛 바랜 사진 옆에 적어 놓은 메모.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난다.
ⓒ 송성영
이삿짐 꾸러미에는 빛 바랜 사진첩도 보였다. 총각 선생 시절에 학생들과 찍은 사진들이었다. 거기 사진첩 한 옆에 가난한 제자들에게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시처럼 적힌 메모가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집나간 아이
그예 출석부에 빨간 줄긋고
후훵 후훵 울던 엄마 보내신지 한 주일
도시 모통이 근로 여성되어
돌아 재봉틀 돌리는 소리 따라 돌아
흘러 비 적신 작업복 쥐어짜며 흘러


어려서부터 글쟁이 교사를 꿈꿔왔던 강병철(수필집 <닭니>(푸른나무)에서 상세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을 위해 많이도 울었다. 바른 교육을 위해 싸웠다. 내가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민중 교육지> 사건으로 '첫사랑'이었던 학교에서 쫓겨나 검정고시 학원 강사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대학에 갓 입학해 소설 쓰기에 열병을 앓고 있었고, 선배는 <민중 교육지>에 참여했던 '삶의 문학'의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그 동안 그는 소설집으로는 <비늘눈> <엄마의 장롱>을 냈으며, 시집 <유년일기>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와 산문집 <닭니>와 <선생님 울지 마세요>를 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나는 어쩌다 책 한 권을 내놓고 별 관심 없다는 듯 사람들이 읽거나 말거나 속내를 감추고 살지만, 그는 솔직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강병철 선배는 소설집과 시집 수필집 등 그 동안 6권의 책을 냈다.
ⓒ 송성영
"너 내 책 다 읽어봤어?"
"읽었지…."
"그럼 <닭니>에서 장님 거지의 딸이 나중에 어떻게 된 줄 알어?"

누군가에게 책을 건네고 나면 숙제를 내놓은 선생처럼 꼬치꼬치 캐물어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유치함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글이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며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배는 눈물도 많고 정도 많다. 교단에서는 가난한 제자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다른 애정을 쏟아 왔다.

"너는 여고생 '각목깡패'였다./ (중략) /엄마는 연탄불에 언 손을 녹이고 너는 그 자리에서 아주 열심히 호떡을 반죽하고 있었다. 그 구체성의 현장이 아찔한 것이다. 야간자습 끝나고, 늘상 그랬듯이 막걸리 몇 순배로 하루를 거나하게 마감하려는 모통이에서 호떡을 굽고 있더구나, 네가 호떡을 굽고 있더구나, 나는 말문을 잊는다./ (중략) /그렇다 너는 '각목 깡패가 아니라 효녀 심청이다." - (<선생님 울지마세요> 95쪽에서)

학교 밖에서는 가난한 글쟁이 후배들을 챙긴다. 10년 전 내가 공주로 이사 온 이후로 선배를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만날 때마다 '적게 벌어먹고 사는' 우리 식구 걱정이었다.

"어휴, 고거 벌어서 어떻게 먹구 사냐?"

선배는 자신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공주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자녀들을 모아 아내에게 그림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내가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어쩌다 우리 집이 글쟁이 선배들의 술자리가 되곤 했는데, 찾아오는 선배들은 강병철 선배의 '눈치'를 봐야 했다.

"빈손으로 오시지 뭘 사오세유."
"빈손으루 왔다가는 병철이 한티 혼나."

어쩌다 내 자동차를 타고 어디인가로 가게 되면 선배들은 그랬다. 기름 넣을 때도 멀었는데 공연히 주유소를 들렀다 가자고 했다.

"기름 넣으려면 한참 멀었는디."
"강병철이가 알믄 큰일 나니께, 기름 꽉 채우고 가, 병철이 만나면 얘기나 혀, 기름 넣어 줬다구."

며칠 전이었다. 한때 남녘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미제 침략사>를 펴냈던 조성일형과 셋이서 '무조건 안주 3천원'이라는 생맥주 집에서 만났다. 강병철 선배에게는 술만 마시면 '유치한 버릇'이 튀어나온다. 누가 나이가 더 많은가를 따지고, 술버릇이 좋지 않은 문학 판의 개망나니들을 열거해가며 누가 힘이 더 센가를 가리기도 한다. 그 날도 그랬다.

"송성영 너도 운동께나 했다지만 유용주나 한창훈이도 힘이 장사라 만만치 않을 껄, 아직까지 나도 팔 힘만큼은 자신이 있다구."

해직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다던 강 병철 선배. 나이 오십이 넘은 선배의 힘 자랑은 그저 강자와 약자를 가리는 힘의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힘 자랑에는 그냥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순수함이 묻어 있다. 그 순수한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글에는 그런 순수한 열정이 묻어 나온다.

이번 술자리 역시 화장실 다녀온다는 핑계로 강 선배가 술값을 미리 지불했다.

"담배는 내가 살께유, 싸게 먹히니께."
"됐네 이 사람아."

담배 값마저 한사코 거부한다. 20년 전 강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송성영이 남 한티 신세지기 싫어하는 거 잘 알지만, 내가 돈을 더 많이 버니께, 전혀 부담 갖지 말어."
"그류,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이 사주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지."

생맥주 집에서 나왔을 때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취해 있었다. 20년 전에도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흐느적거리는 선배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그의 순수한 열정이 잘 먹혀들지 않는 세상이었다.

새로 이사한 평수 너른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선배가 죄지은 사람 마냥 한마디 툭 던진다.

"미안혀."
"뭘유?"
"아, 글쎄 미안혀."

'미안혀' 그 말이 선배의 글처럼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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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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