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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등의 작가이자 동국대 석좌교수인 조정래씨 역시 국가보안법으로 저작활동에 피해를 입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을 쓰며 경찰에 받은 협박전화와 10년 전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지금의 경찰청 보안분실에서까지 조사를 받은 기억에 대해 조씨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라고 표현합니다. 아래는 조씨가 <태백산맥>과 국가보안법에 얽힌 기억에 대해 보내온 글입니다.. 편집자 주)

▲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가 보내온 육필원고. 조씨는 국가보안법과 관련해 자신과 아내가 받은 피해는 '영원히 남을 상처'라고 표현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는 박종철을 고문하다 죽인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받은 훨씬 이전부터 공갈·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태백산맥> 1부가 발간된 1986년부터 시작된 그 공갈·협박전화는 꼭 새벽 2∼3시경에 걸려왔다.

'야 이 빨갱이 새끼야, 네놈 집 지금 당장 폭파된다!' '요런 김일성 앞잡이 새끼야, 그것도 글이라고 써쳐먹어. 네까짓것 없애는 건 식은죽 먹기야.' '개새끼, 똑똑히 들어. 언제까지든지 끝끝내 없애고 말테니까 안심하지 말어.'

그 살벌하고 독기서린 공갈·협박전화는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며 <태백산맥>을 써나가야 하는 고통은 아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겁이 많은 아내가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소설을 안 쓸 수는 없었다. 국가보안법의 그늘에 기생하며 반공을 팔아먹고 있는 그들이 끈질기게 공갈·협박을 하는 목적이 바로 소설을 못 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조형, 참 조심하소. 세상에는 조형을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어느 평론가가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그는 대검 수사에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관광부)까지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나는 그때 이미 이 나라의 모든 수사기관에서 나를 내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국회의 문화공보분과위원회에서까지 문제를 삼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사면초가 상태를 걷어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1992년 대검찰청에서 '이미 3백만부 이상 팔린 책을 문제삼기 어렵다'고 신문에 발표했다. 그 때 문에 기가 꺾인 것인지 어쩐지 심야의 협박전화는 좀 뜸해졌다.

▲ 경찰청 소속 서대문구 홍제동 보안분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데 <태백산맥>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1994년 4월에 급기야 고발사태가 벌어졌다. 8개의 반공단체들이 120 페이지가 넘는 고발장에, 500 가지가 넘는 혐의사실을 나열해 나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빨갱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때를 같이 해서 심야의 공갈·협박전화는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전화는 이제 낮에도 마구 걸려왔다.

그리고,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절묘하게 그 시기를 맞추어 나를 '빨갱이 사냥' 두 번째 타깃으로 삼아 특집을 꾸몄다. 그 첫 번째 타깃은 리영희 선생이었다.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로 1994년 6월7일에, 세간의 눈을 피해 홍제동으로 옮겨앉은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아주 잘 걸려들었어. 오래 전부터 노리고 있었는데."

반장이라는 사람의 이 말은,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직사각형의 좁은 조사실의 살풍경함 만큼 살벌했다. 수사는 세 사람이 하루씩, 사흘 간이라고 했다.

고발자들은 터무니없는 억지와 생트집으로 나를 빨갱이로 몰아대고 있었고, 수사관은 최소한의 객관적 기준도 없이 그들의 편에서 나를 추궁했다.

"대답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나의 유일한 응답이었다. 수사관은 오전 9시부터 밤 11시30분까지 14시간 반 동안 170여 가지를 신문했고, 나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다음날 보안분실에 가지 않고 박원순 변호사를 담당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때부터 1년이 넘도록 소환과 거부의 편지싸움이 이어졌다. 경찰은 강제 구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결국 더 수사하지 못하고 그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그 신경전 속에서 <아리랑> 집필 피해는 막대했다.

▲ 작가 조정래씨.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리고, 김영삼 정권이 끝나고 김대중 정권의 중반쯤인 1999년 9월6일 서울지검 공안1부에 소환되었다. 사흘 동안 조사를 받았고, 나는 다시 <한강> 집필에 결정적 피해를 입으며 검찰이 요구한 객관적 자료를 완벽하게 갖추어 제출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11년 동안 그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다.

나를 옹호한 칼럼을 쓴 소설가 최일남 선생, <태백산맥 다시 읽기>를 쓴 평론가 권영민 교수는 보안분실의 '홍 대장'에게 몹시 시달림을 당했다. 그분들께 지금까지도 못내 미안하다. 국가보안법이 부분개정이라도 되어 내가 무혐의가 된다 해도 아내의 뇌리에 박힌 두려움과 우려는 영영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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