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5 11:45최종 업데이트 24.05.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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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국군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 물에 수통을 담고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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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도 성공해냈는데... 맥아더는 하필 여기서 실패했다 https://omn.kr/28j87

유명한 한국전쟁 사진 중 한 장이다. 대한민국의 중장년이라면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안북도 초산(지금은 자강도에 속한다)의 압록강까지 진격한 국군 병사가 수통에 강물을 담는 장면이라고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교과서뿐 아니라 많은 저술에 이 사진이 삽입됐다. 지금도 포털 사이트에서 국가기록원 사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이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메시지가 상당히 진하다. 옆 얼굴만 슬쩍 보이는 무명용사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다다른 국토의 끝 압록강에서, 이제 곧 통일을 이룰 것 같은 감격적인 순간에, 환호가 아니고 절제된 동작으로 강물을 담고 있다니! 간절한 통일의 염원을 정성스럽게 수통에 담는 것 같지 않은가. 

누구나 알 것 같은 이 감동적인 사진은, 그러나 가짜다. 1993년 한 신문이 가짜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당시 육군 군사연구실은 이 보도에 꽤 당혹스러워했다.

실제로 국군 6사단 7연대의 첨병소대는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압록강에 도달했다. 다음날인 27일 정오쯤 7연대 사진병이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그러나 촬영 직후 소속 부대가 느닷없이 후퇴하는 도중 사진병이 적군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사진병의 운명도 안타깝지만, 당시 현장 사진이 한 장도 우리에게 남지 않은 것도 아쉽다. 내가 봐왔던 이 유명한 사진은 훗날 7연대가 상부의 요구에 따라 철원에서 연출해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 한 장에서 나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 하나, 이 사진은 그날의 그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재현이라고 했으면 별일 아니었을 것인데 재현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바람에 훗날 누가 됐다. 한국전쟁의 기록과 서사의 정확성을 다시 한번 짚어보게 한다. 허무개그는 아니면서도 허무한 에피소드가 됐지만 모든 것이 부족했던 건국 초기의 취약국가에서 발생한 작은 흠집이라고 다독일 수는 있으리라. 

둘, 이 사진이 재현하고자 했던 그 순간의 감격이다.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는 서부전선의 북진이었다.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최선이었겠지만, 이미 벌어졌다면 북한 정권에 공감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대로 북진을 완성하는 것도 하나의 결말이었다. 초산의 압록강에서 감격은 결코 작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의 발상은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하고, 일단 서부전선의 북진을 짚어가 보자. 

서부전선의 북진
 

초산까지의 진격 상황 ⓒ 박종현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한반도의 서부지역은 미1군단이 유엔군의 주공으로 나섰다. 10월 9일 북진이 시작됐다. 첫날 개성시에는 무혈입성했으나 개성 북쪽의 금천에 구축된 38선 방어선에서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날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14일 금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38선이 무너지자 김일성은 결사항전을 하라고 독전했다. 다 이긴 듯한 전쟁이 뒤집어지면서 절규하는 김일성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인민군은 금천에서 후퇴했고 포로들도 적지 않았지만, 잔여병력은 나름 강력한 지연전을 전개했다. 미1군단은 1기병사단의 진격이 지연전에 막혀 지체되자 예하의 3개 사단을 동시에 전선에 투입했다. 미24사단이 서쪽으로 진격해 14일 황해도의 해주를 점령했다. 

금천 다음 목표는 평양으로 가는 길목의 사리원이었다. 사리원으로 가는 국도에는 미1기병사단의 7기병연대, 5기병연대, 영국군 27여단 그리고 미24사단 19연대 등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북진하는 차량 행렬이 뒤섞이면서 큰 혼잡을 빚기도 했다. 이때 사리원을 먼저 점령하는 사단에게 평양 입성의 영광을 준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유엔군 사이에 불필요한 경쟁이 심해졌다.

결국 10월 17일 새벽 사리원 남쪽 서흥에서는 유엔군끼리 오인사격을 하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지휘부의 낙관적 분위기가 전선에서는 논공행상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과열현상으로 나타난 것 같다. 방심은 대가를 치르기 마련인데 좋지 않은 전조가 슬그머니 발생하고 있었다.

미1군단의 좌측 미24사단은 해주 점령 후에 사리원 쪽으로 진격했다. 군단 우측인 국군 1사단은 10월 11일 연천의 고랑포구에서 38선을 돌파해 보병-전차-포병의 협동작전으로 시변리-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을 향해 빠르게 북진했다. 사단장 백선엽은 보병 전원을 차량에 탑승하게 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이제 평양이란 목표가 눈앞에 다가왔다. 미1기병사단은 남쪽에서 정면으로 공격하고, 국군 1사단은 동남쪽에서 공격했다. 동쪽에서는 국군 7사단과 8사단이 압박해 가고 있었다. 유엔군은 18일 새벽 평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대동강의 양각도 철교와 상류의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러나 평양의 동북방으로 우회한 국군 1사단 15연대와 7사단 8연대는 19일 새벽과 오전에 대동강을 건넜고 곧바로 모란봉과 김일성대학으로 진격했다. 그날 오후 3시 평양시청과 최고인민위원회 청사에, 유엔기나 미군기가 아니라 태극기가 먼저 올라갔다. 

다음날 대동강을 도하한 미1기병사단이 합류해 평양의 잔적을 소탕했다. 10월 30일 드디어 평양시청에서 이승만이 참석하는 평양입성 환영대회가 열렸다. 적국의 수도를 점령했으니 이제 통일은 90%는 달성한 셈이었다. 충분히 그렇게 평가하고 기대할 만했다.

맥아더는 평양을 점령하는 동시에 수송기 113대를 동원해 대규모 낙하산 부대를 평양 북방의 순천과 숙천에 투하했다. 후방을 차단해 잔존 인민군 3만 명 가운데 2만5천 명 정도를 포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투하된 공정연대 전투단은 목표지점을 신속하게 장악하고 도로를 차단했다. 이 작전에서 사살 2천여 명, 포로 3800여 명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맥아더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북한은 38선의 방어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미 정부기관들을 강계로 후퇴시켰고, 인민군 주력부대는 10월 12일 청천강을 넘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유엔군의 후방을 타격하기로 하고, 제2전선 부대와 인민유격대 활동을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제2전선 부대는 10월 16일부터 활동해 수송부대 열차 보급소 교통시설 통신시설 등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미9군단과 국군 3군단은 후방경계와 토벌작전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전례 없는 저항
 

1950. 10. 평양. 유엔군 차량이 평양에 입성하고 있다. 선도차에는 태극기과 성조기가 달려 있다. ⓒ NARA

 
한편 평양 점령을 전후로 유엔군 내부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맥아더는 10월 17일 정주-영원-함흥이었던 기존의 유엔군의 북진 한계선(맥아더선)을 선천-구성-풍산-성진(신맥아더선)으로 북상시켰다. 서쪽은 30킬로미터, 동해에서는 160킬로미터 북상시켰다.

유엔군의 평양 다음 목표는 청천강 선이었다. 국군 6사단이 미8군의 선봉으로 10월 21일 청천강의 개천으로 진출했다. 개천에서는 인민군 수송열차를 공격해 전차 8대 등 상당량의 군수품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뒀다. 23일에는 압록강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희천까지 진출했고, 전차 20대를 싣고 있는 화차를 노획했다.

6사단 7연대의 2, 3대대는 기습효과 극대화를 위해 전 병력을 차량에 탑승시켰다. 7연대는 선봉부대라는 자긍심으로 사기도 높았다. 8사단은 산악지역을 통과해 덕천을 점령하고, 평양-덕천 철도를 확보했다. 10월 23일 국군 1사단도 안주에 집결해 청천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유엔군 북진 한계선을 북상시켰던 맥아더는 10월 24일 중국 국경선까지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이 기존의 미국 정부의 9.27훈령에 부합하는지 논란이 있었으나 맥아더는 한국군만으로는 인민군을 격멸할 수 없다는 전술적 필요성을 이유로 밀어붙였다. 미24사단은 신의주로, 국군 1사단은 수풍댐으로, 국군 6사단은 희천-온정리-초산으로, 8사단은 희천-강계 축선에서 만포진 중강진을 향해,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다. 

북한에게 선제공격을 당해 낙동강까지 크게 밀렸으나 이제 미군 참전으로 강력하게 반격해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10월 25일 국군 1사단은 창산장시에 다다를 무렵 전례 없는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적군은 북한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군으로 식별됐다. 이때 한국전쟁 최초의 중국군 포로를 붙잡았다. 포로를 심문한 결과 전방에 2만 병력이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1사단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미1기병사단으로 교대했으나 1기병사단 역시 철벽에 막힌 듯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낙동강 전선 돌파 이후 가장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신의주를 목표로 진격하려던 미24사단의 영국군 27여단은 26일 공중지원에 힘입어 대령강 도하에 성공하고 30일에는 정주를 점령한 다음에 미21연대와 교대했다. 21연대는 11월 1일 신의주 33킬로미터까지 진출했다. 이제 국경까지 하루면 진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돌연 진격을 멈추고 종심방어 태세를 갖추라는 뜻밖의 명령이 내려왔다. 이날 미1군단은 압록강 지척에서 후퇴하기로 하고 일제히 철수했다. 김일성의 권력 심장부가 있던 강계를 향하던 8사단도 26일 오후 2시 공격을 중지하라는 긴급명령을 받았다.

국군 6사단 역시 중국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6사단 7연대는 다른 연대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고장으로 우회해 초산에 도착했다. 7연대1대대의 첨병소대는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경 압록강에 도착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소개한 그 사진이 재현하려고 했던 그 순간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6사단 2연대는 중국군에게 고전 중이었다. 19연대까지 투입했으나 진격이 아니라 전 병력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압록강에 다다랐던 7연대는 압록강 강물을 수통에 담기는 했으나 그 대가는 몹시 컸다. 과도한 진격으로 결국 퇴로를 차단당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으나 미8군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는 이들이 정규 중국군이 아니고 중국군에서 차출한 조선인 병사들을 인민군에 보강한 것으로 분석했다. 최초 정보의 실패는 이후 정보의 실패를 누적시키고 있었고 재앙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강변에 도달한 감격, 그 참혹한 대가
 

1950. 10. 베이징. 중국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미군의 북진에 항의하는 군중집회를 열고 있다. ⓒ NARA

 
북한 인민군이 미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에 도달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제 국토완정(國土完征)이라는 김일성의 구호가 곧 실현될 것 같은 감동과 결의가 넘쳤을 것이다. 적어도 지휘부는 고지가 바로 저기이고 곧바로 선제공격의 효를 거두며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끝내리라 희망이 지배적이었을 것 같다.

병사들은? 누구는 위대한 업적의 선봉에 서서 결의를 다졌을 것이고, 누구는 이 전쟁이 언제나 끝날지, 당장의 전투에 생사를 휘둘리면서도 속에서는 자신의 생사와 가족의 안위에 불안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국군이 미군의 참전에 힘입어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달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제 북진통일이라는 이승만의 구호가 곧 실현될 것 같은 감동과 결의가 넘쳤을 것이다. 적어도 지휘부는 한중 국경이 바로 여기이고 곧 반격과 역전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희망이 유엔군 사령부와 대한민국 전쟁 지휘부에 넘쳤을 것이다.

병사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의 공중폭격의 공포 속에 보급이 급격하게 위축돼 가는 현실에서 근심이 뒤섞였을 인민군에 비해, 압록강의 국군은 꽤나 더 낙관적이었을 것 같다. 물론 전장의 공포가 없을 리는 없겠지만 세계 최강 미군의 군사력과 보급력은 그런 근심을 최소한으로 덮어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감격만은 아니었다. 아직 적군이 항복할 의사를 보이지도 않았던 상황이다. 김일성은 미군이 그렇게 빨리 참전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국과 한국은 중국군이 정말 참전하리라고는, 그것도 그렇게 신속하게 참전하리라고는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변에 도달한 감격은 곧 희망사항을 현실로 믿어버린 당장의 보상은 됐으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대단히 참혹했다. 참혹한 결과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다시 38선을 생각한다. 양자간의 갈등과 전쟁의 논리로 하면 북한이 선제공격으로 전면전을 벌였다. 그러니 이를 격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북진통일까지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정당성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38선을 넘는 북진은 남침에 대한 강렬한 반작용인 이상 누구도 저지하거나 자제시킬 수 없는 수순이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도 '한국군이 아닌 군대'가 38선을 넘으면 자신들도 참전하겠다고 했으니 한국군의 38선 돌파는 묵인한다는 뉘앙스로 발언하고 있었다.

결과론이지만 다른 발상이 있을 수도 있다. 전쟁을 통해 파괴되는 건 산하와 재화이고, 죽는 것은 백성들과 병사들이다. 북한이 남으로 침범할 때도 그랬고 유엔군이 북진할 때도 다르지 않다. 유엔군이 38선을 포기하고 남으로 후퇴할 때는 더더욱 심했다. 그런데 북한이 남침을 서울과 한강에서 멈췄다면? 북진을 38선에서 멈췄다면? 평양-원산 또는 정주-영원-함흥선에서 멈췄다면? 그러나 이런 가정은 허무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허무한 탄식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밀리는 쪽의 사생결단도, 이기는 쪽의 냉정한 절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랬다. 반대로 유엔군과 국군이 38선까지 다다랐을 때도 마찬가지다. 국민, 인민, 백성, 민족, 사람, 생명... 이런 것은 항상 부차적이었고 권력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한 크고 작은 명분으로 소비되곤 했다.

그래도 복기해 보는 것이니 상상의 가정이라도 붙여보는 것이다. 누구도 멈추지 않은 그 38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지선이 아니라 급가속 돌진선이었다. 정전회담 기간 내내 지루하게 이어진 고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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