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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지혜학교 인문반 철학 수업에 관한 대강을 세 번의 글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러고도 남은 이야기들이 있다. 오늘은 자투리 이야기들을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늘어놓아 보려고 한다. 

1.
매년 겨울, 1년 생활이 마무리될 즈음 나는 5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인문반 철학 수업을 소개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한다. 각자 자기의 눈으로 직접 글을 읽고,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며, 자기의 손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이다. 텍스트를 다루는 힘을 길러내는 과정이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고된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별 다른 수가 없다. 오랫동안 이런 힘든 훈련을 견디려면 어떤 '태도'를 내면화하는 수밖에.

나는 이 지점에서 '협력과 연대'라는 태도를 강조한다. 하나의 역설이다.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자기 공부에 몰입을 해야 하는 이 시기에, 실제로 이러한 공부를 잘해내려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읽기·쓰기의 수준의 차이를 뛰어넘어 다 같이 협력하고 연대해야 한다. '으쌰으쌰! 힘들어도 한 번 해보자! 다 같이 힘내보자'며 서로를 북돋워야 한다. 자기 책상 앞에서 책을 붙들고 씨름한다고 해서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나는 옛 헬라스의 시민들이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팔랑크스'(phalanx)를 화면에 띄운다. 창과 방패로 빽빽하게 모여있는 밀집 대형. 이렇게 뭉쳐야 큰 싸움을 버텨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패의 자리이다. 하나의 방패는 자기 몸만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즉 나의 방패는 나 자신의 몸의 절반과 옆 사람의 몸의 절반을 막고 있다. 그리고 옆사람의 방패는 또 옆사람의 몸과 그다음 사람의 몸의 절반을 막고 있다. 그렇게 방패와 방패가 꽉 맞물려, 서로가 서로를 연이어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옛 헬라스의 밀집전투대형, 팔랑크스의 상상도 당시 병사들, 즉 시민들은 방패로, 자신과 옆 사람을 함께 지킨다. 내가 미처 막지 못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의 방패가 막아줄 것이다.
▲ 옛 헬라스의 밀집전투대형, 팔랑크스의 상상도 당시 병사들, 즉 시민들은 방패로, 자신과 옆 사람을 함께 지킨다. 내가 미처 막지 못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의 방패가 막아줄 것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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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반 철학 수업도 마찬가지다. '읽기', '토론하기', '글쓰기' 과정에서 곳곳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채워주는 활동으로 가득하다. 한 사람이 읽으면 다음 사람이 요약해 준다. 논제를 서로 올리고 함께 고른 다음에 다 같이 의견을 주고받는다. 합평을 할 때에도 글에 관한 생각과 질문을 주고받는다. 

더 중요한 것은 수업 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 과제하는 저녁 시간이다. 이 시간에 각자의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자기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글에 관심을 가지고 묻고 답하며, 다 같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 서로가 힘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나의 이 노력이 우리 모두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관련해서 2020년, 한 학생이 철학 기말과제 작업을 하는 모습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교실 뒤 '날 것의 장면'들을 볼 수 있다(자유가 먼저인가, 억압이 먼저인가? 멘탈 터지는 고3들의 철학 글쓰기 알록달록한 인문반 VLOG).

2. 
수업에서의 학생의 성장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이런 장면들도 떠오른다. 학생들이 보여주는 '성장의 폭'이 제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수년간 지켜본 결과, 어떤 학생들은 1년 동안 눈에 띄는 성장을 보이는 반면에 어떤 학생들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성장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1년 내내 '제자리걸음'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테지만 내 눈에 겹쳐 보이는 모습은 이런 것들이다. 그 학생들은 대개 '무기력'했다. 힘이 없었다. 나는 단적으로 어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를 포함한 주변의 어른들의 힘이 아이의 힘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런 경우가 있다. 주변의 어른들은 학생을 위해서 '좋은 경험'을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것도 '좋은 경험', '양질의 경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제가 아니라 이 주제로 글을 써야 하지 않겠니?' '그 생각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더 낫지 않겠니?' '그 길이 아니라 이 길로 가야 하지 않겠니?'하며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을 강권한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법이 틀렸다. 학생들에게는 그냥 '자기의' 경험이 필요하다. 뭘 하든 간에 스스로 선택해서 기쁘고, 슬프고, 흥겹고, 화나고, 속상하고 뿌듯하고, 절망스러운 일들을 골고루 겪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대하는 '좋은 태도'다. '단 한순간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경험은 나의 삶을 채우고 이루는 경험'이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골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험이든지 간에 그것을 자기가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속에서 여러 경험들을 쌓은 학생들은 초반에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6개월 정도 지나면 조금씩 생각의 힘이 자라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핵심 생각을 잘 설정하며, 어떤 이는 자기 경험을 정직하게 마주하기 시작한다. 또 어떤 이는 여러 가지 텍스트들을 잘 엮어 내기도 한다. 

반면 자기 힘이 없는 학생들은 자기 글 속에 빛나는 생각의 조각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애써 꺼내 보여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이걸로 더 잘 써봐야겠다'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약간의 시도를 반복하다가 금세 좌절하고 포기한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당신의 자녀가, 우리의 학생이 자기 생각과 판단의 주체가 되길 원한다면, 과감하게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한다. 뒤로 물러나서 학생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 더 나아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안전한 마음의 공간까지 필요하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명백하게 해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행착오 속에서 여러 가지를 겪도록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 속에서 여러 일들에 대해 '숙고'하고 '판단'을 할 수 있는 일이 쌓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한번뿐인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3.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직접 보고 겪고 확인해야 한다. 이는 '철학강독' 시간에도 요구되는 중요한 태도다. 글을 읽다가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지난주 수업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서론의 어느 단락을 읽다가 이런 문장이 나왔다. 

"산업 시대의 두 번째 심리학적 전제, 즉 개인적 이기주의를 배제하면 조화, 평화, 만인의 복지를 가져오리라는 전제는 그 이론적 발단으로부터 오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들에게서도 기만이었음이 확정되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옮김, 까치, 21쪽.

어? 이상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던 앞의 내용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문장이다. 학생들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묻는다. 나도 의자를 당겨 앉은 뒤에, 다시 한번, 차분히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앞문장과 뒷문장, 앞문단과 뒷문단의 맥락을 함께 읽어 본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럴 땐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러분, 저도 이 문장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원문을 직접 확인해야죠." 

"The second psychological premise of the industrial age, that the pursuit of individual egoism leads to harmony and peace, growth in everyone's welfare, is equally erroneous on theoretical grounds, and again its fallacy is proven by the observable data."(산업 시대의 두 번째 심리학적 전제는 개인적인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조화와 평화, 모든 이들이 좋은 삶을 살도록 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는 [첫 번째 전제와] 마찬가지로 이론적 근거에서 잘못되었으며, 그 오류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로 드러난다.)_Erich Fromm, To have or to Be, continuum, 1979, p.5  

학생들과 원문을 함께 봤다. 오역이었음을 확인한 뒤에 나는 학생들에게 덧붙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질문을 한 것은 좋은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서 글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번역문을 읽어도 도저히 모르겠으면 집요하게 '나의 두 눈으로 원문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에 의한 통·번역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오늘날, 우리가 그럼에도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두 눈으로 직접 읽고 경험하고, 그것이 맞는지 틀린 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4. 
학생들은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함께 성장' 해야 한다. 인문반 철학수업을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생각들을 이번 글에서 짧게 다뤘다. 이뿐만 아니라 인문반 철학수업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치, 덕목, 교육적 요소들이 있다. 이를 교육과정에 담아내기 위해 동료 철학 교사들과 함께 어떤 수업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고,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수년간 시도했던 파도 앞에서 모래성 쌓는 일을 또다시 앞두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게시되었습니다.


태그:#광주지혜학교, #철학교육, #대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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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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