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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의 글에서 강조했던, 학생들이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텍스트로 쌓는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기에 독서교육의 역할이 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그 생각을 글로 쓰는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텍스트로 읽는 힘이 길러진다. 동시에, 책이라는 텍스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자기 경험이라는 텍스트를 겹쳐야 한다는 것을 독서교육을 통해 배운다.

독서교육의 경우에도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2012년에 나는 학교의 일을 시작하자마자 '지혜학교 독서교육 계획'을 세우는 프로젝트의 간사로 일했다. 한 학기 동안 독서교육계획을 수립하는 회의를 이어 나갔다. 새내기 연구원이었던 나는 선배 교사들의 회의 발언을 기록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 정리해서 자료로 만들었다. 

그 후로 또 1년 동안 이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어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는 독서교육 관련 연구 자료들을 더 찾아 정리하고 교사회의 검토를 받은 뒤에, 2014년 학부모 총회 자리에서 '2014년 지혜학교 독서교육계획'을 발표했다. 학부모들 앞에서 나는 '이 계획대로 차근차근 교육하면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자랄 것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했다. 학부모들은 지지와 의구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젊은 선생님이 애쓰시네요' 하면서 박수를 보냈다.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계획서는 슬그머니 학교 구석 어느 서류함 속으로 들어갔다. 그중에 남을 것은 남고 사라질 것은 사라졌다. 그 계획은 왜 사그라들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계획은 너무 '단순'했다. 10대의 뇌 발달의 순서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읽힐지 단계별 로드맵을 세웠다. '계획'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만 학생들이 올라가면 학생들의 독서역량이 쑥쑥 자랄 것처럼 큰소리쳤다. 그 단순하고 단편적인 교육 계획으로 100여 명의 학생들의 독서력이 '한 방에' 해결될 것처럼 굴었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아무리 계획에 따라 학습과정을 촘촘하게 분석하고 맞춤형 전략을 세워서 수업에 들어간다고 한들, 교육 현장에서 변수는 너무나 많다.

누가 가르치는가? 어떤 사람들이 배우는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교사와 학생이 수업을 하는가? 어제 잠은 제대로 잤는가? 배가 고픈가? 친구와 싸웠나? 고백했는데 거절당했는가? 등. 근본적으로 계획과 실행에는 커다란 간극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더욱이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가르침'과 '학생의 배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점을, 학생의 성장을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교사의 머릿속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가슴 안에 있다는 점을, 그 당시 나는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2.  

물론 처음의 계획이 무너졌다고 해서 지혜학교의 독서교육이 길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잠시 함께 학교를 둘러보자. 곳곳에서 독서와 관련한 여러 활동들이 보인다. 각 학년 교실을 들여다보면, 중1부터 고1까지의 학생들은 매주 오전 2시수씩 여러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독서토론글쓰기').

점심밥 먹고 오후가 되면, 각자 관심에 따라 수업을 선택한 학생들이 교실마다 삼삼오오 모여 교사와 함께 한 학기 동안 한 권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독서세미나'). 좀 더 욕심을 내는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매주 쓴 글을 모아 책을 출판하거나('북클래스'), 직접 소설을 구상하고 쓰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지어 올리기도 한다('소설창작수업').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보자. 한 무리의 학생들과 몇몇 교사들이 몇 주간 바쁘게 우르르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지혜의 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다. 지혜의 날에 학생·교사·부모들이 모두 함께 읽을 책, '지혜 1책'을 구성원들의 투표를 통해 고른다.

행사를 기획하는 교사와 학생들은 책과 관련해서 어떤 행사들을 채울지 생각을 쥐어짜 낸다. 학생들은 학교 구성원들을 초대하여 책과 관련된 연극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하고, 독후 에세이글을 돌아가며 발표하기도 한다. 그동안 '지혜의 날'에서 선정된 '지혜 1책'은 다음과 같다. <갈매기의 꿈>, <우아한 거짓말>, <딸에 대하여>, <위대한 개츠비>, <파리 대왕>, <멋진 신세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등.
 
2023년 지혜의 날에 학생들이 <오이디푸스 왕> 연극을 준비하여 무대에 올렸다.   2023년 6월, '지혜의 날'에 학생들이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이와 연계하여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 2023년 지혜의 날에 학생들이 <오이디푸스 왕> 연극을 준비하여 무대에 올렸다.  2023년 6월, '지혜의 날'에 학생들이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이와 연계하여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 추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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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어도 여러 가지 독서모임이 이어진다. 모임에 미리 신청한 학생들이 각자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각자 읽고 난 생각들, 자기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이야기한다("방학에 소설 3권 읽기"). 저녁이 되면 부모들이 같은 방식으로 고전 작품을 읽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에 머물러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어느새 인간답게 사는 이야기나 좋은 부모 노릇에 대한 고민들을 두런두런 나누기도 한다("학교 밖 독서세미나").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독서 관련 활동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이런 장면을 보다 보면, 개인적으로는 1년 반 동안 고생해서 만든 계획서가 학교 구석에 잠들어 있다고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다. 계획이 촘촘하지 않다고 해서 공부가 흐지부지한 것은 아니다. 지혜학교의 독서교육은 꽉 맞물려 있는 단단한 구조물이 아니라, 얼기설기 느슨한 그물망으로 펼쳐져 있다. 

만일 이곳이 사교육 시장에서의 교습소처럼 '기능적으로' 독서력을 올려야 하는 곳이라면, 교사들은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시하고 당근과 채찍을 손에 흔들며 정해진 목적을 향해 수업을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성취 수준이 어떤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한 뒤에 잘하는 것은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은 노력하라는 지도를 할 것이다. 원하는 성과를 얻으면, 학생도 부모도 '이 학교는 투자 대비 수익이 잘 나는 곳이구나'하며 흡족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런 교육은 불가능하다. 앞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지혜학교는 각각의 학생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터전이다. 100여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6년 동안 빡빡한 학습 계획을 적용하기 힘든 여건이다. 이는 마치 가정에서 오랫동안 다수의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스파르타식 입시 기숙학원에서처럼) 강도 높은 공부를 시키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지혜학교에서는 '100여 명의 제각기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6년간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강요하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학교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있다. 학교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서활동들, 지혜학교의 독서교육이라는 그물망을 넓게 펼쳐 놓으면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시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집어 들겠지' 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2023년 9월 기초과정(중1, 2) 학생들이 백일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23년 9월 기초과정 학생들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을 읽고 백일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2023년 9월 기초과정(중1, 2) 학생들이 백일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23년 9월 기초과정 학생들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을 읽고 백일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지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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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독서교육에서 개인의 자발성이나 동기를 강조하며 커리큘럼을 자유롭게 펼쳐 놓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개개인의 문해력의 수준이 너무 들쭉날쭉 하지 않을까?' 이에 어느 고2 학생의 고민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이번 글을 마칠까 한다.  

"쌤, 제가요, 사실 읽고 쓰는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지난 5년 동안 요리조리 피해서 어떻게든 도망 다녔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책 읽고 글 쓰는 인문반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2017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고3으로 올라가는 한 학생이 쭈뼛쭈뼛 어렵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친구가 무서워하는 곳은 바로 '인문반'이다. 특히 인문반의 '철학 수업'은 학생들에게는 졸업 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골짜기'와 같다. 

인문반 철학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매주' 철학 책을 읽고, 스스로 주제를 설정하여 한 편의 글을 써낸 뒤 교사의 피드백을 받는다. 그 일을 1년 내내 반복한다(인문반 철학 수업에 대해서는 조만간 상세히 다룰 것이다). 수능 준비를 하거나 다른 진로를 위해 외부학습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들은 모두 인문반을 선택한다. 5년 동안 천둥벌거숭이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학생들이 글로 된 감옥에 갇혀 매주 머리를 쥐어뜯는다. 

매주 글을 써내기 위해서 학생들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책 읽는 기술, 글 쓰는 기법 등이 아니다. 바로 들쑥날쑥한 경험들이다. 자유분방한 생각들이다.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드러낼 때, 눈치 보지 않는 편안한 마음이다. 고2 때까지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감정과 자기 안에 맺히는 생각을, 누가 평가할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편하고 자유롭게 드러내고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험을 충분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학교에서는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텍스트로 쌓는 일'을, 빡빡한 커리큘럼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의 형태로 느슨하게 펼쳐져 있는 독서교육이 넉넉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 지혜학교의 여러 교육과 활동들은, 마치 어느 성경 구절처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사족) 앞서 소개했던 그 학생은 결국 수개월 간 울며 불며 글 쓰려고 몸부림쳤다.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늦은 가을의 어느 수업 시간에 드디어 한 편의 글을 제대로 써냈다. 나는 그 학생의 글을 받아 들고 끝까지 읽은 뒤, 자리에서 일어서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박수를 받던 그 학생의 표정이 선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게시되었습니다.


태그:#광주지혜학교, #철학교육, #대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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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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