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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지난달 22일 오전 8시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서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3주기 제57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재개했다. 활동가들은 서울교통공사의 강제 퇴거 명령을 받고 역사 밖으로 쫓겨났고 시위는 1시간 반 만에 마무리됐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지난달 22일 오전 8시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서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3주기 제57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재개했다. 활동가들은 서울교통공사의 강제 퇴거 명령을 받고 역사 밖으로 쫓겨났고 시위는 1시간 반 만에 마무리됐다.
ⓒ 복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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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가 계속 된다. 20년 이상 지속된 이동권 투쟁이지만, 성인이 된 후에 목격한 것만 알고있다.  당시 전장연 시위와 이에 대한 시민들과 정치인의 반응은 내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시위가 계속되고 있기에, '장애'는 자주 묵상하는 단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비난했다. 폭력적인 시위가 아닌 대화로 해결할 수는 없겠냐고 했다. 정치인도 가담했다.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당대표는 '선량한 시민의 불편을 일으켜 뜻을 관철하겠다는 비문명적 행위'라고 했다. 준법정신을 강조하며 폭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장애인들은 여전히 지하철 앞에 엎드린다. 그들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고, 최근엔 폭력적인 수단으로 제압하려고 했다. 공권력은 무자비한 태도와 언성으로 그들을 통제했다. 시민들은 장애인을 외면했고, 장애인들은 여전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권리만 내세우는 불량집단으로 남아있다.

약자의 위악과 강자의 위선

전장연 시위를 지켜보며, 위악과 위선에 대한 고 신영복 선생의 글을 생각한다. 그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 지켜본 수감자 중 요란하고 무지막지한 문신을 두른 수감자일수록 그 내면이 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폭력과 난폭을 표상하는 문신은 강한 자의 것이 아니라 약자가 스스로의 약함을 위장하기 위해 선택한 도구라고 말했다. 짐짓 악한 척함으로 자신의 약함을 가리려는 위악은 약자의 의상(衣裳)이며, 위선은 강한 자의 의상이라는 말이 전장연 시위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 같았다.

전장연 장애인들은 물리적 수단으로 투쟁한다. 그래서 잘 보인다. 닫히는 문틈에 휠체어를 밀어넣고, 출발하려는 열차에 몸을 엎드린다. 이 과정에서 몸에 상처가 나기도 하고, 옷이 벗겨지기도 하면서 위험하거나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그 광경이 불쾌함을 유발하기에 그들의 시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유와 관계없이 시민의 불편을 초래하는 행위는 그들에겐 '불량하고 비문명적인 행위'가 된다.

반면 전장연의 시위를 비판하고 대화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은 언어로 대응한다. 그래서 잘 안 보인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며, 정제된 법 질서를 요구한다. 점잖게 양복을 갖춰입었으며,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엔 흐트러짐이 없다. '참말로' 세련됐다. 이런 이들이 주장하는 대화는 '선량하고 문명적인 행위'가 된다.

약자의 위악은 눈에 띄지만, 강자의 위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관조와 실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장애'를 관조의 영역에 두는 우리는 약자의 위악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장애를 실천의 영역에 둔다면 약자의 위악과 강자의 위선을 모두 볼 수 있다. 위악과 위선을 모두 보게 되면, 사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장애를 관조의 영역에 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가령, 비장애인인 내게 장애는 삶의 일부가 아니며,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일이다. 장애를 가진 자를 안타까워하거나, 닉 부이치치 등 장애를 극복하는 자에게 존경을 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장애' 자체가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장애가 내 삶에 침범하는 순간, 장애 가진 이들은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된다. 전장연 시위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비난은 장애를 관념으로 바라보는 데서 비롯했다. 비장애인인 다수 시민의 삶에 장애가 '침범'한 것이다.

장애를 관념이 아닌 '실천'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장애를 관념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장애를 실천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장애를 실천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애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특정한 '장애'가 그것을 가진 자의 정체성임을 인정하고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파란 눈을 가진 이웃과 빨간 머리를 가진 이웃이 그것을 각자의 정체성으로 여기고, 우리가 그것을 배척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장애 또한 하나의 정체성에 불과한 정도로만 여길 수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인식이 가능해질 때 전장연 시위는 더 이상 장애인들만의 일이 아니게 된다.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이웃의 일이 된다. 우리 모두는 차이를 가지는 사람으로서, 각자의 '차이'가 차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의 일이 된다.

머리색이 빨갛거나, 눈이 파란 것과 관계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머리카락의 색이나 눈의 색으로 인해 제약이 있어선 안된다. 만일 제약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그것의 원인이 사회 구조 탓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시정을 요구한다. 왜 빨간 머리를 가졌느냐고, 왜 파란 눈을 가졌느냐고 비난하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이에게도 동일하다. 휠체어를 타고 있건, 목발을 짚건 간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제약이 있어선 안된다. 제약이 있고, 그 원인이 사회 구조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시정을 요구한다. 다리도 못쓰는 사람이 불편하게 왜 밖에 나왔느냐고 비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 장애인들을 그저 차이가 있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관념이 아닌 실천의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지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공동체가 안전하고 질서있게 유지되려면 공동체 구성원끼리 합의된 '공유된 가치'가 필요하다. 개인이 가진 배경과 관계없이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만 하면 공동체가 보장하는 보호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은 공유된 가치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들을 차별없이 누릴 수 있다. 이러한 공유된 가치가 지켜질 때 공동체의 안전과 존속이 보장된다. 장애를 관념이 아닌 실천으로 대하는 태도는 공유된 가치를 지키는 행동의 일환이다. 누구든지 남과 다른 '차이'만으로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내가 남들과 다르게 가진 '차이'로 인해 내가 공동체가 보장하는 권리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장연의 시위에 신영복 선생의 글을 가져다 놓는 것을 비약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더불어 삶'이란 말로 쇠귀 선생의 사상을 압축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저서와 강연 곳곳에 함께사는 삶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는 위의 시각을 지나친 비약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되는 시위에 시민들의 불편이 계속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질거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기자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전장연, #신영복, #위악, #위선,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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