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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수산초등 학생들이 그림책을 만든 이유
 
수산초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그림책 <어쩌다 소풍>과 <수산한못의 여름>.
▲ 수산초등 그림책 수산초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그림책 <어쩌다 소풍>과 <수산한못의 여름>.
ⓒ 수산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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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요일, 지우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수산한못을 가보기로 했어요. 수산한못, 왠지 이름이 '수상한 못' 같지 않아요?' <어쩌다 소풍>

'수산한못의 뜻은 수산리에 있는 아주 큰 연못이라는 뜻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많다', '크다'라는 뜻으로 '하다'라고 하지요.' <수산한못의 여름>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초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2023 그림으로 그려가는 수산초 이야기' 두 그림책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3, 4학년 14명 전원이 참여한 <어쩌다 소풍>에는 수산한못을 나이에 걸맞게 '수상한 못'으로 표현하는 재치가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5, 6학년 18명 전원이 만든 <수산한못의 여름>에는 상급생다운 지명 풀이가 나온다.

4학년 하지민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의 아이들과 생물들의 입장이 되어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습지에 사는 동식물들을 이대로 살게 내버려두라'고 어른들에게 당부하는 듯하다.

학생과 주민이 함께 준비한 습지 기록전

성산읍 주민 등 어른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으로 성산읍 일대 수십 군데 습지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생태를 관찰하고 글·사진·영상으로 기록했다. 그 결과물로 성산초등학교 도서관에서 11월 22~28일 '성산읍 내륙습지 기록전'을 열었고, 지금은 학교 앞 '책방 무사'에서 연말까지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수산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성산읍 내륙습지 기록전’. 안내판 바로 옆 사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성산읍 습지에서 발견된 전주물꼬리풀이 보인다.
▲ 성산읍습지기록전 수산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성산읍 내륙습지 기록전’. 안내판 바로 옆 사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성산읍 습지에서 발견된 전주물꼬리풀이 보인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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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이 이런 멋진 그림책을 만들고 뜻있는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수산초등학교 선생님들과 성산읍 주민, 습지·사진·그림책 전문가 등이 오래 전부터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활동해온 덕분이다. 한미숙 교장과 서지영·김수미 교사는 제주도교육청에서 습지학교 지원, 동녘도서관에서 그림책 지원을 끌어냈다.

성산읍 주민이자 습지보전활동가인 오은주·오창현 남매와 노시원·이성권·진경심·김금순씨는 습지조사활동을 함께했고, 강은미 그림책작가, 고제량 습지전문가, 장봉철·주석종·김수오·홍기홍 사진전문가도 그림책과 전시물 제작을 도왔다.

'개발주의'라는 불도저 앞에 날로 훼손되고 있는 성산읍 일대 습지들. 그것을 보전하려는 이들은 전문가도 끼어 있지만 대개 아마추어 활동가인데, 열정만은 프로를 넘어선다. 오은주 습지조사팀장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의기투합한 계기는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자는 거였다고 한다. 
 
성산읍 일대 습지보전활동가들. 아랫줄 오른쪽이 오은주 팀장.
▲ 성산읍습지조사팀 성산읍 일대 습지보전활동가들. 아랫줄 오른쪽이 오은주 팀장.
ⓒ 성산읍습지조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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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제주제2공항 반대운동을 펴왔는데 올 3월 환경부가 전략영향환경평가를 '조건부 동의'로 통과시키자 무력감에 빠졌어요. 그래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멸종위기 식물과 수많은 동식물이 살고 있는 성산읍 습지를 기록하자고 제안했는데 많은 분들이 적극 호응했습니다."

성산읍 일대에서 찾아낸 43개 습지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지금까지 성산읍 일대에서 찾아낸 습지는 43군데나 된다. 제주도는 바윗덩어리와 화산토로 뒤덮여 있어 지표수가 부족한 곳으로 알려졌지만 성산읍 수산들은 상식을 뒤엎는 곳이다.
 
‘성산인근 습지지도’에는 아름다운 습지 사진과 위치를 그래픽으로 표시해 놓았다.
▲ 성산읍습지지도 ‘성산인근 습지지도’에는 아름다운 습지 사진과 위치를 그래픽으로 표시해 놓았다.
ⓒ 성산읍습지조사팀, 마을소식지 <곱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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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만든 제주 1호 목마장

말 사육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기술과 경험을 자랑하던 몽골제국은 삼별초군을 토벌한 뒤 일본정벌을 준비한다. 제주도에는 10개 목장을 설치하는데, 1276년 1호 '시범목장'을 만든 곳이 수산들이었다. 이 목장에는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가 최상급 말 160마리를 보내온 적도 있다.

수산들을 조망할 수 있는 오름이 '수산'(水山)인데, 원래 우리말 이름이 '물뫼'였던 것은 분화구에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수산봉 서쪽 수산들 일대에 건설될 예정인 제2공항 근처에도 수산뱅뒤와 삼달리 등에 습지군락이 있다.

수산초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탐사하고 그림책도 만든 수산한못은 원래 자연스레 만들어진 연못은 아니다. 몽골 지배 당시 말 사육 두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말에게 먹일 물이 부족해 크게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산한못 사진 아래 쪽에 반원형 돌담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말물통이다.
▲ 수산한못 말물통 수산한못 사진 아래 쪽에 반원형 돌담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말물통이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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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된 줄 알았던 전주물꼬리풀의 '재림'

수산한못에 자라는 전주물꼬리풀은 1912년 전주에서 처음 발견돼 그런 이름을 붙였다. 오랜 기간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1980년 수산에 있는 습지에서 자생하고 있는 게 극적으로 발견됐다.

제주 여미지식물원은 2010년 이 풀을 채집하고 증식 작업을 벌여 2013년 수산한못에 200포기, 전주에 3000포기를 기증했다. 수산한못의 200포기는 10년 만에 2만여 포기로 불어났다.
 
청년들이 창간한 수산마을 소식지 <곱을락> 올 여름호 표지에는 수산한못을 드론으로 찍은 사진이 실렸다. 오른쪽 사진은 수산한못에 사는 멸종위기종 전주물꼬리풀.
▲ 수산마을소식지 <곱을락> 청년들이 창간한 수산마을 소식지 <곱을락> 올 여름호 표지에는 수산한못을 드론으로 찍은 사진이 실렸다. 오른쪽 사진은 수산한못에 사는 멸종위기종 전주물꼬리풀.
ⓒ <곱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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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미지식물원에서 전주물꼬리풀 복원사업을 담당한 곽재희 사업팀장은 성산읍 마을소식지 <곱을락> 필진인 김민주씨와 인터뷰하면서 "멸종위기 식물은 대부분 잘 사는 식물들인데 신도시와 도로 개발 등으로 서식지가 사라지면서 줄어들게 된다"고 말했다.

법정보호 조류 40종, 공항 들어서면 충돌 우려

<제주, 그대로가 아름다워>를 쓴 김예원씨 등에 따르면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 등 성산에서 발견되는 법정보호종은 조류만도 32종이나 된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했지만 지남준씨의 화보집 <성산포의 새>에서 확인한 흑기러기, 고니, 호사비오리 등 8종을 합하면 법정보호종은 40종에 이른다. 숫자가 줄고 있는 관심대상종까지 합하면 66종이다. 이들은 해안과 오름에서도 발견되지만 습지에서 서식하는 것들이 많다. 제2공항이 들어설 경우 조류 충돌의 위험성이 있다.

마을 청년들이 창간한 <곱을락>은 '숨바꼭질'을 뜻하는 제주어를 제호로 삼았다. 숨겨진 성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아내는 데 힘을 쏟겠다는 취지다. 제주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시민모임 '제주가치' 운영위원으로 활동한 오창현 수산리청년회장은 "제2공항 반대가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한 거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쌓아 올린 지역공동체와 문화, 최고의 생태환경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느냐"고 반문했다.

"관심을 갖고 돌아보니 우리 주위에 귀한 것이 참 많더라고요. 우리 마을에 있는 생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보물인 거예요. 비바리뱀, 맹꽁이는 정말 어려서부터 흔하게 봐서 보호종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 비바리뱀이 멸종위기 보호생물 1급에 전국에서 제주에서만 관찰되는 뱀이라 하더라고요. 제가 마을에서 행복하게 자랐던 것처럼 우리 후배들도 행복하게 자랄 권리가 있잖아요. 어른들이 그걸 빼앗으면 안 되지요."

 
‘책방 무사’ 간판은 오른쪽 대문 기둥에 보일 듯 말 듯 걸려있고, ‘아름상회’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있다.
▲ 책방 무사 ‘책방 무사’ 간판은 오른쪽 대문 기둥에 보일 듯 말 듯 걸려있고, ‘아름상회’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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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의 책방 간판이 '아름상회'?

습지기록전은 지금 수산초등학교 앞 '책방 무사'에서 열리고 있는데, 큰 간판이 '아름상회'로 돼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그 간판도 원래는 '한아름상회'였는데 첫 글자 부분이 태풍에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한아름'이 슈퍼마켓 이름에나 어울린다면, '아름상회'는 책방 이름으로 제격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름'은 '아름답다'의 어근이고 '지식이나 지혜가 있음'을 뜻하는 '알음'이 연철된 것처럼 보이니까. 이 기이한 책방의 주인은 뮤지션이자 작가인 '요조'다. 그는 <오늘도, 무사>라는 책에서 간판을 갈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오래된 세월을 증명하는 낡은 건물에 대한 나의 애착이다. 서울 계동에서 책방 무사를 운영할 때도 외관과 간판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던 나는 제주에서도 같은 이유로 지금의 공간을 선택했다. (한)아름상회가 오랫동안 수산리의 친목을 책임지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는 점도 내 마음을 기울게 했다. 마을 사람들의 정이 켜켜이 담겨 있는 곳을 그대로 더 지켜나가고 싶었다.
 
‘책방 무사’에서 성산습지기록전을 설명하고 있는 최호현 책방지기.
▲ 책방무사 ‘책방 무사’에서 성산습지기록전을 설명하고 있는 최호현 책방지기.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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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가 서울에서 처음 연 '책방 무사'도 '진 미용실'이라는 원래 간판을 그대로 놔뒀었다. 그는 한 달에 두어 번 서울과 제주를 오가기에 일상의 제주 책방 일은 최호현씨가 맡고 있다. 책방 무사 간판은 안 보일 정도로 작지만 이름이 알려져 보통 하루 20~50권쯤 책이 팔리는데, 아주 춥거나 궂은 날에는 두 배쯤 나간다고 했다.

호현씨는 <곱을락> 필진이기도 해서 수산초등학교에서 하던 성산습지기록전을 이곳으로 유치했다. 그는 경남 합천 출신이지만 제주의 자연과 책이 좋아 3년째 이곳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방지기인 동시에 성산의 습지지기이고, 노인이 많은 마을을 지키는 청년(28)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성산습지, #수산초등학교, #책방무사, #한미리스쿨, #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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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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