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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국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지난달 13일 남해 아난티 그랜드레지던스홀에서 열린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현대적 재발견' 심포지엄에서 "고려대장경 판각장소는 강화 선원사가 아니라 남해"였음을 강조했다.

문화재청 관리국 국립문화재 연구소 예능민속실장과 동산분과 문화재 위원, 한국문화유산 연구원 원장 등으로 일했거나 일하고 있는 박 교수는 '고려대장경에 대한 재고찰' 논문을 썼다. 또 <사경>, <전국 사찰 소장 목판질>, <동산 문화재 지정보고서> 등의 책을 냈으며 해외전적 문화재와 일본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조사한 전문가다. 

박상국 교수는 2010년 초반부터 고려대장경이 모두 남해에서 판각됐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박 교수의 고려대장경 남해 전량 판각설은 학계의 통설이 아니라 일부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 교수가 어떤 근거로 고려대장경 남해 전량 판각설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지난달 13일 있었던 심포지엄 기조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아래는 박 교수의 강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박상국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지난달 13일 남해 아난티 그랜드레지던스홀에서 있었던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현대적 재발견 심포지엄`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박상국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지난달 13일 남해 아난티 그랜드레지던스홀에서 있었던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현대적 재발견 심포지엄`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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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모두 한곳에서 판각했던 것"

고려대장경판에 대한 잘못 알려진 것 중 하나는 필자가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에서 모두 판각했다고 발표한 이후, 분사가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는 논문들이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간기와 각수 조사를 해보지 않고 쓴 논문들이었다. 

먼저 간기 조사에서 고려국분사대장도감으로 된 판을 조사해 보면, 대장경판 전체 6570권 가운데 500권이 분사 표시가 있는데, 분사판 가운데 473권의 간기에 `분사`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크기가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분사`가 표시된 판은 27권 외에 모두가 상감수법(목재 등을 파내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끼우는 수법)으로 갈아 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장경 판각은 `대장도감` 한 곳에서만 했던 것이다.

대장경판은 여러 곳에서 판각한 사실이 없었고, 대장경판은 여러 곳에서 분산시켜 판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모두 한곳에서 판각했던 것이고, 분사 표시는 대장경 판각완료 시점에 와서 필요에 의해서 '분사'를 상감수법으로 집어넣어 판각했던 것이었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72종의 경판 가운데, 21종은 대장도감판과 섞여 판각됐다. 

"남해에서 판각한 후 강화도 판당으로 운반"

게다가 이들 경판은 강화도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36~1251년까지 16년 동안 새겼다고 잘못 알려지는 데 일조를 해왔다. 그런데 아직도 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일제 때부터 내려온 잘못된 탓으로 최근까지도 계속하여 엉터리 논문을 생산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가 잘못되면 모두가 잘못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100년 동안의 잘못된 오류를 바로 잡는 일이다. 대장경판이 언제 어디서 판각되었는지 다시금 살펴봄으로써 고려대장경판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나가야 한다.
 
박상국 교수는 "간기에서 상감수법으로 대장도감을 파내고 '분사대장도감'이라고 글자 크기를 줄여 새겨 끼워 넣었다"며 "대장경 판각은 `대장도감` 한 곳에서만 했던 것"이라 말했다.
 박상국 교수는 "간기에서 상감수법으로 대장도감을 파내고 '분사대장도감'이라고 글자 크기를 줄여 새겨 끼워 넣었다"며 "대장경 판각은 `대장도감` 한 곳에서만 했던 것"이라 말했다.
ⓒ 남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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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먼저 고려대장경판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새겼는지 육하원칙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누가 - 임금과 군신들이 백성들과 함께, 언제 - 고려 고종 때 16년 간 (1233~1248), 어디서 - 남해에 있던 대장도감에서, 무엇을 - 초조대장경을 기본으로 하여 6570권을 수집하여, 어떻게 - 수기대사 등이 초조대장경, 송판대장경, 거란판대 장경의  내용을 철저히 교정하여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만들었다. 왜 - 몽고군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판이 불타 버려서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대장경 판각을 모두 마치고 난 뒤 대장경 판각을 담당했던 남해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을 강화도의 대장경 판당으로 운반해야 했을 것이다. 그동안 판각 기간에 대한 잘못된 추정은 전래된 역사 자료의 결핍 탓도 있겠지만, 일제 때부터 내려온 기존의  연구성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대장경 판각은 강화도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었다"

대장경 판각은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동안 대장경 판각 장소는 최우의 원찰인 강화도 선원사라고 잘못 알려져 오면서 많은 오류를 범했다. 선원사가 완공된 1245년에 대장경판의  판각은 이미 90%를 넘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장경판의 판각은 선원사와는 관련이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로 창건된 사찰이었기에 용산강 포구와 마주 보는 교통이 편리한 포구였다고 생각된다.

대장경 판각을 총괄하는 곳을 대장도감이라 한다. `고려국분사대장도감`은 대장도감의 산하기관이 아니라, 고려국의 분사(分司)이다. 대장도감의 분사가 아니다. 대장도감의 명을 받아 판각하는 기관이라면 `대장도감분사`라 했을 것이다. 

"남해는 대장경을 판각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해는 대장경을 판각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남해는 진주 일원이 최우의 식읍지였고, 그 이웃 하동은 최우의 처남 정안(정숙첨의 아들)이 대대로 토호였다. 그래서 최우와 정안에 의해 대장경 판각경비를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둘째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이용하여 판각용 목재조달이 용이한 곳이며, 세 번째로 몽고의 침입으로 정부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전 국토가 안심할 수 없었는데 남해는 섬이기 때문에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대장경판 판각은 모두 남해군에서 했다. 쉽게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런데 대장도감은 어명을 받아 대장경판을 판각하는 책임을 지니는데, 전체 숫자 1496종 6570권 가운데, 분사판은 500권 밖에 없다. 고려국 분사 대장도감 외에 분사가 필요한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러 각각 지방의 여러 곳에 분사를 설치할 이유가 있나?

또 하나, '분사'표기가 되어 있는 판은 500권인데, 이 가운데 470권은 상감수법으로 대장도감을 파내고 분사를 보태어 새겨서 끼워 넣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분사대장, 분사대장도감봉, 고려국분사대장 등으로 다른 글자보다 글자가 약 2포인트가 작게 표기되어 있다. 남해에 고려국분사, 대장도감을 설치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리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해시대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고려대장경 판각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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