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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제주4.3평화재단 희생자 위패봉안실에는 돔의 내벽을 따라 신원이 확인된 14,624 영령의 위패가 빼곡히 모셔져있다.
▲ 4.3희생자 위패 제주4.3평화재단 희생자 위패봉안실에는 돔의 내벽을 따라 신원이 확인된 14,624 영령의 위패가 빼곡히 모셔져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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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 행방불명인 표석. 육지 형무소로 이감됐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 인근 골령골 등에서 비밀리에 처형돼 시신도 찾지 못한 4,000여 영혼을 위로하는 표석이다. 제주4.3은 총이라고는 구식 장총 30자루로 무장한 300명 무장대를 토벌하려다 3만명 제주도민과 군경 등을 학살한 대참사였다.
▲ 행방불명인 표석 제주4.3평화재단 행방불명인 표석. 육지 형무소로 이감됐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 인근 골령골 등에서 비밀리에 처형돼 시신도 찾지 못한 4,000여 영혼을 위로하는 표석이다. 제주4.3은 총이라고는 구식 장총 30자루로 무장한 300명 무장대를 토벌하려다 3만명 제주도민과 군경 등을 학살한 대참사였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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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과 현기영의 같고 다른 점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알다시피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한 대목이다. 남북한간 이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으로 꼽히면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국민 필독 소설'이 됐다.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우다."
 
7월 발행된 현기영의 3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의 한 문장이다. 삼팔선이 그어진 직후 일본에서 귀향민이 떠날 때 맥아더사령부가 물었다, 남과 북 중에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고. 그때 제주민들은 "제주도"라고 답했다. 당시 제주는 남쪽 영토였지만 그들이 굳이 "제주도"란 표현을 쓴 데는 남과 북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제주공동체로 복귀하고 싶은 소망이 깔려 있었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제주도 사람이 워낙 많아 해방 후 귀환인구는 6만여 명에 이르렀다.
 
"먼 조상, 탐라국 때부터 우리의 정신 속에는 그런 관념이 박혀 있었던 것 같아. 마음속 굳은살처럼! 우리는 아직도 탐라인인 거여. 탐라가 국호를 잃고 고려에 강제로 복속된 이래로 우리 조상은 중앙 권력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왔주. 오죽 심하게 당했으면 후손인 우리의 정신 속에 그런 관념이 유전되었겠는가? 그래서 우리 제주인은 먼 옛날부터 권력의 지배를 받기 싫어했어." <제주도우다> 2권 167쪽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세력에 맞선 항쟁
 
현기영의 3권짜리 장편소설집 <제주도우다>와 4.3학살을 처음으로 이슈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소설 <순이삼촌>이 실린 중단편집 표지.
▲ <제주도우다>와 <순이삼촌> 표지 현기영의 3권짜리 장편소설집 <제주도우다>와 4.3학살을 처음으로 이슈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소설 <순이삼촌>이 실린 중단편집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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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국어국문학과 김동윤 교수는 저서 <문학으로 만나는 제주>에서 현기영의 1978년 작 <순이삼촌>에 관해 '공동체적인 삶을 유난히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썼다. 제주대 사회학과 백영경 교수는 <창작과 비평> 올 여름호 '작가조명'에서 현기영이 <제주도우다>에서 찾은 키워드는 제주의 '공동체주의'라고 설명했다. 현기영 자신이 지난 7월 제주문학관에서 연 북 토크에서 그 점을 강조했다.

"4.3은 이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투쟁'입니다. 이념적 문제도 물론 있지만 육지 경찰과 군대, 서북청년단, 미군정 같은 외부의 침략자에 대항해서 제주 공동체가 똘똘 뭉쳐서 일으킨 항쟁이에요."

그렇다고 그가 말하는 공동체가 변방의 폐쇄적 공간은 아니다. 그는 자전적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끄트머리에 '절망했을 때는 저 수평선이 나를 가두는 울타리처럼 느껴졌다'면서도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고 썼다.
 
'죽음이 궁극적으로 나를 자연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이렇게 귀향연습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향연습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그동안의 서울생활이란 부질없이 허비해버린 세월처럼 느껴진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 433쪽  
 
북 토크에서 내가 이 부분을 상기시키며 "계속 '귀향연습'만 하실 거냐"고 질문하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내 장지는 제주에 있습니다. 자연친화적인 글을 쓴다면 육지보다는 제주의 자연을 쓰고 싶어요. 제주로 돌아올 시간을 준비하고 실천하겠습니다."
 
조천읍 너븐숭이4.3기념관 옆에는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의 내용을 적은 문학비석들이 널브러져 있고 서있는 비석 앞에는 고무신 두 켤레가 놓여있다. 이처럼 우묵한 ‘옴팡밭’에서 특히 많은 학살이 자행됐다.
▲ <순이삼촌> 문학비 조천읍 너븐숭이4.3기념관 옆에는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의 내용을 적은 문학비석들이 널브러져 있고 서있는 비석 앞에는 고무신 두 켤레가 놓여있다. 이처럼 우묵한 ‘옴팡밭’에서 특히 많은 학살이 자행됐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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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향실 안에 갇힌 제주4.3의 울림

2년 전 12월 제주도민이 된 뒤 제주학에 빠졌는데 특히 '4.3'이란 주제는 언론인이자 연구자인 내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켰다. '명색이 글 쓰는 자가 4.3항쟁에 이렇게 무지했던가?' '4.3 이슈'는 주로 제주도 안에서 연구되고 제기됐을 뿐 육지에는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특히 보수성향 중앙 언론사들은 관심 밖이었고 심지어 제주 MBC나 KBS 같은 공영방송이 만든 특집방송들을 서울 본사에서 무시하기 일쑤였다. 반향실(echo chamber)처럼 제주 안에서만 울림이 반복돼 제주민은 너무나 심각하게 느끼는 사안인데 육지에서는 반향이 없는 상태가 지속돼 왔다.

지금까지 30여 권 4.3 관련 책과 진상조사보고서 등을 읽고 현장을 답사하고 제주4.3연구소에 후원자로 가입한 것은 그런 반성의 결과였다. 지난 28일 4.3연구소와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하는 '현기영과 함께 읽는 <제주도우다> 조천 기행'에 참여한 것도 그 일환이다.

항일과 4.3투쟁이 조천에서 가장 치열했던 이유

70여 명 답사단이 버스 두 대로 처음 도착한 곳은 제주시 외곽 조천초등학교. 조천은 소설 <제주도우다>의 중심 무대인데 제주도의 모든 면을 압도할 만큼 희생자가 많았다. 2021년 6월까지 파악된 4.3희생자 1만4533명 가운데 1950명이 좁은 조천면 출신이었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도 제주읍이 아니라 조천면 출신이 주도했다.
 
조천초등학교 앞에서 이 학교 졸업생인 김경훈 시인(맨 오른쪽부터),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오승국 제주4.3평화투어기획위원장이 설명을 하고 있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이 학교로 모이라고 해놓고 집단학살을 저질렀다.
▲ 조천초등학교 조천초등학교 앞에서 이 학교 졸업생인 김경훈 시인(맨 오른쪽부터),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오승국 제주4.3평화투어기획위원장이 설명을 하고 있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이 학교로 모이라고 해놓고 집단학살을 저질렀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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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천은 제주와 육지를 바닷길로 연결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이곳에 자리잡은 김해김씨 가문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자제들을 육지와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제주 최초 사회주의자'로 일컬어진 김명식도 이 가문에서 태어나 와세다대에서 수학하고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다. 조천지서에서 고문치사를 당해 4.3의 도화선이 된 김용철도 조천중학원생이었다. 인민위원장과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지낸 안세훈과 무장대장 이덕구도 이곳 출신이다.

마침 조천국민학교 출신인 김경훈 시인이 해설을 맡았다. 그는 조천 일대 현장과 관련된 소설 대목들을 복사해와서 살육에 맞선 조천소학교 봉기 장면 등을 답사 참여자들이 낭독하게 했다.
 
봉기의 현장이자 대학살의 현장인 당시의 조천소학교.
▲ 조천소학교 봉기의 현장이자 대학살의 현장인 당시의 조천소학교.
ⓒ 너븐숭이4.3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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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횃불들이 펄럭거렸다. 어둠과 피가 뒤섞인 검붉은 횃불, 불의 붉은 혓바닥들이 펄럭거리면서 어둠을 핥았다. 불빛에 건들거리는 눈망울들, 어둠 속에서 희뜩거리는 여자들의 머릿수건과 흰 만장들…… 장내는 마치 귀기에 사로잡힌 듯했다. 누군가 일제 때 부르던 추도가를 불렀다." "산에 사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독립 정신 살아 있다."

"쿵쿵쿵,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가슴마다 북소리가 진동하며 근육이 꿈틀거렸다. 북소리에 맞춰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면서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왓샤를 외치기 시작했다. 왓샤! 왓샤! 왓샤! 조회대 위에서 김영환이 다시 외쳤다." "지축을 울려라! 우리의 행진을 저들은 두려워한다." <제주도우다> 3권 70쪽
 
조천을 피로 물들인 서북청년단

조천중학원은 1946년 주민들이 스스로 지은 학교다. 1947년 3.1절 시위 이후 시위 주동자가 대개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이에 대응하는 경찰의 감시도 심해졌는데 조천지서는 중학원 바로 앞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원래는 경찰과 교사들이 배구시합도 하는 등 동네 친구들이었는데 경찰이 서북청년단 등 외지인으로 교체된 뒤 살벌한 적대관계가 됐다. 조천소학교와 조천지서 앞뒷밭은 나중에 마을 사람들을 소집해 대량 학살하는 처형장이 됐다.
 
이덕구 무장대장의 종손녀(오른쪽)가 답사에 참여해 조천중학원 터에서 증언을 한 뒤 현기영 작가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이덕구 무장대장 종손녀 이덕구 무장대장의 종손녀(오른쪽)가 답사에 참여해 조천중학원 터에서 증언을 한 뒤 현기영 작가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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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초를 겪다가 입산해 무장대장이 되는 이덕구는 조천중학원 역사·체육교사였는데 교토의 리스메이킨 대학에 다니다가 관동군에 징집됐다. 이날 4.3 관련 해설은 제주4.3평화투어 기획위원장인 오승국 시인이 주로 맡았는데, 희생자 유족도 참여해 멸문지화를 당한 이덕구 일족 중 간신히 살아남은 종손녀 이명자(76)씨가 증언에 나섰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정자"
 
조천진 성벽 위 연북정에서 답사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 연북정 조천진 성벽 위 연북정에서 답사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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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진성 위에 세워진 연북정(戀北亭)에 이르자, 김경훈 시인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정자"라고 농담을 했다. '북을 그리워하다니,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냐'는 풍자다. 여기서 북(北)은 원래 임금을 가리킨다. 제주목 관아에 있는 망경루(望京樓)도 '서울을 바라보는 높은 집'을 뜻하지만, 조정에서 파견하는 목민관들이 실제로는 어디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제주 9개 진성 가운데 하나인 조천진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었으나, 연북정은 일제강점기에 창문까지 달아 순사주재소로 활용된 비운의 장소였다. 4.3 때는 왜구가 아니라 군경의 주민 감시탑 구실을 했다.
 
답사 참가자들이 조천진 외성 앞에서 주최측이 나눠준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
▲ 연북정 앞 점심 답사 참가자들이 조천진 외성 앞에서 주최측이 나눠준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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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현장 10여 곳을 거쳐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엉장메코지'다. 여기는 선문대할망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선문대할망은 덩치가 워낙 커서 옷을 제대로 지어 입을 수 없었는데 백성들이 속옷을 한 벌 지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엉장메코지'가 바로 다리 공사 현장이라는 얘기다.

이곳 지형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암석들이 포개져 있어 그런 전설이 생겼으리라. 실제로 이곳은 제주를 육지와 연결하는 '최단거리'라고 한다. 커다란 옷을 지으려면 명주 100통이 필요한데 백생들은 99통밖에 조달하지 못해 '연륙의 꿈'이 좌절된다.

제주는 물 위에 떠있는 감옥

제주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어 물 위에 떠있는 감옥이었다. 참다 못해 일어난 조선시대 수많은 민중 봉기 때도, 4.3항쟁 때도 그랬다. 지식인으로서 민중의 뜻을 대변해 상소문을 쓰거나 봉기를 지휘한 장두들은 모두 처형됐다. 4.3 때는 토벌군이 겹겹이 에워쌌을 뿐 아니라 미국 해군함정이 바다를 포위했다. 주류 언론의 외면은 지금도 여전하다. 현기영은 <제주도우다> '작가의 말'에서, 이런 답사를 예측이나 한 듯, 독자에게 당부한다.  
 
'독자여, 그대가 이 소설을 읽기로 작심하였다면 그 길은 작가와 동행해 너무도 낯선 삶과 죽음의 비경을 찾아가는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이것저것 살피면서 그 먼 길을 느리게 걸어갈 텐데, 독자도 그 느린 행보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걸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주도우다> 3권 363쪽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제주도우다, #현기영, #조천기행, #한미리스쿨, #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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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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