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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역사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주진오 상명대 명예교수가 9월 30일에 '식민지 조선의 첫 사형수'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재명 의사 관련 이야기다. 일부를 인용해 본다.
 
"1910년의 오늘 한 기독교인 청년이, 지금의 서대문형무소인 경성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긴 후, 일제가 죽인 첫 사형수였지요.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재명(李在明)으로서, 1887년 평양에서 출생했어요.

그는 1905년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안창호가 주도하는 공립협회 LA 지방회에 가입합니다. 그런데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공립협회원들은 매국노의 처단을 결의했고 이재명이 파견되었어요. 동지들과 이완용과 이용구를 차례로 처단하기로 하고, 스스로 이완용을 맡았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국왕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찔러 중상을 입히고, 가로막는 인력거꾼을 살해했지요.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는 비판이 있지만, 박원문은 단순한 인력거꾼이 아니라 이완용의 경호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리대신이 아무 인력거를 불러서 탄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지요. 결국 이재명 의사는 현장에서 칼을 맞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에 넘겨져 1910년 5월 18일에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그는 취조과정과 법정에서 늘 의연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경시청에서 일본 경찰이 "공범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이러한 큰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듬해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천만 동포 모두이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사형이 선고되자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살기 힘들어 머나먼 미국으로 이민까지 갔던 기독교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나라가 망해 간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와 목숨을 걸고 거사를 했습니다. 그에게 나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완용은 중상을 입고 지금 서울대 병원인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들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이재명보다 16년을 더 살았지만,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고생을 했다지요.

사형이 선고되자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던 아내 오인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만주를 오가며 교사생활을 하다가, 3.1운동 직후 사망했다지요(아래 생략). - 주진오 페이스북에서
 
필자도 중고등학교 때 1909년 12월 22일에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습격하여 칼로 찔렀는데 "이완용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라고만 배웠다. 칼에 깊숙이 찔렸다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억수로 재수 좋은 놈이네'라고 뇌까리며 의거 실패를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완용이 살아남았던 것은 정말 재수가 좋아서였다. 그때 현대 의술을 배운, 꽤 유능한 일본인 의사의 실력과 헌신(?) 덕이었다. 이런 사실은 필자가 일본어 전문 번역가인 신한준씨와 함께 <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가온누리)이라는 번역서를 최근에 펴내면서 알게 됐다.

이완용 치료한 일본 의사의 회고
 
신한준,김슬옹 옮김, “조선 통치의 회고와 비판” 표지
 신한준,김슬옹 옮김, “조선 통치의 회고와 비판” 표지
ⓒ 가온누리(도서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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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36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선 식민지 지배 25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인이 세운 "朝鮮日報(일본인이 세운 한국인이 세운 조선일보와 같은 이름의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은 <朝鮮統治の回顧と批判>라는 책을 옮긴 것이다.

바로 이 책에 이완용의 목숨을 구한 일본 의사의 회고담이 자세히 나온다. 열여덟 번째 글인 '위생 사상의 보급'이라는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의 회고담이다. 그는 전 조선총독부의원, 내과부장 의학박사였다.
 
"내가 부임한 다음해의 1월쯤에 이완용 수상이 메이지 거리에 있는 프랑스 교회(지금의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의 기습을 받았다. 이완용씨 피습 사건이다. 이씨는 곧 대한의원 외과에 입원하였다.

당시 외과 부장은 군의 총감 키쿠치 원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과에서는 가능한 치료를 모두 동원하였다. 고열이 계속되고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내과 진단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씨의 부상은 앞에서 껴안고 흉기로 등을 찔렀기 때문에 상처가 가슴막(늑막)까지 도달하였다. 내가 진찰한 결과 가슴막에 많은 피와 물이 고여 있어 이것 때문에 높은 열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이완용 씨의 진찰에는 이윤용, 조중응, 송병준씨 등이 입회하였다. 결국, 고인 피와 물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나는 가슴막에 있는 물을 빼내려면 침을 놓아 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아플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일시적 고통은 참고 이 방법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고 다시 설명하였다.

마침내 침을 놓았다. 혈액성의 물이 나왔고, 치료를 마치자 열도 내렸으며, 점차 경과가 좋아져 퇴원하게 되었다. 내가 한국 정부로부터 2등 훈장을 받은 것은 아마도 그런 관계(이완용씨 때문)가 아니었나 상상했다."
 
1909년에 피습당한 이완용을 살려낸 일본인 의사 모리야스 렌키치의 회고담이 실려 있는 ≪조선 통치의 회고와 비판≫  @김슬옹
▲ 이완용을 살려낸 일본인 의사 모리야스 렌키치의 회고담 1909년에 피습당한 이완용을 살려낸 일본인 의사 모리야스 렌키치의 회고담이 실려 있는 ≪조선 통치의 회고와 비판≫ @김슬옹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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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 자객은 우리에게는 적군(일본)에게 사형당한 독립투사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재명 독립투사는 사형당했지만, 이완용은 악착같이 살아 무려 16년을 더 살다가 1926년에 죽었다.

의사에게 아군과 적군의 구별은 필요 없지만, 일본인 의사의 책무와 실력이 우리에게는 매국노인 이완용을 살려 한국민에게는 또 다른 고통을 주었으니 모리야스 렌키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회고담을 보면 단지 의사로서의 책무뿐만 아니라 일본인으로서의 시선도 당연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식민 지배에 직접 관여한 일본인 90명이 쓴 이 책을 처음 발견한 것은 1997년이었으니 이 책의 번역서를 내기까지 26년이 걸렸다. 번역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극우의 입장을 대변하고 지금도 일본 극우를 편드는 이들의 주요 논거가 될 이 책을 과연 번역해서 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고민이 많았다.

최종 결론은 우리에게 아픈 역사이고 분노가 치미는 기록이지만 꼭 알아야 하는,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역징비록'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 책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1997년 무렵 일제 강점기의 국한문 혼용 문체를 연구하다가 단국대 허재영 교수 소개로 이노우에 카쿠고로(井上角五郞)가 쓴 "협력하고 융합하여 복지를 도모하자"라는 글을 보고 나서였다.

이 글의 요지는 일본이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국한문체를 조선의 주된 문체로 해야 하는데 자신의 노력으로 실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 주장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유길준의 서유견문식과 최남선 기초 기미독립선언문식 국한문혼용체에 일본 영향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매우 중요한 글이라 생각되어 '이노우에 가꾸고로오(井上角五郞)/김슬옹 옮김(1998). 협력하고 융합하여 복지를 도모하자. <한글새소식> 308호. 한글학회'로 발표한 바 있다.

'이노우에'는 우리나라 초기의 신문 발행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그동안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국한문 혼용이 줄기차게 남아 있는 것은 일본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꽤 있었다(려증동, 허재영, 조규태, 김종택). 그런데 그것을 주도한 일본인 이노우에 카쿠고로가 그의 행적을 스스로 고백한 글을 접하게 된 것이다.

고통스러운 읽기가 필요한 이유

이 책에는 조선 말기의 폭정과 가렴주구(가혹한 세금과 재물 약탈)가 자주 언급된다. 언급하는 이유와 의도는 분명하다. 조선 민중을 그런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조선 말의 폭정과 가렴주구는 사실이다. 그래서 민중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은 남의 땅에서 조선 민중을 동학당이라는 이름의 폭도로 규정해 무참하게 총질을 해댔다. 그런 사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니 진정한 회고는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쓴 과거일 뿐.

<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에 일본들의 자화자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완용을 치료한 의사 이야기처럼 우리가 저들의 고백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객관적 사실 정보도 꽤 많다.

식민 지배를 위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울였던 저들의 노력(?)의 실체를 아는 것은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책을 '고통스러운 번역, 꼭 알아야 하는 역사'라는 명목으로 번역 출판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 의사를 우리가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고통스러운 읽기가 필요하다.

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 - 일본인이 쓴 [역(逆) 징비록]

신한준, 김슬옹 (옮긴이), 가온누리(도서출판)(2023)


태그:#일제식민지, #조선통치, #징비록, #신한준,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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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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