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국 출생률은 0.78명이다. 출생률이 하락하기 전, 여성의 삶은 소녀에서 여자, 여자에서 엄마, 엄마에서 할머니가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여성의 삶은 여러 경로를 가지고 있다. 선택의 기회가 늘어났다. 하지만 여성이 더 자유로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으로 겪는 현실과 감정은 아름답고 밝지만은 않다. 여성이 느끼는 가정과 사회의 벽은 생각보다 강건하게 버티고 있다.
그래픽 노블(그림 소설) 작가 류승희는 그간 작품을 통해 여성이 느끼는 감정을 섬세하게 다뤄왔다. 신작 <자매의 책장>에서는 여성에게 가족이 갖는 의미를 선명하게 다루고 있다. 작품에서는 가족 내에 또 하나의 여성 연대를 말하고 있다. 자매는 같이 쓰는 책장에 꽂힌 책을 같이 읽으며 느낌을 전하고 받는다.
자기 전 하루를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일상은 꽉 차 있지만, 기억은 여백이 더 많다. 선과 색은 흰 여백을 통해 느낌으로 되살아난다.
책을 다 읽은 후, 마음속에 남은 먹먹함을 해소해야 했다. 답답하기도 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1일 원주로 출발했다. 그를 만난 곳은 늦여름 더운 공기가 가득한 강원도 원주 터미널이었다. 그는 수수한 차림으로 나를 맞았다.
자매의 소통 수단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속 시간은 자매에게 경험의 장소이며 기억의 매개가 된다. 자매는 기억 속에서 책, 도서관, 엄마, 책장을 공유한다.
자매는 힘들 때 책을 찾는다. 동생 미주는 언니 우주가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을 때 책을 선물한다. 언니 우주는 공무원이 되고서 사회생활이 힘들면 서점에 가서 책을 읽는다. 책은 자매에게 소통의 수단이다. 이 만화에서 책은 소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세 번째 주인공이다.
"저도 힘들 때 책을 읽어요. 제가 좋아했던 책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만화에 등장시켰어요. 원래도 책을 좋아하지만 만화를 그리려고 읽는 책도 있어요."
자매는 책과 함께 추억을 공유한다. 류 작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추억의 공간은 책이 있는 곳이다.
"책에서 자매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피해 도서관으로 가요. 제가 다녔던 도서관을 찾아서 그린 거예요. 시골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강서구로 이사 왔어요. 친구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거예요. 그나마 갈 수 있는 곳이 집에서 5분 거리인 도서관이라… 어렸을 때 도서관에 많이 갔었어요. 10대 때도, 20대 때도, 첫 만화를 준비할 때도 도서관에 다녔죠. 그래서 도서관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자매의 책장>에서도 도서관은 자매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에요."
도서관은 성장 공간이다. 사실 자매를 키운 건 엄마다. 엄마의 가방 안에는 항상 가족을 위한 반찬이 담겨있다. 책에는 '그 안(엄마의 가방)에 꾹꾹 눌러 담긴 엄마'라는 문장이 나온다. 엄마는 집안일과 살림을 위한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해요.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맞벌이를 해도 여자가 아이를 보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이 둘을 기르며 그 사연을 책으로 냈어요.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라는 만화책이에요. 아이를 키우느니라 경력이 단절된 엄마가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합니다. 보통 경력 단절은 20~30대에 생기지요. 보통 엄마의 경력 단절은 기회의 상실이죠. 어머니와 아버지의 희생은 좀 더 다른 것 같아요."
가족은 류 작가가 다루는 주요 소재다. 그렇다면 자매와 책장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매의 책장> '겨울' 편에는 자매끼리 책장을 공유한다.
"우리 언니는 책을 많이 읽어요. 서점에서 일하면서 직원가로 책을 많이 사 왔어요. 언니가 <토지>, <태백산맥> 이런 책들을 사 왔어요. 보다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언니가 리커버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나머지 남은 책 한 권을 저한테 줄 때가 있어요. <자매의 책장>에서 자매끼리 책을 주고받는 장면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어요."
자매끼리 주고받은 책에는 영수증이 꽂혀있다. 작가는 영수증을 버리지 않는다.
"가끔 제가 언니에게 준 책에 영수증이 꽂혀 있어요. 저는 손에 잡히는 거 뭐든 책갈피로 써요. 일상에 디테일을 만화에 살려봤어요."
영수증은 자매의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고, 책갈피가 되고 메신저가 된다. 언니가 산 책을 읽고 동생이 읽었다는 사실은 영수증이 보증한다. 언제 샀는지, 얼마에 샀는지도 알 수 있다. 이것 외에도 작품의 디테일은 작가의 일상 속에서 캐낸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배경, 비 온 뒤 수면 위에 비치는 풍경, 날씨의 변화 등 어느 것 하나 작가가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자매의 책장>에서는 장소에 특히 신경 썼어요. 영화에서 인물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걸어가는 장면이 나와도 거기 안에서도 어떤 느낌을 받잖아요. 사실 별도로 인식하고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어떤 색이나 모양도 작품에 기여하지 않는 것이 없죠."
말이나 글보다 와닿는 감성
류 작가는 10년간 9권의 작품을 그리고 썼다. 전작을 따라가다 보면 말이나 글보다 감성이 와닿는다. 이 감성은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여성 캐릭터로 등장한다. 여성을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여러 감정과 느낌을 가진 존재이다. 작가는 여성 개인이 모두 다르다고 전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작품활동에 큰 주제이기도 하다.
"(캐릭터를 구성할 때) 주변을 보고 많이 참고해요. 30대가 된 기념으로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떠나는 <나라의 숲에는>이라는 만화책이 있어요. 제 주변 사람을 많이 보고 그린 거예요. 예를 들어 카페를 오면 냅킨을 접는 캐릭터가 있는데 제 친구를 보고 따온 거예요. 로맨스 장르가 아닌 여성의 이야기를 주로 하고 싶어요. 지금 인기 있는 만화 대부분이 사랑 이야기에요. 거기서 벗어나서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매번 변화를 주죠."
작품 속 등장인물은 강한 개성 탓에 항상 평화롭게 지내지는 않는다. 세 자매의 이야기인 <그녀들의 방>과 신작 <자매의 책장>을 보면 자매끼리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다가 결국 떨어져 살게 되고 서로의 빈자리를 느낀다.
"제 경험에서 나온 얘기에요. 결혼해서 따로 나와서 살아서 그런지 거기서 느꼈던 감정들이 있어요. '결국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럼에도 기대어 살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대화해도 서로의 감정이 서로 100% 전달이 안 돼요. '침묵 속에 오가는 대화도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나온 장면이에요. 꼭 거창한 게 만화가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작가의 여성성은 남성에게도 적용된다. 소년 마녀가 나오는 <검정마녀 미루>에서 주인공은 '소년' 마녀다. 마녀가 꼭 여성일 필요는 없으니까. 작품 번외편에서 마녀는 노년의 삶은 더 다채롭다. 당당하게 마라톤도 나가고 멋진 옷을 입고 다른 정체성을 보여준다.
"정해진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성과 남성,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성소수자와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을 나누죠. 누구나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없고 가난한 환경에 사는 미루가 주눅 들지 않았으면 했어요.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든 못 하든, 가진 게 있든 없든, 너는 있는 그대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된 얘기에요."
사회적 관습이나 관념에 따르는 캐릭터는 없다. 있는 그대로, 원하는 그대로 소년도 마녀가 될 수 있다. <그녀들의 방>에서는 취업을 못 한 세 자매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생기는 갈등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자매의 책장>에서도 어렸을 적 겪었던 경제적인 문제가 다뤄진다.
"제가 가난하게 자라와서 그런지 항상 해온 생각이에요. 최근에 아니 에르노라는 노벨문학상 받은 프랑스 작가가 있어요. 아니 에르노의 책은 계층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어서 저도 관심 있게 읽고 있어요. 대부분 작가의 눈은 낮은 쪽으로 가지 높은 쪽으로 가지 않아요. 물론 상상해서 작품을 쓸 수 있겠지만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제가 읽은 책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류 작가는 '가난'이라는 소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뉴스를 보면 아이들이 서로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를 나누잖아요. 가난으로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만화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저도 가난한 상황에서 책을 보고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어려운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요? 그 안에서도 분명 반짝이는 게 있어요. 성공하고 밝은 이야기를 꼭 그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건 수많은 에세이와 자기계발서에도 있어요. 만화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만화는 더 다양한 처지와 입장을 다뤘으면 좋겠어요."
제 질문에 독자들은 나름의 답을 찾았으면
가난뿐 아니다. 가족과의 갈등도 만화의 소재 중 하나다. 특히 <그녀들의 방>에서는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나온다. <자매의 책장>에서도 어머니랑 자주 싸우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다시 가족의 의미로 환원된다.
"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고 알코올 중독이 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약간의 안도감도 들었어요. '가족이란 뭘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저도 아직 못 찾았어요."
가족이란 무엇일지 항상 고민한다는 류 작가는 두 아이의 엄마다.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에서도 경력 단절로 육아하는 엄마의 솔직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자매의 책장>에서도 임신한 미주의 남편은 가사 분담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저도 완벽한 엄마는 아니에요. 아이한테 항상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건, 일하는 엄마라면 다 느낄 거예요. 일에도 아이에게도 집중을 못 할 때가 있거든요. 일종의 줄타기 같아요. 꽤 위험해 보이거든요. 위태롭다는 생각에 너무 빠지면 우울해져요. 만화를 그리면, 그 감정에서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어요. 제가 82년생이에요.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제 책을 보고 누군가가 위로받았으면 좋겠어요."
딸로서, 엄마로서 가족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는 류승희 작가는 어떤 작품 활동을 하고 싶을까?
"제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여성과 가족이에요. 지금 40대지만, 50대에는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뭔가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저에게 있어요. 어떤 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걸 그려야만 해요. 그리지 않으면 그 감정은 저에게 남아서 힘들게 하죠.
저에게 만화는 탈출구이며 시작점이죠. 제 작품을 통해 여러 가족과 여성을 만나는 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면, 저는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답은 저에게도 없으니, 작품에도 확실한 정의 같은 건 없을 거예요. 저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고, 독자는 나름 자신의 대답을 찾으면 좋겠어요. 제가 작품을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류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마친 뒤 류 작가는 직접 양산을 씌워주며 원주 기업도시 역까지 데려다줬다. 꾸밈없는 웃음이 좋았다. 끝까지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하고 막막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모든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다.
하지만 류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나와 엄마와 친구들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차례로 등장하는 만화, 주변을 그리는 만화는 막연한 희망보다 지금을 사는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