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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음식 한 접시는 현지인의 환경과 삶의 압축판이요, 정체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기자말]
간밤엔 배가 아파 잠을 설쳤다. 화장실을 들락거려도 복통이 가라앉지 않았다. 남편은 괜찮다는데 나만 탈이 났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은 뭐지? 과나후아토 여행에 이어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지 삼일째이고, 아침을 제외한 모든 끼니를 줄곧 타코로 먹었다. 이쯤 되면 타코는 주식(主食)이요, 생존 음식이요, 영혼의 음식이다.

멕시코시티에 오니 대도시답게 사람도 많고 타코집도 넘쳤다. 줄이 길게 늘어선 곳을 따라가면 그 끝엔 어김없이 타코집이 있었고 길 가던 나도 덩달아 줄을 서고 싶었다. 소문난 타코집만 다녀도 여행일 열흘이 모자랄 것 같았다. 6년 전 혼자 여행 왔을 때 자주 갔던 소칼로(Zocalo)의 타코집도 궁금했다. 그때만 해도 60년된 타코집이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1957년부터 영업했다는 소칼로의 타코 식당
 1957년부터 영업했다는 소칼로의 타코 식당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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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찾았다. 예전 숙소를 확인해 주변 식당을 훑으니 내가 찾던 타코집이 나왔다. 그동안 '멕시코'란 이름만 들어도 떠올려지고 그리워했던 짝사랑을 만났다. 역시 음식은 추억이다. 

그 겨울에 가게 밖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자욱한 김과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찬 작은 가게에서 타코를 받아먹었었지. 잠시나마 '혼자 여행'의 긴장을 내려놓게 했던 한 접시의 타코가 6년 만에 다시 내 앞에 놓이다니 감동이다.
 
6년 전에 먹던 그 타코 맛이 났다.
 6년 전에 먹던 그 타코 맛이 났다.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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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당에서 타코와 같이 나온 7가지 소스. 안 매운 소스는 없음.
 점심 식당에서 타코와 같이 나온 7가지 소스. 안 매운 소스는 없음.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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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내가 달라졌다면 이제는 타코 안에 뭐가 들었는지 구분해 가며 먹는다는 사실이다. 이 집의 타코용 고기는 철판볶음이나 직화구이가 아니라 돼지기름 라드로 고기를 삶다시피 하는, 카르니타스(Carnitas) 방식이다. 기름의 감칠맛과 부드러운 식감으로 사랑받는 타코다. 저녁을 추억과 감격에 젖어 먹었다.

그런데 영혼의 음식도 배신을 하나? 아마도 점심때 갔던 타코집 소스가 원인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남편과 내가 두 끼를 똑같은 메뉴로 먹었는데 나만 점심 식당의 소스를 먹었다는 점과, 남편은 이상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무래도 점심때 화려하게 나온 소스에 흥분해 이것저것 무리하게 먹어본 게 화를 부른 것 같았다. 여기에다가 전날 5시간 넘는 버스 이동으로 여독이 덜 풀린 컨디션에 땡볕에 많이 걸었고 잘 안 마시던 찬 맥주도 과하게 먹었고...

타코 먹을 때 토핑과 소스에 욕심내지 말자고 해놓고 나 스스로 소스의 함정에 빠져 버렸다. 평소 매운맛을 좋아하는 편인데 멕시코 고추는 차원이 다르다. 이곳 고추는 맵기 척도인 스코빌 지수(Scoville Scale)로 표시했을 때 우리나라 청양고추의 최소 3배 이상이다.

멕시코에서 고추는 일용할 양식이다. 마트에도 야채칸엔 고추밖에 없다. 스낵 칩에도 고추 살사 소스를 뿌려 먹고, 맥주에도, 과일에도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고추가 없는 하루는 태양이 없는 낮과 같다.' 
 
맥주 칵테일 미첼라다도 고추가루와 함께 마신다.
 맥주 칵테일 미첼라다도 고추가루와 함께 마신다.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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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에도 라임즙과 소금, 고추가루를 뿌려 먹는다.
 과일에도 라임즙과 소금, 고추가루를 뿌려 먹는다.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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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의 고추만 최소 다섯 가지. 안 매운 고추는 없음.
 마트의 고추만 최소 다섯 가지. 안 매운 고추는 없음.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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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의 복통도 덜 가라앉았는데 오늘은 온몸에 미열도 나고 오한과 근육통까지 있어 서 있기도 불편했다. 과나후아토에서도 배앓이를 한 적은 있었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았다. 이번에는 이튿날 증상이 더 보태지니 괜히 겁이 났다.

망설임 끝에 숙소 근처의 약국을 찾았다. 약사에게 번역기를 이용해 증상을 말하니 의사 진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진료비를 자기한테 내라고 하고 접수표를 주더니 바로 옆의 병원을 안내해 주었다.

의사는 내 말을 듣더니 종이에 먹지를 깔고 뭔가를 깨알같이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 그 자체가 처방전이었다. 두 장으로 된 처방전을 약사에게 가져다 주니 약과 처방전 복사본을 같이 내어준다. 약국이 병원의 접수실을 겸하고 약 조제와 판매 및 복약 지도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멕시코시티의 동네 병원(왼)과 약국(오)
 멕시코시티의 동네 병원(왼)과 약국(오)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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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환자가 말 안통하는 외국인이라 복약 안내가 걱정되는지 약국까지 따라와서 약사에게 추가 설명을 했다. 약과 같이 받아온 처방전은 죄다 스페인어였지만 어떤 약은 12시간 간격으로 한 알씩, 어떤 약은 두 알씩 먹으라는 숫자만 챙겨보면 된다.

당분간 타코는 중단이다. 숙소에 와서 미음을 끓였다. 이곳 쌀 길쭉한 안남미는 죽이 안 되는 쌀이다. 대형마트에서 어렵게 구해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스시용 쌀을 섞으니 미음과 비슷하게 되었다. 당분간 쉬면서 집밥으로 속을 다스릴 참이다. 타코 순례는 잠시 멈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멕시코여행, #멕시코시티여행, #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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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여행자입니다. 여행이 일상이고 생활이 여행인 날들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기억을 '쌓기 위해'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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