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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 스님이 1940년 체포 뒤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작성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초월 스님이 1940년 체포 뒤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작성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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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은 항일운동을 펼친 승려 중 그 업적이 뒤늦게 알려진 편이다. 그는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 내에 항일투쟁의 거점인 한국민단본부를 설치하고 국내 각 사찰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지역에 보냈다.

또한 혁신공보 발간, 승려독립선언서 작성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수감됐다. 출옥 이후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가는 기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을 쓴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수감됐다. 만주 독립운동 자금에 연루 돼 재수감된 이후 1944년 6월 29일 청주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유해는 청주 금선동 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한국전쟁 때 망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독립운동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 태극기 보관했나

백초월은 지난 187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지리산에 위치한 영원사로 입산, 출가의 길을 걷게 됐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영원사 조실이 되었으며 1911년 무렵 임제종운동에 참여했다.

임제종운동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의 조동종과 조약을 맺은 데 반발한 운동이다. 1915년에는 중앙학림 개교 당시 불교계가 내정한 초대강사였으며 지리산 영원사의 주지였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서 그의 경학 실력을 공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백초월은 3.1운동 당시 국내외 동포, 기독교와 천도교는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반면 불교도는 무관심함을 개탄하며 1919년 4월 경 서울에서 본격 독립운동을 펼친다. 백초월의 독립운동은 군자금 모집과 혁신공보 발간으로 크게 나뉜다. 군자금 모집은 그가 직접 하기도 하고 중앙학림 생도이며 민단 부원들을 통해 모금하기도 했으며 모금된 자금은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독립군으로 보냈다.

또한 청년 불자들을 임시정부 등에 보내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불교계 대표로 활동한 한용운은 백초월을 민족대표에 포함시키려했다는 회고가 있다. 

1920년 2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제국의회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고 유학생을 중심으로 시위운동계획을 세웠다 유학생 7명과 함께 체포돼 3월 9일 국내로 압송됐다. 1920년 5월 백초월은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승려들이 주도한 승려독립선언서 사건에도 관계했다. 백초월과 연결된 중앙학림 출신들이 임정 요인이던 안창호와 협의해 불교계 독립자금 모집, 임시정부 의용승군 조직 등을 추진했는데 백초월은 국내에서 이를 지원하며 활동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계룡산 동학사 강주로 있었으며 1934년 무렵 독립운동에 참여한 승려들과 함께 비밀결사체인 일심회를 조직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 신촌 봉원사, 강원도 월정사에서 승려들을 교육했으며 1938년 서울 진관사 마포포교당에서 활동했다. 

1939년 마포포교당 신도였던 용산철도국의 노동자 박수남이 봉천행 열차(봉천은 지금의 심양)에 '한국독립만세'라는 낙서를 쓰려던 게 발각됐고 그 배후로 백초월이 지목되면서 또 다시 체포됐다. 박수남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7월 사망했고 진관사 포교당 주지 김형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여학생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초월은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복역 후 1943년 3월 출소했다. 하지만 출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초월은 만주 독립운동자금 사건에 연루돼 3년형을 선고받은 뒤 결국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4년 6월 29일 옥사했다. 
 
2009년 진관사 칠성각 보수 중 발견된 태극기
 2009년 진관사 칠성각 보수 중 발견된 태극기
ⓒ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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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의 활동이 뒤늦게나마 주목받게 된 계기는 지난 2009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 칠성각 해체·보수공수를 진행하던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 한지로 겹겹이 싼 작은 보퉁이가 발견되면서다.

보퉁이에는 낡은 태극기와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1919년 11월27일 발행), 단재 신채호 발행 신문 <신대한>, 국내에서 발행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이름만 전해질 뿐 실물이 전해지지 않았던 불교계 독립신문인 <자유신종보> 등 독립운동 관련 자료 10여점이 들어 있었다. 

전문가들은 진관사에 태극기와 자료를 숨긴 이를 백초월로 추정하고 있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1920년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국내를 떠나기 전 진관사에 관련 자료를 숨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백초월은 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는 훈격이 조정돼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급 추서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박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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