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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야쿠마리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오후 기차를 탔습니다. 새벽까지 달린 기차는 종점 푸두체리(Puducherry)에 닿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일단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기차역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 새벽, 이 작은 기차역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갑니다.
  
푸두체리의 거리
 푸두체리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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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오가는 사람을 바라봤습니다. 앉은 자리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 않아서 오가는 사람의 차림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비를 입은 사람이나 잔뜩 젖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곧 우산을 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중에는 우산조차 쓰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뛰어서 들어오는 기색도 없습니다. 이제 비가 그쳤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사람 구경을 하다 보니 동이 트고 아침이 될 때까지도 금방입니다.
 
정말 밖에 나가보니 비는 거의 그쳐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볕이 들며 젖은 길까지 다 말랐습니다. 덕분에 습기는 좀 있지만 걱정했던 더위가 다 가셨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날씨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어 참 다행입니다. 아침부터 동네를 조금 걸어 보았습니다. 예상했던 것과 비슷한 풍경도 있었고, 또 아주 다른 풍경도 있었습니다.
 
가로등의 모습도 독특하다.
 가로등의 모습도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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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두체리의 옛 이름은 퐁디셰리(Pondicherry)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하셨을 수 있겠지만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땅이죠.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 땅에서, 작게나마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던 땅이 지금의 푸두체리 지역입니다.

프랑스가 푸두체리를 식민지화 한 것은 1674년의 일입니다. 이후에도 인도 동해안의 여러 지역을 장악했죠. 물론 영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몇 차례의 전쟁을 거쳐 프랑스에는 작은 땅들만 남았습니다. 프랑스는 이 땅들을 모아 '프랑스령 인도(French India)'로 관리했습니다.
 
인도가 독립한 뒤에도 한동안 프랑스령은 남아 있었습니다. 1954년에 이 지역을 사실상 인도 공화국에 반환했죠. 2년 뒤인 1956년, 프랑스와 인도 사이에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에 따라 1962년에 프랑스령 지역이 법적으로 완전히 인도에 반환됩니다.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고아의 경우, 3,700㎢의 나름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두체리는 20㎢도 되지 않죠. 지금도 고아는 주(state)로 승격되었지만 푸두체리는 연방정부의 직할지입니다.
 
고아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여전히 많지만 프랑스는 푸두체리에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진 못했습니다. 그러니 포르투갈에 비해 프랑스는 포기가 빠를 수 있었던 것이겠죠.
 
푸두체리의 프랑스 총영사관
 푸두체리의 프랑스 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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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푸두체리 역시, 제가 흔히 생각하는 인도의 풍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장 이렇게 오래된 가로수를 다른 도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역사가 남긴 흔적은 푸두체리의 골목에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 영향일까요. 푸두체리는 '오로빌(Auroville)' 공동체가 위치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오로빌 공동체는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라는 철학자를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스리 오로빈도는 벵갈 출신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감옥 생활에서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은 그는, 출옥 후 영국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령인 푸두체리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칩거하며 수행을 이어갔죠. 그를 따르는 수행자도 늘어갔습니다.
 
스리 오로빈도는 1950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오로빈도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를 꾸리죠.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하고 평등하게 생활하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로빌입니다.
 
종교도, 인종도, 국적도 포괄한 평등한 공동체. 누군가에겐 수행이었고 누군가에겐 사회실험이었죠. 특히 68혁명과 히피즘이 휩쓸고 지나간 서구 사회에서 오로빌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오로빌 공동체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스리 오로빈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수행자 공동체(아쉬람)
 스리 오로빈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수행자 공동체(아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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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서의 탈출이었겠죠. 평범한 인도와는 다른 도시에서, 평범한 세상과는 다른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들의 탈출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농업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달리, 여전히 오로빌의 경제적 자립은 요원해 보입니다. 오로빌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여금도 납부해야 합니다. 오로빌 공동체가 부유한 은퇴자의 안식처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요. 

[관련기사 : OO천국, 도착하자마자 깨진 환상]
 
푸두체리의 바닷가 길
 푸두체리의 바닷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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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두체리는 특수한 역사를 가진 독특한 땅입니다. 하지만 이곳도 인도였습니다. 인도인들이 살아가는, 인도의 땅입니다. 골목은 지저분하기도 하고, 걷기 어려운 보도에서는 차도를 따라 걸어야 하지요. 차들은 경적을 몇 번이나 울리며 지나갑니다.
 
저는 푸두체리에 짧은 기간만 머문 뒤, 기차 시간에 맞춰 떠났습니다. 기차를 타고 잠깐만 달리면 푸두체리의 이국적인 모습은 사라집니다. 평범한 인도의 풍경이 넓게 펼쳐집니다. 푸두체리 역시 인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풍경이지요.
 
인도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듯한 도시, 푸두체리도 결국 인도라는 땅과 잇닿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품었던 이상을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현실과 벽을 치고 만든 공동체의 실험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걸까요.
 
큰 가로수가 늘어선 푸두체리의 거리
 큰 가로수가 늘어선 푸두체리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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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 채 10분을 달리지 않아도 보이는 인도의 현실에서, 과연 그렇게 탈출할 수 있었던 걸까요. 오히려 내가 딛고 선 오늘과 이 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오로빌의 실험이 얻은 교훈은 아닐까요.
 
지금 결심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현실과 배경은 쉽게 사라질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도, 감정도, 역사도, 현재도, 이 공간까지도 그저 쉽게 지우고 다른 곳으로 바꿔낼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하지만 푸두체리에 남은 나이든 나무들처럼,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선언이나 결심으로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골목 구석구석에 남아 지나가는 여행자를 마주합니다. 벽을 치고 담을 쌓는다고 현실을 지워낼 수 있었다면 좋겠죠. 하지만 사람은 그리 단순하지는 않으니까요.
 
역설적이지만, 현실이 만든 배경과 감정을 무시하면 결코 그 현실을 청산하고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 만들어내는 이상적 공동체보다, 현실을 마주하고 변화를 위해 분투하는 쪽이 저는 더 쉬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푸두체리의 거리
 푸두체리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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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두체리를 벗어나는 기차 위에서, 저는 다시 인도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14억이 살아가는 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오늘도 기차역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짐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붙잡으려는 오토릭샤 기사들이 북적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분주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어쩐지 눈에 다시 한 번 담아보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푸두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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