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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킹스 크로스 역을 닮은 뭄바이의 CSMT 역에서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뭄바이를 떠나 제가 향하는 곳은 인도 중부의 아우랑가바드입니다.

사실 아우랑가바드를 가야 하는지를 두고 여행 내내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우랑가바드에 방문하면 이동 동선이 많이 꼬이기도 했고, 일정을 최대한 줄이고 싶기도 했거든요. 비용 문제도 좀 부담스러웠고요.

하지만 결국 저는 아우랑가바드로 향했습니다. 더 솔직한 표현으로 쓰자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우랑가바드는 인도 미술사의 걸작인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이 있는 도시니까요.
 
아우랑가바드로 향하는 열차
 아우랑가바드로 향하는 열차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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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석굴 사원은 물론 아우랑가바드 시내에 있지는 않습니다. 엘로라 석굴의 경우 아우랑가바드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는 가야 하죠. 아잔타 석굴은 더 멀리 있어서, 편도로 두 시간 반을 생각해야 하는 긴 여정입니다.

긴 거리를 가야하는 만큼, 꽤 많은 분들이 현지 여행사와 협의해 차량을 대절해 움직이시더군요. 하지만 혼자 여행을 하는 제 입장에서는 그 가격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무튼 이틀에 걸쳐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로컬 버스에 실려 두어 시간을 덜컹이며 달리는 것도,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지만, 그래도 달리는 버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아잔타 석굴
 아잔타 석굴
ⓒ 김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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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사원은 모두 29개의 석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절벽에 있는 바위를 깎아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이나 탑을 안치한 형태입니다. 몇몇 석굴은 기원전에 만들어졌지만, 대부분의 석굴은 기원후 5~7세기에 조각된 것입니다.

석굴의 형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석굴 안에 좁고 긴 회랑을 만들고 탑을 모신 경우도 있습니다. 전통적인 사원의 구성 형태와 유사하지요.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한 형태도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많은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참선을 하고 설법을 듣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엇보다 아잔타 석굴사원에는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 아주 특징적입니다. 1번 석굴에 그려진 보살화가 가장 유명하죠. 인도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살화이지만, 유려한 자세와 화려한 장신구, 빛을 이용한 양감 표현까지 수준급의 실력을 보여줍니다. 불상 옆에 그려진 두 보살화의 스타일이 눈에 띄게 다른 것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아잔타 석굴의 벽화 이후 인도 미술사에서는 회화가 오랜 기간 동안 실종됩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그림은 그렸겠지만, 종이나 나뭇잎에 그린 그림은 썩어 없어진 것이죠. 이후 인도 미술사는 주로 조각과 건축을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1번 석굴의 관음보살
 1번 석굴의 관음보살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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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석굴의 대세지보살.
 1번 석굴의 대세지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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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은 모두 불교 석굴인 반면, 엘로라 석굴은 다양한 종교가 한 군데 모여 있습니다. 힌두교 석굴과 불교 사원, 일부 자이나교 석굴까지 섞여 있죠. 시대적으로도 6세기에서 10세기까지 긴 기간을 두고 건축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종교의 석굴이 이웃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엘로라 석굴에서는 16번 석굴이 가장 유명합니다. 석굴이라고 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석굴이라고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절벽에 굴을 판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를 깎아 사원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거든요.

흔히 '카일라시 사원'이라고 불리는 이 사원은, 사원 전체가 거대한 한 개의 돌을 깎아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각 작품이라는 칭호가 더 적절할 수도 있겠네요. 완공에 1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대작입니다.
 
카일라시 사원
 카일라시 사원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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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사원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도, 그것을 완성해낸 능력도 대단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처음 바위를 깎기 시작했을 때, 막막하게 거대한 바위 앞에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의 생에 결코 완성될 리 없는 역사(役事)를,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럼에도 바위를 깎기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잔타 석굴의 경우 제작 연대에 대한 다른 설도 있습니다. 5~7세기에 석굴이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실은 대부분의 석굴이 460~480년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설입니다.

150년이라는 긴 세월만큼이나, 20년 안에 빠르게 석굴을 만들어 낸 열정도 제게는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몇 세대의 삶 전체를 바쳐 만들어진 사원과 한 사람의 시대를 바쳐 만들어 낸 석굴. 그리고 천 년이 훌쩍 넘은 뒤, 제가 그 사이를 걷고 있다는 것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카일라시 사원의 조각
  카일라시 사원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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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이 조성될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왕조는 굽타 왕조였습니다. 굽타 왕조는 힌두교를 믿는 왕조였죠. 그런 시대에 불교 석굴 사원이 활발히 만들어진 것은, 불교를 믿는 지방 세력의 후원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 위태로운 정치적 환경 때문일까요, 아잔타 석굴은 조성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버려집니다. 늦어도 8세기 이후에는 방치된 것으로 보이죠. 주변에 사는 현지인들에게만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죠. 실제로 아잔타의 여러 석굴 중에는 완공되지 못하고 조성 중에 버려진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석굴을 만들던 사람들도, 어쩌면 이 석굴이 금세 버려질 것이라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위를 깎아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 사이를, 오늘도 저와 같은 여행자들이 걷고 있습니다.
 
아잔타 석굴의 순례객
 아잔타 석굴의 순례객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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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사원의 벽화는 유명하지만, 사실 당대 사람들은 이 벽화를 보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석굴 속에는 당연히 빛이 들지 않았을 테고, 당시 조명 같은 게 있었을 리도 없으니까요. 그림을 그릴 때만 촛불에 의지해 그린 뒤, 완성된 뒤에는 그림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지금 아잔타 석굴 안에는 낮은 조도의 조명이 설치되어 있지만,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수준에 그칩니다. 당대에는 오히려 이 유려한 그림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겠죠. 스스로조차 볼 수 없는 그림을 그리던 화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보이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의 열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잔타 1번 석굴
 아잔타 1번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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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바위 앞에 선 막막함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종교였습니다. 수십 년을 바쳐 수많은 석굴을 만들어낼 수 있던 열정의 원천 역시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꼭 종교일 필요는 없겠죠. 우리들 안에도 용기와 열정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잔타 석굴의 낮은 천장 아래, 불상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가가 없어도 좋다는 마음. 완성되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던 사람들. 그들이 만든 흔적을 둘러보았던 순간이, 저의 여행 가운데서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대가 없이 바칠 수 있는 열정이 저에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요. 거대한 바위 앞에 선 막막함을 그것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만 바랄 뿐입니다. 천 년이 넘게 버려졌다가도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석굴들처럼, 단단한 흔적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렇게 거대한 바위를 깎아 사원을 만들어낸 사람들만큼이나 무모한 꿈을 품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아잔타, #엘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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