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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 기자 말

환국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당한 '개선장군'의 자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한반도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정부 요인의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방 후 3개월 만인 1945년 11월 23일 1차로 주석 김구·부주석 김규식 등 임정 요인들이 한반도에 발을 디뎠다. 이어 임시정부 대가족의 귀국 행렬이 순차적으로 이어졌다. 문일민의 경우 1946년 4~5월 사이에 환국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4월 말 임시정부의 생활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윤기섭이 충칭에 있던 수백 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때 함께 들어왔던 것 같다.

이들의 귀국 경로는 1946년 1월 16일 충칭을 출발, 창장(長江)을 거슬러 올라가 상하이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225명의 임시정부 대가족은 교통 및 숙식 등에 대한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1946년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들은 3월 1일 상하이 징안쓰로(静安寺路) 대광명극장(大光明劇場)에서 3.1절 경축식을 치른 뒤 4월 26일 미군정에서 보내온 LST(전차상륙함)를 타고 3일 만인 4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귀국한 문일민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자리를 잡았다.
   
문일민의 집터 추정지 (舊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151-1 / 現 팔판동 152)
 문일민의 집터 추정지 (舊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151-1 / 現 팔판동 152)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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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왼쪽 다리 잃어

1946년 6월 2일 문일민은 망우리의 도산 안창호 묘소를 찾았다.

"선생님, 저 일민이 돌아왔습니다. 보고 계십니까. 우리 대한이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문일민은 안창호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꼭 14년 만에 다시 마주한 것이었다. 문일민은 애타게 안창호를 불렀지만,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안창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산의 묘소를 참배하는 문일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살아서 해방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도산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섞여있었으리라.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문일민은 반드시 통일정부 수립을 이룩하여 도산이 바랐던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노라 다짐하며 묘소를 내려왔다.

그런데 도산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일민은 그만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트럭에 타고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떨어지려 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그만 추락해 트럭에 다리가 깔리고 만 것이다. 이 사고로 문일민은 왼쪽 다리를 잃었다.

해방 후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문일민의 활동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도 사고로 인해 한동안 칩거하며 요양에만 힘썼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문일민의 교통사고를 전하는 보도 (1946년 6월 14일자 한성일보)
 문일민의 교통사고를 전하는 보도 (1946년 6월 14일자 한성일보)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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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통위부(미군정 당시 국방을 담당하던 기구로 오늘날 국방부의 전신) 부장으로 국군 창설을 준비하던 유동열은 충칭 임시정부에서 참모로 데리고 있던 문일민을 불러 국군 창설의 중임을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문일민이 한쪽 다리를 잃는 사고로 인해 더 이상 군인으로 활동하기 힘든 몸이 되면서 이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한평생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늘 현장을 누볐던 문일민. 해방된 조국에서 앞으로 그가 해야할 일도 많았다. 그러니 예기치 못한 사고로 불구가 되고 말았으니 크게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0월 28일자 <대동신문>에 실린 문일민의 사진
 1947년 10월 28일자 <대동신문>에 실린 문일민의 사진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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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족들과 재회

기쁜 일도 있었다. 중국에서 헤어진 가족들과 재회한 것이다. 문일민이 충칭에 있을 당시 아내 안혜순은 자녀들을 이끌고 귀국해 이북에 정착한 상태였다. 그러다 해방을 맞아 월남 후 서울에서 남편 문일민과 다시 만났다.

그동안 생사를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던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만난 문일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비록 한쪽 다리를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그리운 가족들과도 재회했으니 이보다 더 기쁠 수 없었으리라. 이제는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요양에만 힘쓰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문일민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 21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한성일보>
<문탁진 구술>
장석흥, <해방 직후 상해지역의 한인사회와 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28, 한국근현대사학회, 2004.
김광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혁명가 윤기섭>, 역사공간, 2009.
양우조·최선화, <제시의 일기>, 우리나비, 2019.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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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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