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9 20:47최종 업데이트 23.04.19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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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말]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3월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노동시간을 주당 최대 69시간으로 늘리려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안이 과로사 조장법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아직 폐기되지 않고 있다. 주 6일을 일할 경우 하루 11.5시간으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게 된다. 그야말로 눈떠서 눈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이다.

정부는 노동시간 선택권이 마치 노동자에게도 있는 것처럼 이것을 노동시간 유연화라고 불렀다. 또 이렇게 일을 몰아서 한 만큼 노동자들이 휴가도 몰아서 쓸 수 있는 것처럼 근로시간 저축계좌 제도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요즘 청년들은 자기 주관이 뚜렷한 만큼 일할 때 집중해서 일하고, 남은 시간은 잘 저축해뒀다가 긴 휴가를 갈 수 있으니 MZ세대에 딱 맞는 노동시간 개혁이라며 자화자찬도 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MZ세대조차도 특정 전문직을 제외하면 마음대로 휴가를 몰아 쓰는 것이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다. 보통의 직장에서는 자신의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게 매우 눈치가 보일 뿐 아니라, 대체인력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법안은 정규직에만 해당할 뿐이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가 역대 최대치인 815만 명을 넘고, 그 가운데 주 36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열악한 시간제 노동자 역시 역대 최대치로 368만 명이 넘는다. 숫자도 숫자지만 증가 속도도 가파르다. 비정규직은 근로시간을 늘리는 것도, 줄이는 것도 모두 협상력조차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게다가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를 따라가려면 두 배 이상으로 노동 시간을 늘려도 모자랄 지경이다.

주 69시간제 개편안은 기업을 상대로 자신의 근무 조건을 유연하게 타협할 수 있는 협상력 있는 소수를 제외하면 그냥 나머지는 다 죽도록 일만 하라는 얘기다.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이런 문제점을 정부 전문가들이 모른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애주기 전부를 오직 생계를 위해 일만 하다 끝내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까? 태어난 이상 누구나 밥벌이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한 번뿐인 삶을 오직 밥벌이만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지난달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 토론회에서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노동시간 개편안에 대해 설명하자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유준환 의장(가운데)과 송시영 부의장이 듣고 있다. ⓒ 남소연

 
1908년 미국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로조건을 비판하며 "우리에게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도 달라"라고 외쳤던 것은 인간다운 삶에는 생계를 위한 빵뿐 아니라 자유의 장미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근로환경을 개선하여 가족과 시간도 보내고, 친구도 사귀고, 다른 사회 활동도 하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 거리로 뛰쳐나왔다.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며 자신과 타인의 일상을 함께 가꾸는 좋은 삶을 만들 수 없다면 우리 사회 역시 좋은 사회가 될 수 없다.

오래 전 영국에서 대처 총리는 신자유주의 방식의 노동유연화를 밀어붙이며 수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탄압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 사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사회 같은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 공동체는 개인들 간의 각자도생 서바이벌 체제가 된다.

사회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채 교과서에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회는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친구도 사귀고, 지역의 자치활동에도 참여하며 다 같이 공동체 속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정치적 토대이다. 만약 그런 사회 같은 것이 없어져 저마다 자기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체제가 된다면, 우리 내면은 말할 수 없이 외롭고 불안하게 된다.

대처식 유연화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2018년 영국 정부는 '고독부'를 신설했다. 전 연령층에서 외로움, 불안감, 고립감, 고독사가 늘어나자 만든 것이다. 영국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17~25살 청년 가운데 거의 절반인 43%가 외로움과 고립감을 경험한다고 한다. 360만 명에 이르는 영국 노인들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텔레비전을 들었다. 대처식 유연화의 유산은 결국 고독한 개인과 사회관계망의 파손이었다.

주 69시간 노동 사회는 혼자서 살아가는 청년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를 돌봐야 하거나, 가정을 꾸리고 싶거나, 아이를 키우려는 청년들로서는 이 제도 아래에서 일과 삶을 양립하기 어렵다.

일을 위해 나머지 모든 삶을 포기해야 하는 나라에서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법은 독신과 저출산밖에 없다. 오랜 세월 자연스러운 생애주기였던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이젠 비정상적인 정상이 되고 있다. 만약 주 69시간제가 정착된다면 결혼과 출산이 개인의 선택을 넘어 소수의 특권이 될 미래가 머지않아 도래하게 될 것이다. 우리 내면이 어떻게 얼마나 망가질지 심히 우려스럽다.
 

박혜영 / 인하대 영문과 교수 ⓒ 박혜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박혜영 인하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낭만주의 영시를 전공했습니다. 생태정의, 기후위기, 탈성장 전환 등의 주제에 관심이 많으며, 생태 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다룬 저서로 <느낌의 0도: 다른 날을 여는 아홉 개의 상상력>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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