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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일정의 마지막을 발리 섬에서 보낸 뒤, 저는 인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해 콜카타로 들어가는 비행기였습니다. 비행기 티켓에 인쇄된 '콜카타'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드는 약간의 긴장과 설렘. 드디어 소문도 악명도 많던 인도로 가는구나.

쿠알라룸푸르에서 긴 시간 경유를 마치고 콜카타 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가는 것은 위험하고, 인도의 공항은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다고 하더군요. 생각했던 대로 공항 의자에 앉아 하룻밤을 새웠습니다.

해가 뜨고도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공항 밖으로 나왔습니다. 의외로 호객 하는 택시 기사나 말을 거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길래, 목적지와 약간 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는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타고, 일단 시내로 향했습니다.
 
콜카타 시내 풍경
 콜카타 시내 풍경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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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어딜 가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콜카타에 대해서라면 특히 그렇죠. 콜카타에서 인도 여행을 시작했다면 다른 곳은 쉽게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어봤습니다. 물론 저야 그냥 비행기표가 가장 싼 도시를 골랐을 뿐이지만요.

하지만 너무 걱정을 한 탓일까요. 이곳이 그렇게까지 여행하기 힘든 도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리는 복잡하고 사람은 어딜 가든 가득합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매연을 제외하고는 견디기 힘든 것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지저분하고, 낡고, 때로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영광스런 과거의 흔적이 남은 골목 풍경이 인상 깊었습니다. 때로는 붉은 벽돌로 육중하게, 때로는 흰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건물들이 골목마다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에 치여 걸어야 하는 시장통 거리에서까지 말이죠.
 
비비디 박(BBD Bagh)의 콜로니얼 건축물
 비비디 박(BBD Bagh)의 콜로니얼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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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무역 허가를 받으며 콜카타 도시 건설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됩니다. 후글리 강을 따라 배가 드나들 수 있고,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와는 거리가 멀어 무역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죠. 무역항이 설치된 콜카타는 곳 상업 도시로 성장합니다.

물론 영국이 손쉽게 이 땅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굴 제국은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의 무역항을 노리기 시작했죠. 영국은 요새를 건설하고 방어에 나섰습니다. 결국 1756년에는 충돌까지 벌어졌죠. 영국은 처음에는 인도 측에 패배했지만, 곧 콜카타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를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의 기점으로 잡기도 합니다.

1773년 콜카타에는 동인도회사 본부가 설치되었습니다. 1858년 영국령 인도 제국이 만들어진 뒤에는 수도의 역할을 했죠. 인도 제국의 수도가 델리로 돌아간 것은 1911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영국에게 콜카타는 식민지 도시 지배의 테스트베드였습니다. 인종 간 분리된 거주지역 설치, 인구조사, 도로와 인프라의 건설 등 식민 도시를 만들기 위한 실험이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도시 각지에는 유럽식 건축물이 들어섰죠. 시청과 대학, 교회 등의 공공 건축도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첨탑을 갖고 세워졌습니다.
 
라이터스 빌딩의 인도 국기
 라이터스 빌딩의 인도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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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는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영국 지배의 중심이었던 콜카타와 벵골 지역은, 한편으로 인도 독립 세력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배와 함께 성장한 근대적 교육과 문화는 벵골 지역에서 지식인들의 성장을 불러왔죠. 소위 '벵골 르네상스'라 불리는 일련의 운동이었습니다.

인도 사회의 개혁을 외치며 근대화와 악습 철폐, 영국에 대한 저항을 주장한 람 모한 로이는 벵골 르네상스의 시조로 불리죠.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기탄잘리>의 타고르 역시 벵골 르네상스의 주역입니다.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와 같은 과학자들도 성장했고, 비베카난다와 같이 힌두교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당시 콜카타는 런던에 이어 대영제국 제2의 도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영국식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서구식 근대 교육의 도입, 무굴제국의 문화적 영향, 토착 문화의 부흥 운동, 힌두와 이슬람이 섞인 인구 요인 등이 결합하며 급격한 정치적 성장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도 국민의회가 반영 운동을 개시하게 되는 계기가 '벵골 분할령'이었다는 사실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벵골 분할령'은 영국 정부가 벵골 주를 힌두교 지역인 서벵골과 이슬람 지역인 동벵골로 분할하겠다고 선언한 사건입니다. 인도인의 분열을 노린 조치였죠.

이를 계기로 원래 영국에 협력하고 있던 인도 국민의회는 자치와 영국 상품 불매를 포함한 강령을 채택하고 반영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영국이 1911년 벵골 분할령을 철회한 뒤 수도를 델리로 옮기는 것도, 이 반영 운동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콜카타 시내 풍경
 콜카타 시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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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앞서 언급했듯, 지금의 콜카타는 여행자들도 기피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벵골은 결국 둘로 나뉘고 말았죠. 서쪽은 콜카타를 중심으로 지금의 인도 서벵골 주가 되었고, 동쪽은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에 큰 상처가 남은 것은 물론이겠죠.

전쟁과 분단이 남긴 상처와 가난. 빈민 노동자 계층과, 벵골에서 성장한 지식인들 사이의 결합은 콜카타 공산당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했죠. 서벵골은 2011년까지도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콜카타의 택시와 공산당기, 그리고 인력거.
 콜카타의 택시와 공산당기, 그리고 인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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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에 남은 식민지 시절의 건물은 여전히 화려합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박물관인 인도 박물관도, 영국군의 기지로 사용하던 포트 윌리엄도, 빅토리아 여왕을 기려 만든 빅토리아 기념관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가지 안쪽에서는 여전히 인력거가 사람들을 싣고 거리를 누빕니다. 사람들은 길에서 몸을 씻습니다. 인파가 몰린 거리에는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곳곳에 보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던 사랑의 선교회는 오늘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이들의 가는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영광의 역사와 빛 바랜 현실 사이에서, 여행자인 제가 이 도시의 어느 모습을 기억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만난 도시가 콜카타라는 점이 퍽 다행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이곳이 낙후되고 혼잡한 도시라서는 아닙니다. 제가 인도에서 만나야 할 풍경을, 이 도시가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콜카타의 인력거
 콜카타의 인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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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쇠락, 식민과 근대, 정복과 지배. 인도 아대륙의 역사를 거쳐 간 수많은 단어들과, 그 단어 아래에서 실재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콜카타라는 도시야말로 그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땅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의 얼굴과 거리의 풍경을 보고 나면, 그 무엇 하나도 딱 떨어지는 답을 낼 수 없는 인도의 모습을요.

물론 저는 이제야 인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인도의 동쪽 끝에서, 더 서쪽으로 갑니다. 그렇게 서쪽 끝에 닿을 때 즈음이면, 콜카타에서 받은 이 성급한 인상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 답할 수 있을까요. 답에 가까이 갈 수 없다면,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될 수 있기를 다만 바랄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인도여행, #콜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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