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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기자말]
참모부 참모로 대일전쟁 추진

문일민은 입법부(임시의정원)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통신 및 운수에 관한 행정 사무를 통할하는 교통부(交通部)의 총무과장·국방 및 용병에 관한 일체 계획을 통솔하는 참모부(參謀部)의 참모 등으로 활약하며 임시정부의 행정을 보조했다.

특히 그는 1945년 4월 개원한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 당시 "참모부는 참모본부로 고치고 참모는 더 충원하도록 해서 일 좀 해나가도록 해달라"며 참모부의 승격 및 인원 확충을 건의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사무국)와 합작하여 한·미 공동 군사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에 패망의 기운이 드리우면서 임시정부 역시 곧 해방이 다가올 것임을 직감하고 적극적인 대일전쟁에 나서고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문일민은 군사 계획을 통할하는 참모부의 확대를 통해 최후의 대일전쟁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역할을 보다 확대해나가고자 했던 것 같다. 문일민의 건의는 바로 수용되어 참모부는 참모본부(參謀本部)로 개편됐다. 그리고 해방 전후로 참모본부는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 충칭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 내 회의실 (복원)
 중국 충칭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 내 회의실 (복원)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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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입당

1944년 문일민은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탈당했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朝鮮民族革命者統一同盟)에 입당,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됐다.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아래 통일동맹)은 1943년 11월 27일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유동열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창당 직후 이들이 밝힌 당의 주요 종지(宗旨)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 국적(國敵) 일본의 통치권을 철저히 박멸하는 동시에 국제적 침략국의 잔여세력을 구축함에 종사함.
(2) 우리는 국내 대중의 반일폭동을 격기케 함과 동시에 국외에 있는 무장운동과 배합작전을 촉진함에 전력함.
(3) 우리는 세계의 반(反) 침략부대의 일부이며 전후 평화 사자(使者)의 일원임을 자부하는 동시에 어떠한 세력을 막론하고 조선민족의 독립자유를 구속·억제하는 국가·민족과 적극 항쟁함.
(4) 위 3대 목표를 실천함에는 우선 전민족적 통일단체로서 일치 행동에 진출함에 있나니 우선 중국 충칭에 있는 혁명단체와 합당할 수 있는 것은 속히 합당 통일을 완료하는 동시에 기타의 단체와 연합이나 동맹인 통일진선을 결성함에 절대 노력함.
(5) 본 동맹은 혁명운동 각 단체에 대하여 시종 친애와 성충(誠忠)으로 민족 가정(家庭)의 대금도(大襟度: 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를 더욱이 자면(自勉: 스스로 힘쓰다)함.
(6) 우리는 본 동맹의 종지를 찬동하는 동지의 가맹을 환영함.
(7) 본 동맹은 합당통일이 성립됨을 따라 동맹체를 해소하고 통일체에 가입함.


이들은 또 결성 당시 발표한 '선언서'에서 '의형제와 같은 정감적(情感的) 결합을 버릴 것', '개인 단체만의 이해를 목표한 당파적 단결을 버릴 것', '국가·민족의 복리를 목표한 대단결을 위하여 현 단계에 처하여서는 사회주의의 계급투쟁이론으로 자민족의 민족의식을 감삭(減削)하거나 민족적 혁명역량을 분산하는 이론은 정지할 것', '무정부주의의 극자유(極自由)의 이론으로 기성세력과 조직을 부인하자는 그 이론도 정지할 것' 등을 선언하며 "오직 조선민족혁명을 사명으로 한 민족혁명자는 다 통일하자"고 부르짖었다.

문일민의 통일동맹 입당은 '혁신성'을 상실한 민혁당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던 민혁당은 1941년 5월 제5기 7차 중앙회의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이때 민혁당은 임시정부를 한국독립당 인사들이 장악한 '소수를 대표하는 정치기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임정을 확대 개조하여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지휘부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참여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2년 10월 개원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비로소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 민혁당은 야당으로서 임시정부의 확대 개조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당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943년 2월 문일민이 속해 있던 조선민족당 해외전권위원회를 비롯한 군소정당들도 흡수했다.

실제로 임시정부 참여 초기 민혁당은 한독당을 상대로 강력한 대여투쟁을 전개하면서 한독당이 독자적으로 구상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수정 요구를 시작으로 한독당 일당독재나 다름없는 임시정부 체제를 개조하여 모든 항일세력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임시정부의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리고 1944년 4월 제5차 개헌으로 부주석직이 신설되면서 민혁당의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임명되고 국무위원 14석 중 4석, 7부(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문화·선전) 부장 중 군무부장(김원봉)과 문화부장(최석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일정 정도의 기득권을 확보한 민혁당은 이후 한독당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예전과 같은 투쟁력을 보이지 못했다. 한편으로 김원봉 중심의 당 운영에 대해 비(非) 약산계 인사들이 불만을 품고 탈당하기 시작했다. 문일민 역시 한독당 중심 체제에 대한 민혁당의 타협적 태도에 실망을 느끼고 탈당 대열에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일동맹 창당을 주도한 유동열은 문일민이 교통부 총무과장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교통부장으로, 참모부 참모로 선임됐을 때는 참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문일민과 인연을 맺었다. 따라서 문일민의 통일동맹 입당은 유동열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후술하겠지만 이때 맺은 문일민과 유동열의 인연은 해방 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유동열(1879~1950). 광복군의 참모총장이자 통수부 막료로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했다.
 유동열(1879~1950). 광복군의 참모총장이자 통수부 막료로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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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통일동맹은 한독당과 민혁당 양당의 보수적 태도에 실망한 인사들이 혁신운동을 위해 창당한 대안 정당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동열은 통일동맹의 간부들을 국내와 동북 지역으로 파견한 뒤 해당 지역 세력들과 연계하여 혁명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때 문일민 역시 왕량(王良)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했다.

국민당 정부는 1945년 1월 12일 문일민이 경유하는 각 지역의 군정(軍政) 기관이 편의를 봐줄 수 있도록 신분을 보증하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충칭에서부터 정저우(鄭州)-바둥(巴東)-라오허커우(老河口)-난양(南陽)-비양(泌陽)-위샨진(玉山鎭)-쑤이핑(遂平)-시핑(西平)-쉬창(許昌)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문일민의 출장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국가기록원에 소장 중인 문일민의 '공적서'에는 그가 1944년 충칭에서 미군(美軍) 정보연락장교(情報連絡將校)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기록원 소장 <애국지사 문일민 공적서>(1968.10.22)에서 확인되는 문일민의 미군 정보연락장교 활동 기록
 국가기록원 소장 <애국지사 문일민 공적서>(1968.10.22)에서 확인되는 문일민의 미군 정보연락장교 활동 기록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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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임시정부 참모부 참모이자 임시의정원 의원이었던 문일민이 갑자기 미군 장교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어딘가 어색하다. 실제로 정보연락장교라는 직책의 유무는 물론, 해당 직책을 맡아 문일민이 수행한 활동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44년 통일동맹이 미군과 합작으로 진행했던 '옐로우 프로젝트(Yellow Project)'와 관련하여 모종의 활동을 수행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는 1944년 미국 OSS와 통일동맹·민혁당이 합작으로 진행한 옐로우 프로젝트 관련 문서를 공개했다. 해당 프로젝트는 한국인 첩보원 4명을 훈련시킨 뒤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각 지역에 침투시켜 첩보활동을 전개하는 계획으로 추진됐다. 이는 1945년 OSS가 진행한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및 '이글 프로젝트(Eagle Project)'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해당 프로젝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문일민의 참여 여부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첩보원 중 두 명이 통일동맹원이고 이 시기에 문일민 역시 미군 정보연락장교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고려해보면 해당 프로젝트에 있어 문일민 역시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 18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문일민 이력서>
<愛國志士 故 文一民 功績書>, 1968.10.2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5·9·12·37·40·45, 국사편찬위원회, 2005~2011.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2, 국사편찬위원회, 1970·1972.
류동연, <중경 임시정부 시기 신한민주당의 성립과 활동>, 《역사연구》 35, 역사학연구소, 2018
배경식, <'反韓獨黨勢力의 重慶臨時政府改造運動과 解放後 過渡政權 樹立構想'>,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참모부,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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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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